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재벌 비중 축소, 금산분리, 신흥재벌 방지

바야흐로 개혁시즌이 돌아왔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검찰개혁, 언론개혁, 사법개혁을 빛의 속도로 단행해서 국민들의 추석밥상에 선물로 올리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3년 넘게 지체되고 퇴행했던 분야별 개혁과제가 우선순위에 따라 제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이다. 노동개혁, 세제개혁, 교육개혁 등 온갖 개혁요구가 봇물치지만 재벌개혁 요구는 좀처럼 올라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5대 재벌의 문어발 경영위험과 경제력 집중위험이 완화된 것도 아니고 재벌총수의 약탈적인 부당내부거래와 세금 없는 경영권세습 행태가 사라진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재벌개혁을 외치는 목소리는 어디서도 들리지 않는다.

상법개정으로 재벌개혁을 해도 KOSPI 5000만 내세우는 사회

여전히 신흥재벌들은 호시탐탐 과거방식에 의한 지배권 확장과 제국 건설, 경영권 대물림에 나선다. 여전히 거대재벌들은 막강한 사회지배력으로 국가기관을 구워삶고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며 불리한 입법과 정책을 뒤틀고 희석시킨다. 지난 7월 제일모직-삼성물산 불공정 합병과 회계부 정에 연루된 이재용 등 14인 관련자 전원에 대한 19개 혐의 전부 무죄 대법 판결은 우리나라 최대 재벌의 힘을 유감없이 보여준 일대 사건이었다. 선진국 어느 나라에서도 처벌을 면치 못할 중죄이지만 돈의 힘으로 무죄가 됐다. 이 사실을 다들 피부로 알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크게 괘념치 않는 모습이다.

이재용과 이부진, 이서진 남매는 이재용 명의로 달랑 증여세 16억 원을 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부친 이건희 회장이 살아 있을 때 이미 총 16조가 넘는 재산을 보유했다. 에버랜드, SDS, 삼성물산 등 삼성 계열사들과 총수 일가만 가능한 부당내부거래를 몇 차례 했을 뿐인데 그랬다. 이부진, 이서진은 여성 재벌 공동 1위에 나란히 등극했고 이재용은 삼성그룹의 ‘오너’ 총수자리를 꿰찼다. 지난 30년 동안 삼성이 이재용 남매의 재산 증식과 지배권 강화를 위해 해온 각종 부당내부거래의 길이 지난 30년 간의 입법발전으로 지금은 신흥재벌이나 준재벌이 엄두도 내지 못하게 꽁꽁 막혔을까? 그렇지 않다.

이제 재벌개혁은 뭔지 세상에 불만이 많은 사람이나 지껄이는 한물 지난 담론처럼 들린다. 최근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극복하기 위해 상법을 개정했고 추가 개정안도 논의 중이다. 모두 재벌개혁의 일환이지만 누구도 재벌개혁 소리를 앞세우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나는 이스라엘의 보다 발본적인 재벌개혁 사례를 떠올린다.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 재벌 중심의 경제구조를 수술했는지 알리고 싶다. 비결은 1999년 회사법 개정과 2013년 경제력집중완화법이라는 두 차례의 결정적 개혁입법으로 재벌체제에 고유한 문어발 확장과 부당내부거래라는 두 개의 팔다리를 꽁꽁 묶어놓은 데 있다.

 

4일 오전 서울 종로구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에서 '주요 5대 재벌 계열사 및 업종 현황 발표 및 재벌 개혁 촉구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2024.6.4 연합뉴스
4일 오전 서울 종로구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에서 '주요 5대 재벌 계열사 및 업종 현황 발표 및 재벌 개혁 촉구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2024.6.4 연합뉴스

피라미드 출자 규제와 금산분리 강행

먼저 이스라엘 모델의 법적 내용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의 경제력집중완화법은 기업집단의 출자단계를 최대 2단계, 즉, 손자회사까지만 허용했다. 다만, 모회사가 자회사의 지분을 50% 이상 가져야 한다는 식의 ‘최소지분율’ 요건은 따로 두지 않았다. 대신 지배(Control)의 정의를 지분율이 아닌 ‘회사의 활동을 지시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실질적 지배력 개념으로 정의했다. 이로써 50% 미만의 지분을 가진 경우라도 실질적 지배력이 인정되면 자회사나 손자회사로 보고 특수관계인 거래 규제를 적용받도록 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박상인 교수 등 한국의 개혁론자들은 이스라엘 모델을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단순히 출자단계만 제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단계별 최소지분율(예컨대 50% 이상)을 함께 강제해야만 적은 지분으로 문어발처럼 지배하는 재벌 체제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출자단계 제한과 지분율 제한이 결합될 때 비로소 평균 3%도 안 되는 지분율을 가진 총수가 대기업집단 경영권을 100% 장악해온 재벌 체제에 고유한, 소유와 지배의 괴리를 막는 실효적인 규제가 될 수 있다.

이스라엘은 2013년 법으로 피라미드 소유구조만 직접 규제한 게 아니다. 금산 분리를 안 할 경우 필연적으로 초래되는 금융기관의 재벌 사금고화를 막고 그룹의 부실이 금융시스템을 통해 국가경제 전체의 위기로 확산될 위험성을 방지하기 위해 엄격한 금산 분리 정책도 함께 실시했다. 자산 규모가 큰 최상위 기업집단을 대상으로 금융기관과 사업회사를 동시에 소유하거나 지배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에 따라 거대 재벌들은 그룹의 핵심을 금융으로 가져갈지, 아니면 산업(제조업 등)으로 가져갈지 고통스러운 양자택일을 해야 했다.

특수관계인 거래 3중 필터장치

2013년의 경제력집중완화법으로 피라미드 출자 규제를 하기 전에도 이스라엘은 피라미드 소유구조 안에서 벌어지는 특수관계인 거래(related party transaction, RPT)를 통제하기 위한 정교한 3중 필터링 장치를 1999년 회사법 개정으로 마련해두었다. 모든 중요한 특수관계인 거래는 반드시 감사위원회와 이사회의 승인을 순서대로 거친 후 최종적으로 주주총회의 특별승인을 받아야 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거래에 개인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지배주주 및 그 특수관계인의 의결권은 배제된다는 점이다. 더욱이 주주총회의 특별승인 요건은 이해관계 없는 주주 과반수의 찬성과 그 찬성표가 반대표의 2배를 넘어야만 충족된다. 산 넘어 산이다. 이스라엘 회사법은 이사와 마찬가지로 지배주주 역시 회사에 대해 공정하게 행동해야 할 의무(duty of fairness)를 부담한다고 명시하고 이를 위반하여 소수주주에게 손해를 끼쳤다면 소송 대상이 되도록 했다.

특수관계인 거래는 재벌총수와 계열사의 거래이건 계열사 간의 거래이건 모두 총수의 쌍방대리 거래로 볼 수 있다. 쌍방대리 금지는 본인과 대리인의 이해충돌을 피하기 위한 민법의 기본원칙이기 때문에 회사법이 총수(지배주주)의 쌍방대리를 원칙적 금지대상으로 보고 삼중 사중 규제를 가하는 것이 조금도 이례적이거나 특별한 게 아니다. 입법례로 보더라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가 다 비슷하다. 타타 그룹이나 릴라이언스 그룹 등 초대형 재벌체제의 발흥으로 고심하던 인도도 2013년 회사법 개혁으로 주총 승인 의무화와 특수관계인의 의결권 배제 등 본격 규제대열에 합류했다. 오히려 총수의 자기거래나 쌍방대리 특권을 오랫동안 묵인하고 방치하다 뒤늦게 다양한 예외와 편법을 열어놓으며 미온적으로 규율해온 우리나라 회사법이 글로벌 스탠더드와 거리가 먼 이례적인 경우다.

재벌개혁의 계기와 효과

이스라엘의 강력한 재벌개혁은 2011년 여름, 높은 집세에 항의하는 대규모 사회정의 촉구시위가 소수의 재벌가문이 국민경제를 지배하는 경제력 집중현상에 대한 국민적 분노로 확산되면서 가능했다. 또한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이 분리되지 않아 재벌이 계열 은행과 보험사, 연기금을 사금고처럼 이용하다 동반 부실에 빠질 수 있다는 위기감도 팽배했다. 결국 국민적 압박에 직면한 정부는 특별위원회를 출범시켰고, 이 위원회의 권고안이 2013년 경제력 집중 완화 입법으로 이어졌다. 이는 재벌 중심 경제구조가 낳은 불평등과 시스템 리스크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임계점에 도달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아래로부터의 개혁이었다. 이 법은 기존 대기업집단에 출자단계 구조조정을 위해 4년에서 6년의 유예기간을 부여했고 이 기간이 2019년에 모두 종료됨에 따라 이스라엘 재계에 거대한 구조조정이 일어났다.

이러한 개혁입법은 시장에 즉각적이고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2013년 법 제정으로 기존 기업집단은 시장의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한 유예 기간을 부여받았다. 법 시행 당시 이미 3단계 이상의 피라미드 출자 구조를 가진 기업집단은 법의 기준에 맞추도록 기본 4년, 구조가 복잡한 경우 최대 6년의 유예 기간을 가졌다.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의 상위 재벌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자신들의 피라미드 구조를 해체해야만 했다. 수십 개의 3, 4단계 계열사들이 시장에 매물로 나왔고, 재계의 지형 자체가 바뀌는 거대한 구조조정이 일어났다. 또한 법은 거대 산업자본 그룹이 거대 금융회사를 동시에 소유하는 것을 금지함으로써, 재벌이 금융계열사의 자금을 쌈짓돈처럼 이용해온 오랜 관행을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신흥 재벌 억제 효과

그 효과는 뚜렷했다. 법 시행 전 상위 20대 재벌이 전체 상장사 시가총액의 약 50%를 차지하던 극심한 집중상태가 2019년 유예기간 종료 후 30%대 초반으로 크게 완화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두 차례의 개혁입법이 가져온 가장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변화는 신흥 대기업의 성장경로 자체를 바꿨다는 점이다. 기존의 특수관계인 거래에 대한 3중 규제에 더해서 피라미드 구조가 해체되고 금융-산업자본이 분리되면서 이제 이스라엘에서 창업한 신진 기업가가 과거의 이스라엘 재벌이나 지금의 한국 재벌처럼 무분별한 문어발 확장으로 제국 건설에 나서는 길은 사실상 차단됐다. 1999년의 개정 회사법은 터널링(tunneling)을 통한 편법적인 사익 편취와 자금 조달을 막는다. 성공한 창업주가 개인회사를 세운 뒤 기존 회사의 일감이나 자금을 몰아주려 해도 이해관계 없는 일반 주주들의 까다로운 승인요건을 충족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2013년의 경제력집중완화법은 빚을 이용한 문어발 확장을 막는다. 과거 재벌들처럼 적은 자본으로 1단계 회사를 세운 뒤 빚을 내어 2, 3단계 회사를 사들이는 레버리지 방식의 제국 건설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두 개혁은 이스라엘의 신흥 기업가들에게 명확한 신호를 주었다. 불투명한 내부거래와 복잡한 지배구조를 통해 제국을 건설할 생각을 버리고 핵심사업 역량을 키워 주주들을 설득하고 시장의 정당한 평가를 받아 성장하라는 것이다. 이는 재벌개혁이 단순히 기존의 기득권을 해체하는 것을 넘어 미래의 경제성장 경로를 더욱 건강하고 투명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이스라엘에서도 재벌개혁의 결과로, 특히 특수관계인 거래 3중 필터장치로 외국의 주주행동주의 기업사냥꾼들에게 판을 깔아주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없지 않았으나 유예기간이 끝난 지 7, 8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그런 우려는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는 사실이 입증됐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총수일가의 사익편취를 틀어막는 개혁조치가 이사와 임원의 합리적 경영판단을 저해할 리 없다는 상식이 이긴 셈이다.

한국 재벌의 심각한 경제력 집중과 구멍투성이 법적 규제

이스라엘의 성공 사례에 비춰볼 때 한국의 현실은 참담할 정도로 이례적이다. 이스라엘에선 강력한 구조개혁으로 상위 20대 재벌의 시가총액 비중이 30%대 초반까지 낮아졌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상위 5대 재벌이 여전히 시가총액의 50%를 훌쩍 넘고 최대 재벌인 삼성 하나가 30% 안팎을 차지하는 극심한 경제력 집중상태가 조금도 개선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재벌체제의 독특하고 무책임한 소유지배 구조를 사실상 방치하고 있다.

더욱이 이스라엘이 1999년에 이미 도입한 특수관계인 거래에 대한 3중 규제장치(감사위-이사회-주총 승인)와 이해관계자 의결권 배제라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4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도입하지 못한 우리 상황은 비정상적이다. 총수의 맹목적인 지배권 확장과 약탈적인 내부거래를 막기 위해 필수적인 출자단계 제한과 엄격한 금산분리, 주총 승인 의무화와 특수관계인 의결권 배제, 이사의 입증책임 전환이라는 근본적인 수술을 외면한 채 우리 정치는 늘 뒷북치며 솜방망이 규제만 되풀이해왔다. 이는 압도적인 경제력 집중비율이 말해주듯이 한국 재벌의 사회 지배력이 너무나 막강하기 때문이다. 우리사회는 지금도 5대 재벌의 이익이 곧 국가의 이익이라는 낡은 신화에 인질로 잡혀있다. 더 나은 법과 제도를 강구해서 잘못된 현실을 바로잡을 막중한 책임을 가진 정치권과 학계, 언론은 안타깝게도 이 신화를 추종하며 충실한 스피커 역할을 해주고 있을 뿐이다.

맺음말

우리나라의 선거 대의정치 체제가 거대 양당과 국회의원의 이기적 셀프입법 특권의 인질이 되었듯이 우리나라의 시장경제 체제는 5대 재벌과 재벌총수의 약탈적 셀프거래 특권의 인질이 된 지 오래다. 하루바삐 재벌총수의 자기거래와 쌍방대리 특권의 원칙적 금지와 입증책임 전환, 독립이사 중심 감독, 주주총회 특별승인과 특수관계인의 의결권 배제 등 글로벌 스탠더드를 도입하여 시정하지 않는 이상 한국의 재벌 대기업은 인공지능 시대와 ESG 책임 시대에 번영은 고사하고 생존조차 도모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절망은 금물이다. 이스라엘이 해낸 재벌개혁을 우리국민과 국민주권정부가 못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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