낯선 사위감에 "사랑하면 노숙자돼도 걱정없다"
박열-일본인 아내 중매한 일본 변호사의 권고
우크라이나 난민 가족처럼 돕는 영국 시골마을
한류 좇아 한국 찾은 외국인들 실망시키면 안돼
언어도 국경도 문화도 뛰어넘는 사랑이 답이다
처음 만난 장인어른, 그 한마디
28년 전 가을, 영국 레스터셔의 한 소박한 가정집에서 벌어진 일이다. 훗날 장인이 되신 분이 181센티미터인 내 키를 보고 물었다.
"일본인들은 키가 작던데, 한국 사람들은 키가 큰가?"
"아, 한국에서 저는 난쟁이에 속합니다."
천연덕스럽게 내뱉은 이 한마디에 미래의 장인, 장모는 잠시 눈이 동그래졌다. '이 동양 청년, 겸손한 건가 허풍인 건가?' 하는 표정이었다. 당시 한국남성 평균 키가 약 170센티미터 정도였으니, '난쟁이'라는 표현이 영국 어른들에게는 제법 충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더 놀라운 건 다음이다. 당신 딸이 가난한 박사과정 학생과 결혼해 불투명한 미래를 앞두고 한국으로 떠나겠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한 말이다.
"서로 사랑하면 노숙자가 되어도 걱정할 것이 없다."
장모는 당연히 걱정스러워했지만, 장인의 이 한마디는 28년이 지난 지금도 내 가슴 깊이 남아있다. 취업 걱정, 집값 걱정에 결혼까지 미루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꼭 전해주고 싶은 말이다.
형을 잃고 의사가 된 장인의 삶
1932년 런던 태생인 장인(1932~2023)은 10살 때인 1942년 뇌막염으로 두 살 많은 형(1930~1942)을 잃었다. 형은 당시 장인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형의 죽음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10살 소년은 장래에 '꼭 의사가 되어 사람의 생명을 구하겠다'고 다짐했다.
몇 년 전 봄, 우리 부부는 런던의 장인이 태어난 집을 함께 찾았다. 그 동네 공동묘지에 있는 장인 형의 묘도 함께 찾았다. 장인은 12살에 세상을 떠난 '가장 가까웠던 친구'인 형의 묘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뜨거운 눈물을 줄줄 흘렸다.
장인은 평생 의사였지만 의사들의 파업을 반대했다. "의사가 환자를 돌보는 것,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은 돈보다 훨씬 고귀한 것"이라고 늘 말했다. 그런 장인이 2년 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처남댁의 기적 - 평범한 직장인에서 베스트셀러 작가로
처남의 아내 캐릴은 참 특이한 사람이다. 1997년 처음 만났을 때는 그저 국립공원에서 일하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그런데 첫 딸을 낳고 나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동네 도서관에서 딸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다가 갑자기 '나도 써보자!'고 마음먹었다. 첫 원고는 여러 출판사에서 거절당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쓰다가 둘째 딸까지 낳고, 병까지 나서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런데 2008년, 드디어 한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그 이후 지금까지 70권의 책을 펴냈고, 전 세계에서 50만 권 이상 팔렸다. 각종 상까지 휩쓸었다. 처남댁의 책은 상당수가 한국어로도 번역됐다.
"영감이 안 떠오르면 어떻게 하냐"고 물었더니, "그러면 가급적 글을 안 쓰려고 시간을 보낸다!"고 답했다. 솔직하기로는 처남댁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 그래서 성공했나 보다. 가장 큰 영감의 원천은 남편인 처남이라고 한다. 항상 신선한 아이디어를 준다고…
일본 독립운동 변호사의 후손과의 인연
아내에게는 특별한 일본 친구가 있었다. 조선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했던 후세 다쓰지(1880~1953) 변호사의 외손자 오이시 스스무(1935~2024)이다. 함께 만나 가까이 지내던 분인데 지난해 세상을 떠났다.
후세 다쓰지는 일본인이면서도 1911년 '조선의 독립 운동에 경의를 표함'이라는 글을 써서 일본 경찰의 조사까지 받았다. 그 후에도 2.8 독립선언 최팔용(1891~1922), 의열단 김지섭(1884~1928), 그리고 박열(1902~1974)과 아내 가네코 후미코(1903~1926)까지 변호했다. 특히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감옥 안 결혼 수속까지 대신 해줬다니, 진정한 '사랑의 중매쟁이'가 아닐 수 없다.
이런 할아버지를 둔 오이시 스스무는 "역지사지, 즉 입장을 바꿔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며 "서로 사랑하라!"고 생전에 내게 말했다. 장인의 '사랑하면 노숙자가 되어도 괜찮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한류 바람 부는 영국 시골마을
영국생활 35년, 이제 이 작은 마을도 제법 정이 들었다. 인구 2만 5000명의 이 마을에도 요즘 한류 바람이 거세다. 조그만 동네 병원 간호사들도 내 성을 보고 "김씨는 한국 성이지요?"라며 한국말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한다. 한국식당까지 생겼는데, 주인이 영국인이라 맛은… 뭐 그냥 그렇다. 하지만 한국의 인기를 실감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졌을 때는 우리 마을에도 피난민 228명이 왔다. 이웃 피파 할머니는 마리아라는 우크라이나 여성을 집에 들여 함께 살았다. "마리아를 통해 평화가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되새긴다"고 했다.
또한 우리 동네 에반 부부는 집에 방 두 개를 내어 우크라이나 모녀를 받아들였다. 에반은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은퇴 후 시간 여유가 있었고, 아이들도 독립해 빈 방이 있었다.
"부엌이 좀 붐비는 거 빼면 불편함은 없어요. 오히려 이분들 덕분에 우크라이나 문화를 많이 배웠죠."
그렇게 엄마 나탈리아와 딸 크시나는 영국에 왔다. 나탈리아는 동네 식당에서 일하며, 크시나는 학교에 적응하고 있다.우크라이나 모녀는 친절한 영국인들 덕에 편안하지만, 미래가 불투명해 늘 불안하다고 했다. 내 앞에서 엄마는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그 모습을 본 에반은 말했다.
"이 전쟁, 제발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요. 그게 모두가 바라는 거죠."
나는 그 말을 들으며, 평화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다시 깨달았다.
새만금 잼버리의 민망한 기억
반면 지난해 새만금 잼버리는 정말 아쉬웠다. 영국에서 4500명이나 갔는데, 젓가락도 안 주고 화장실은 더럽고… 이웃인 아론은 그래도 "한국인들이 미안하다고 사과해서 당황했다"며 "지리적으로 가까우면 자주 가고 싶은 나라"라고 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얼마나 민망했을까.
한류에 상처받고 돌아온 동네 친구 딸
더 마음이 아픈 건, 한류에 빠져 한국에 가서 영어를 가르치다가 상처받고 돌아온 우리 동네 영국 친구의 딸 이야기다. 친구의 딸 아이는 2년간 한국의 한 영어학원에서 가르치다가 기진맥진한 상태로 영국에 돌아왔다. "하루 6~7시간 수업에 저녁 먹을 시간은 10분... 학생들은 말 안 듣고, 낙제점도 못 주게 하고... 왜 한국 출산율이 세계 최저인지, 자살률이 최고인지 몸으로 느꼈다"고 말했다.
영국 정부 사이트에는 아예 이런 경고문구까지 올라 있다.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영국인들은 생활과 노동조건이 기대 이하이고, 계약위반, 여권압수, 급여미지급 등의 문제가 있다."
한류로 쌓은 좋은 이미지를 이런 식으로 무너뜨리면 안 되는데 말이다.
사랑이 답이다
35년간 영국에서 살아보니, 결국 사람 사는 건 어디나 비슷하다. 좋은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고, 웃을 일도 있고 울 일도 있다. 하지만 장인이 28년 전에 해준 그 말이 계속 맞아떨어진다.
"서로 사랑하면 노숙자가 되어도 걱정할 것이 없다."
요즘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한다고 하는데, 정말 안타깝다. 물론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어떤 어려움도 견딜 수 있다는 것을, 영국 장인이 28년 전에 이미 가르쳐 주셨다.
그래서 오늘도 영국 처가 식구들에게 고맙다. 멀리서도 늘 따뜻한 마음을 보내주는 사람들. 그들 덕분에 이 머나먼 영국 땅에서도 가족의 온기를 느끼며 살고 있다.
사랑은 국경도, 언어도, 문화도 뛰어넘는다. 결국 사랑이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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