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 검찰 법원 언론 학계의 집단적 침묵-동조-협력

지난 25년간 삼성은 총수의 사법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국가와 사회의 주요기관들을 구워삶는 국정농단을 일삼았다. 놀랍게도 국가와 사회의 주요기관들은 대부분 삼성의 입장을 충실히 대변하는 역할을 자처했다. 예상치 못한 법학교수 43인의 형사고발로 불거진 이건희-이재용 부자의 형사사법리스크를 국가비상사태이자 경제비상사태로 인식했다. 비상사태에서는 법이 멈춘다는 오랜 법언의 가르침처럼 삼성총수의 비상사태 앞에서 대한민국의 법치주의가 멈춰 설 때가 많았다.

한 나라의 법치주의와 시장경제의 건강성은 그 사회가 가장 강력한 경제권력을 어떻게 통제하는가에 의해 판가름 난다. 기업권력과의 긴장 속에서 원칙을 지키려는 국가시스템의 노력이 살아 있을 때 그 사회는 공정하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룰 수 있다. 거꾸로 국가시스템이 기업권력의 편의를 봐주는 역할을 하며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부정할 때 법과 상식은 무너지고 자본주의는 약탈의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지난 25년간 삼성그룹의 경영권 승계과정은 대한민국이 후자의 길을 걸어온 게 아니냐고 우리 사회에 묻는 고통스러운 사례다.

이 과정은 총수 일가만의 힘으로 완성되지 않았다. 정치권과 언론, 검찰과 법원, 관가와 학계 등 우리사회의 가장 신뢰받아야 할 공적 기관들의 집단적 침묵과 동조, 때로는 적극적인 협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우리사회의 주요기관들은 지난 30년간 삼성과 ‘황제’를 위해 제자리에서 최대한 눈을 감고 귀를 닫으며 최대한 편의를 봐주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서글프고 비통한 마음으로, 나는 이 글에서 그 부끄러운 부역의 역사를 작은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부당합병·회계부정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게 무죄가 확정됐다. 대법원 3부(주심 오석준 대법관)는 17일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행위·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 회장에게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사진은 지난 5월 30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열린 2025 삼성호암상 시상식에 참석하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2025.7.17 [연합뉴스 자료사진]
부당합병·회계부정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게 무죄가 확정됐다. 대법원 3부(주심 오석준 대법관)는 17일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행위·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 회장에게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사진은 지난 5월 30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열린 2025 삼성호암상 시상식에 참석하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2025.7.17 [연합뉴스 자료사진]

1. 검찰: 의도적 늑장, 선택적 칼날, 몸통은 외면한 축소 기소

2000년 6월, 법학교수 43명은 대한민국 사법정의를 향한 중대한 질문을 던졌다. 이건희 회장이 총수권력을 남용하여 이재용 남매에게 에버랜드 지배지분을 헐값에 넘겨준 행위는 그룹차원의 조직적 특별배임죄라는 내용의 고발장이었다. 검찰의 답변은 신속하고 단호했다. 단 한 달 만에 불기소 처분이 날아왔고 서울고검 항고와 대검 재항고도 기각됐다. 검찰조직 전체가 법학교수 43인의 양심과 인생을 건 분석과 절규를 무시한 셈이었다.

검찰은 끈질긴 재고발과 여론의 압박에 못 이겨 마지못해 수사에 나섰지만 그 과정은 '봐주기'라는 단어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직무유기의 연속이었다. 사건의 본질을 파헤치기보다 시간을 끄는 데 집중하던 검찰은 마침내 공소시효 만료를 불과 하루 앞둔 2003년 12월 1일 기소했다. 그러나 칼날은 몸통인 이건희 회장과 범죄에 가담한 주주 계열사 대표이사들을 모두 비껴간 채 허태학 사장과 박노빈 전무라는 두 '마름'만을 향했다. 심지어 1심에서 유죄가 나오면 이 회장을 기소하겠다는 대국민 약속은 2심 유죄 판결이 나온 뒤에도 지켜지지 않았다. 결국 이 회장은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 이후 출범한 조준웅 특검에 의해 2008년이 되어서야 간신히 기소되었다.

검찰의 직무유기는 에버랜드 헐값발행 이전 단계의 1차 연금술 수사과정에서 더욱 노골적이었다. 이재용 부회장이 44억 원의 종자돈을 1년여 만에 450억 원 이상으로 불리는 과정에 동원된 삼성에스원, 삼성엔지니어링 등의 배임행위에 대해 검찰은 공소장에 범죄혐의는 인정되나 공소시효가 지나 기소할 수 없다고 스스로 기재했다. 의도적인 늑장수사로 범죄자에게 면죄부를 준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나아가 이재용 부회장의 인수자금 경로는 수사하면서도, 똑같이 에버랜드 CB를 인수한 이부진, 이서현 등 세 딸의 자금출처는 의도적으로 외면했다. 주주로서의 권리를 포기하고 총수 일가에게 부(富)를 몰아준 계열사 대표이사들 역시 수사대상에서 제외했다. 이처럼 검찰은 의도적 늑장수사, 선택적 수사, 축소 기소라는 비판을 받으며, 결과적으로 재벌총수 일가의 불법적인 경영권 승계과정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2. 언론: 감시견이 되기를 포기하고 재벌의 입장을 대변

한국의 주류 언론은 재벌이라는 거대한 권력 앞에서 사회의 감시견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했다. 삼성 등 대기업이 집행하는 막대한 광고비는 많은 언론사에 재갈을 물렸고 그에 따라 비판적 기사는 지면과 화면에서 사라졌다는 지적이다. 그 빈자리는 재벌이 내놓은 보도자료를 그대로 받아쓴 홍보성 기사와 총수의 불법행위마저 경영활동의 일환으로 포장하는 왜곡된 프레임으로 채워졌다. 불공정 합병은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위한 시너지 창출'로 둔갑했고, 총수의 사법리스크는 '오너 리스크'가 아닌 국가경제 전체의 사법리스크로 둔갑했다.

언론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총수의 안위를 국가경제의 안녕과 동일시하는 신화를 끊임없이 생산하고 유포한 것이다. 총수가 구속될 위기에 처하면 ‘경영공백’, ‘투자위축’과 같은 단어를 동원해 경제 전체를 인질 삼아 공포분위기를 조장했다. 이는 재벌총수에게 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모든 시도를 ‘반(反)기업, 반(反)시장’ 행위로 낙인찍는 효과를 낳았다.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봉사해야 할 언론이 오히려 국민의 눈을 가리고 재벌총수 일가의 사적 이익이 국가적 대의인 것처럼 포장하며 그들의 논란이 된 행위를 비호하는 방패막이 역할을 했다.

 

17일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에서 깃발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이날 부당합병·회계부정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게 무죄가 확정됐다. 2025.7.17 연합뉴스
17일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에서 깃발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이날 부당합병·회계부정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게 무죄가 확정됐다. 2025.7.17 연합뉴스

3. 특별검사: 범죄를 단죄하는 칼이 아닌 불법자산 합법화 논란

2008년 조준웅 특별검사팀은 이건희 회장이 임직원 명의로 숨겨온 4조 5천억 원대의 차명재산(주로 삼성전자 주식)을 발견했다. 이는 명백한 조세포탈 증거이자 불법적인 부의 세습을 위한 비자금이었다. 그러나 특검의 칼날은 범죄의 심장을 향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이건희 회장은 단 한 푼의 상속·증여세 추징도 없이 차명재산 전부를 실명계좌로 전환할 수 있었다. 삼성특검은 재벌총수의 불법적인 차명재산을 합법적인 자산으로 실명 전환하는 데 도움 준 거 아니냐는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더욱이 3심 선고로 특검 임무가 종료되고 7개월 만에 조준웅 특검의 아들이 삼성전자 해외지사에 과장급으로 특채된 사실이 드러났다. 누가 봐도 부적절한 처신은 삼성특검의 공신력을 뿌리부터 뒤흔들며 국민의 불신을 최고로 끌어올렸다. 국민이 부여한 특검의 권한으로 삼성총수의 편의를 봐준 것이 아니냐는 합리적 의혹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일어나서는 안 될 이 사건은 대한민국 사법정의가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으로 남았다.

4. 사법부 (1): 배임액수 축소라는 고무줄 잣대로 형량을 조종하다

사법부의 역할은 무죄판결이라는 노골적인 방식 외에 유죄를 인정하면서도 그 죄의 무게를 의도적으로 줄여주는 교묘한 방식으로도 이루어진다. 이건희 회장이 빠진 에버랜드 사건의 1심, 2심 판결과 이건희 회장이 기소된 SDS 사건에서 유죄를 선고한 1심, 2심, 3심 판결은 배임액수를 산정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재판부가 자의적인 기준을 적용하며 총수의 형량을 관리하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재판이 아닌 조작에 가깝다는 비판까지 나왔다.

당시 재판부들은 배임액수를 산정하며 두 가지 사실을 외면했다. 첫째, 에버랜드의 전환사채(CB)와 SDS의 신주인수권부사채(BW)는 이재용 부회장뿐 아니라 이부진, 이서현 등 세 딸에게도 똑같은 조건으로 발행됐다. 그럼에도 에버랜드와 SDS의 헐값발행사건을 다룬 모든 재판부들은 오직 이재용 부회장에게 귀속된 부분만을 배임액수에 포함시켰다. 범죄로 인한 회사의 전체 피해액의 절반을 계산에서 누락한 셈이다.

둘째, 에버랜드 헐값발행의 배임액수를 산정할 때 이재용이 인수한 에버랜드 지분이 단순히 에버랜드 지배지분을 넘어 삼성그룹 전체를 지배하는 황금지분이라는 실질을 무시했다. 에버랜드 지배지분이든 그룹전체의 지배지분이든 지배권 프리미엄을 재벌과 대기업 세계의 상식에 맞춰 제대로 쳐줬다면 에버랜드의 배임액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을 것이다. SDS 재판에서도 다르지 않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런 기초적인 사실을 몰랐을 리 없는 재판부들이 배임액수를 이렇게 산정한 이유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법)상 배임액이 50억 원을 넘으면 5년 이상 중형선고가 불가피해서 집행유예를 붙여주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냐는 해설이 붙었다. 이는 법관이 처음부터 집행유예가 가능한 가벼운 형량 선고라는 목표에 맞춰 범죄의 규모를 꿰맞춘 것이라는 의심을 사기에 부족하지 않다.

5. 사법부(2): ‘헐값발행해도 회사손해 없다’는 해괴한 논리로 총수에게 면죄부를 주다

에버랜드 전환사채(CB) 헐값발행 사건은 경영권 승계를 위해 회사와 주주에게 막대한 손해를 끼친 명백한 배임행위였다. 그러나 사법부는 ‘저가발행을 해도 기존주주에게 손해를 끼칠 뿐 회사 자체에는 손해가 없다’는 황당한 궤변을 동원해서 무죄를 선고했다. 신주를 아무리 저가로 발행해도 주주배정을 거치는 이상 주주들이 포기한 실권주를 제3자에게 넘겨주는 경영진의 행위는 배임죄가 되지 않는다는 취지였다. 신주발행물량이 발행주식의 200%에 달할 만큼 많더라도, 특수관계인 주주들이 모두 신주인수를 포기했더라도, 제3자가 총수자녀일지라도, 발행가격이 아무리 헐값이라도, 상관없다는 것이었다. 이때 기존주주들은 손해를 보겠지만 회사에는 미리 정한 발행가액이 들어오기 때문에 회사엔 손해가 없다는 것.

회사의 주인인 주주들은 막대한 손해를 봤으나 회사는 손해를 본 게 없어서 배임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판결은 법과 상식을 우롱할 뿐 아니라 그때나 지금이나 재벌총수들의 경영권승계를 위한 헐값발행에 면죄부를 주는 위험천만한 판결이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이 궤변을 처음으로 개진한 이가 에버랜드 허태학 사장의 1심 변호인을 맡은 전 대법관 이용훈 변호사였다는 사실이다. 1심 재판부와 2심 재판부는 이 전 대법관의 법리주장을 배척하고 허태학 사장에게 배임유죄를 선고했으나 몇 개월 후 이용훈 전 대법관이 노무현대통령에 의해 대법원장에 임명되면서 상황이 바뀐다. 즉, 변호사 이용훈 시절에는 기각된 법리주장이 대법원장 이용훈 시절에는 삼성특검이 기소한 이건희 사건의 1심과 2심, 대법 판결에서 모두 정당한 법리해석으로 인용된다.

요컨대, 삼성특검 재판부들은 예외 없이 현직 대법원장의 변호인 시절 법리주장을 받아들였다. 우리나라법관들은 승진, 전보 등 본인에 대한 인사권자인 제왕적 대법원장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측면이 있다. 더욱이 당시만 해도 삼성특검 사건처럼 중대한 사건은 법원장이 직접 재판부를 정해줬다. 대법관 0순위 법원장으로부터 임의배당을 받은 재판부는 법원장을 의식해서라도 대법원장의 입장에 부합하는 판결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6. 사법부(3): 전원합의체 회부를 막아선 대법원장의 노골적인 재판개입

삼성특검의 에버랜드 헐값발행 사건을 맡은 소부 소속 4인 대법관의 하나인 박시환 대법관은 소수의견을 내며 사건의 전원합의체 회부를 요구했다. 소부에서 전원일치를 이루지 못해서 대법관 1인이 전원합의체 회부를 요구하면 무조건 수용하게 돼있지만 이용훈 대법원장의 반응은 충격적이었다. 그는 전원합의체 회부를 결정하는 대신 에버랜드 사건이나 SDS 사건을 다루지 않는 소부로 박 대법관을 재배정하는 인사 조치를 단행했다.

전원합의체로 사건이 넘어오면 자신이 변호를 맡았던 사안이라 당연 제척되기 때문에 이용훈 대법원장이 전원합의체 심리를 요구한 박시환 대법관을 에버랜드 담당소부에서 빼낸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누가 봐도 다른 목소리를 내는 대법관을 재판 도중에 배제한 부당한 재판개입행위였다. 내부반발이 있는데다 내가 쓴 비판 글까지 발표되자 인사조치는 하루 만에 철회됐다. 박 대법관에 대한 이용훈 대법원장의 사법행정권 남용스캔들은 제왕적 대법원장의 존재 앞에서 법관과 재판의 독립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다.

7. 사법부(4): ‘준법경영감시위’라는 쇼를 제안하며 면죄부를 주려 한 재판장

이재용 부회장의 뇌물공여 국정농단 사건의 파기환송심을 맡은 정준영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첫 공판에서 매우 이례적인 제안을 한다. 삼성이 진정성 있는 ‘준법감시위원회’를 만들어 실효적으로 운영한다면 이를 양형에 반영하여 집행유예를 선고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비친 것이다. 뇌물액수를 2심에 비해 2배 이상 키운 대법원의 파기환송취지가 이재용에게 실형을 주라는 데 있었기 때문에 정 부장판사가 고심 끝에 찾아낸 묘수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이는 형량을 깎아줄 테니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라고 재판장이 피고인에게 직접 조언을 해준 꼴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삼성은 이 제안에 화답하여 에버랜드 사건에서 총수 편에 서서 무죄의견을 냈던 전직 대법관을 위원장으로 영입하는 등 위원회를 구성, 운영했다. 비록 정준영 부장판사 스스로가 그 실효성을 인정하지 않고 결국 실형을 선고했지만 재판과정 자체가 범죄의 엄중함을 따지기보다 총수에게 빠져나갈 길을 열어주는 요식행위로 변질되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이는 사법부가 재벌총수 앞에서 어떻게 엄정한 재판관이 아닌 조언자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라는 평가를 받았다.

8. 국민연금: 국민의 노후자금을 총수의 경영권승계 제물로 바치다

2015년의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은 총수의 이익을 위해 삼성물산 주주들에게 막대한 손해를 끼치는 불공정 합병이었다. 주식시장에서 1대 1로 비등한 양사 주가를 제쳐놓고 삼성물산 3주를 제일모직 1주로 쳐주자는 불공정합병 안이었다. 당연하게도 ISS, 글래스 루이스 등 세계적인 의결권 자문사들 모두가 반대를 권고했다. 캘리포니아공무원연금과 노르웨이국부펀드 등 가장 영향력 있는 기관투자가들도 공개적으로 반대의견을 표명했다. 삼성물산의 소액주주들도 들끓었다.

이에 따라 합병성사의 캐스팅보트를 국민의 노후자금을 책임진 삼성물산 최대주주 국민연금이 쥐게 됐다. 그러나 국민연금은 독립적이고 전문적인 판단을 포기했다. 청와대의 압력 아래 국민연금은 결국 양사의 주주총회에서 찬성표를 던져서 총수의 삼성전자 지배력 강화를 위한 불공정합병안의 손을 들어줬다. 삼성물산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합병조건이었기 때문에 최대주주인 국민연금이 찬성하지 않았다면 합병안은 삼성물산 주총을 통과할 수 없었다. 국민연금의 찬성투표는 국민이 맡긴 신성한 자산을 관리하는 수탁자로서의 의무를 정면으로 배신하고 오직 재벌총수 1인의 경영권 승계를 위해 수천억 원의 손실을 감수한 명백한 배임행위였다. 국가의 공적 연기금이 재벌의 의결권 대리인으로 전락한 이 사건은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의 단면이자 정경유착의 민낯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9. 회계법인과 자문사: 전문가의 양심을 팔아 부당합병의 들러리를 서다

불공정한 합병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전문가 집단의 과학적 근거라는 포장이 필요했다. 국내 유수의 회계법인과 증권사, 투자자문사들은 이 부름에 기꺼이 응했다. 그들은 일제히 양사의 기업 가치를 적정하게 평가한 결과 합병비율에 별 문제가 없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쏟아냈다. 이는 전문가로서의 독립성과 직업윤리를 저버리고 재벌의 요구사항을 그대로 대필해 준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해외기관들이 합병비율의 불공정성을 조목조목 지적하는 동안 국내 전문가집단은 진실을 외면하고 재벌의 나팔수 역할을 자처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들의 집단적 침묵과 동조가 없었다면 희대의 불공정 합병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었을 것이다.

10. 삼성물산 사외이사: 주주가 아닌 총수의 충실한 하수인이 되다

사외이사 제도의 목적은 지배주주를 견제하고 소액주주의 이익을 보호하는 데 있다. 그러나 삼성물산 사외이사들은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부정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봉사해야 할 삼성물산 주주들에게 막대한 손해를 끼치는 자해적 합병안에 전원 찬성표를 던졌을 뿐만 아니라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합병의 정당성을 공개적으로 옹호하고 나섰다. 이런 모습에 외국의 기관투자가들이 기절초풍한 게 무리가 아니다.

이는 그들이 주주 전체의 이익이 아닌 자신들을 그 자리에 앉혀준 총수의 이익에만 충성하는 역할을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독립된 감시자가 되어야 할 이들이 충실한 가신이 되어 회사를 헐값에 팔아넘기는 데 앞장선 이 모습은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재벌체제가 회사법의 무덤으로 기능하는지, 재벌총수가 선임하는 사외이사의 화장 안 한 민낯이 어떤지를 가장 극적으로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11. 검찰 수사심의위원회: 검찰개혁의 칼이 재벌방패로 둔갑하다

검찰의 기소권 남용을 막기 위해 도입된 대검의 수사심의위원회는 그 취지와 정반대로 재벌 총수의 방패로 악용되었다. 이재용 부회장 측의 요청으로 소집된 수사심의위는 검찰의 방대한 수사 기록과 증거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표차(불기소 10 : 기소 3)로 불기소를 권고했다. 본래 위원장이었던 양창수 전 대법관은 이미 언론 칼럼을 통해 수사의 부당성을 피력하며 삼성입장을 옹호한 전력이 문제돼 스스로 회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삼성이 수사심의위원회 소집을 요구한 의도가 양창수 위원장을 믿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수사심의위는 시작부터 그 공정성이 의심받았다.

과연 법률가, 교수 등 사회 각계의 전문가로 구성된 13인 위원회가 내린 결론은 국민의 법 감정과 상식을 완전히 외면한 것이었다. 이는 검찰개혁이라는 대의를 위해 만들어진 제도가 어떻게 기득권의 이익을 위해 오염되고 악용될 수 있는지와 삼성의 법조장악력을 다시 한 번 보여준 매우 씁쓸한 사례다.

12. 사법부(5): ‘빼박’ 증거를 배척하고 지배권 강화목적 만으로 볼 수 없다며 전부 무죄로 판을 정리하다

삼성물산-제일모직 불공정합병과 회계부정, 증거인멸 사건의 1심, 2심, 3심 판결은 핵심법리와 논리전개가 동일하다. 검찰이 공장 바닥을 파내 찾아낸, 범죄의 전모가 담긴 서버들과 노트북들이라는 ‘빼박’ 증거들은 ‘증거인멸 수사목적의 압수수색영장 범위를 벗어났다’는 절차적 형식논리 앞에 힘없이 증거목록에서 삭제되었다. 절차적 정의는 중요하지만 진실의 실체를 파헤치려는 의지가 있는 사법부였다면 어떻게든 그 증거들이 가리키는 진실에 다가서려 노력했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증거를 스스로 외면한 것은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다는 고백과 다름없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모두 사법부가 어떻게 정의의 저울이 아닌 재벌의 방패가 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현대판 법치주의의 비극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판결의 논리다. 당시 양사의 주가가 1대1에 가까웠음에도 오직 총수의 이익을 위해 0.35대1이라는 기형적인 비율로 합병이 강행된 것은 온 국민이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재판부는 ‘경영권 승계가 유일한 목적이었다고 단정할 수 없으며 사업적 목적을 위한 합리적 경영판단의 측면도 있다’는 삼성의 항변을 그대로 수용했다. 이는 과거 에버랜드 사건에서 ‘회사에는 손해가 없다’며 총수에게 면죄부를 주었던 2009년 대법원 판결의 망령이 다시 살아 돌아온 것과 다르지 않다. 이 판결은 앞으로 대한민국에서 벌어질 그 어떤 부당합병이라도 ‘사업목적을 위한 합리적 경영판단’이라는 마법의 단어로 합법으로 둔갑시킬 수 있는 위험천만한 선례를 남겼다. 수많은 증거와 증언을 통해 드러난 삼성미래전략실의 치밀한 지배권강화 계획과 그에 따른 불법편법행위들이 합리적 경영판단이라는 모호한 수사 뒤로 사라진 셈이다. 법원은 다시 한 번 정의의 수호자가 아닌 재벌의 대변인 노릇을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13. 국회: '삼성생명법' 25년 침묵으로 지배구조의 핵심을 비호하다

삼성그룹 지배구조의 핵심은 삼성생명이 보유한 막대한 삼성전자 지분이다. 보험업법은 보험사가 계열사 주식을 총자산의 3% 이상 보유하지 못하도록 규정하지만, 그 가치를 '취득 원가'로 계산하는 예외조항 덕분에 삼성은 수십 년간 이 규제를 피해왔다. 이 예외조항을 고쳐 주식가치를 시가로 평가하게 하는 이른바 삼성생명법 개정안은 지난 25년간 수많은 국회에서 발의되었지만 단 한 번도 상임위 문턱을 넘지 못했다.

20대 국회와 21대 국회 내내 박용진 의원 등이 끈질기게 문제를 제기했지만 거대양당은 번갈아 가며 이 법안을 묵살했다. 이는 재벌의 지배구조를 바꿀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직접적인 칼날을 국민의 대표인 국회가 스스로 무디게 만들고 방치해왔음을 의미한다. 그뿐 아니다. 국회는 삼성사안은 물론이고 재벌의 편법상속에 대한 국정조사권을 한 번도 발동하지 않았다. 입법부의 이 길고 긴 침묵이야말로 삼성이 대한민국 사회 전체에 얼마나 깊고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이자 가장 부끄러운 역사라는 비판이 나온다.

14. 관료사회: 선택적 정의와 적극적 협력으로 총수의 길을 닦다

재벌총수의 연금술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국가행정시스템의 암묵적 동의와 적극적 협조가 필수적이다. 국세청, 공정위, 금감원 등 규제당국은 참여연대의 압력과 증거제출에 못 이겨 삼성SDS의 신주인수권부사채(BW) 헐값발행 건에 대해서는 마지못해 과징금과 증여세를 부과했지만 실질이 똑같고 승계의 핵심이었던 에버랜드 전환사채(CB) 건에 대해서는 끝까지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는 법집행의 형평성이라는 기본원칙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어디까지 봐줄 것인지를 재벌과 흥정하는 듯한 선택적 정의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관료의 역할은 단순한 직무유기를 넘어 때로는 적극적인 협력으로 나타났다. 에버랜드의 토지 공시지가를 삼성이 원하는 대로 고무줄처럼 늘렸다 줄였다 해준 관할관청의 사례는 노조설립신고서를 눈앞에서 탈취해간 삼성의 부당노동행위를 묵인해준 과거사와 함께 지방행정조직이 어떻게 재벌의 사적 이익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라는 비판을 받는다. 중앙의 규제당국부터 지방의 행정기관까지 대한민국의 관료시스템은 총수의 지배권이 공고해지는 길목에서 눈을 감고 귀를 닫으며 탄탄대로를 내주는 시공사 역할을 할 때가 적지 않았다.

15. 학계: 진실을 향한 열정보다 현실의 안위를 택한 지성의 침묵

재벌체제의 가장 큰 비극은 그 문제를 파헤치고 비판하며 대안을 제시해야 할 학계마저 긴 침묵의 동굴 속에 스스로를 가뒀다는 점이다. 총수 1인이 지배하는 대규모기업집단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대리인 비용의 문제는 지난 25년간 한국자본주의의 가장 중요하고 독특한 연구주제였다. 그러나 법학, 경영학, 경제학, 정치학 등 어느 분야에서도 삼성재벌 특정사안은 말할 것도 없고 더 일반적인 한국재벌체제에 고유한 대리인 비용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본격적인 비교법적, 비교제도적, 학제적 연구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거의 모든 학자들은 외면과 침묵을 택했다. 총수의 지배권 강화나 세습목적 신주 헐값발행을 막을 방법은 무엇인지, 다른 나라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회사법의 기본원칙들이 왜 재벌 앞에서는 무너지는지를 연구하는 것은 학자들의 당연한 책무였다. 하지만 학자들도 진실을 탐구하고 비판하기보다 침묵했을 때 보장되는 현실의 안위를 택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 없다’, ‘말해봐야 찍히기만 한다’는 자기검열이 상아탑을 지배했다는 지적이다. 학계와 지성의 집단적 침묵이야말로 재벌이라는 기형적 시스템이 아무런 도전 없이 괴물로 성장하도록 방치한 가장 큰 책임 중 하나이며 우리시대를 가장 서글프게 만드는 자화상이다.

마치며

삼성 경영권 무세세습을 위한 그룹차원의 조직적 배임범죄는 결과적으로 25년 만에 무죄판결을 손에 쥐었다. 내가 다른 글에서 강조했듯이 죄가 없어서가 전혀 아니다. 오히려 누가 봐도 조직적 배임범죄혐의가 넘치게 분명한 데 삼성총수에게 차마 집행유예 없는 중형을 선고할 수 없다는 주류사회의 막연한 정서에 힘입어 불공정합병 1심, 2심, 3심이 모두 절차법적 이유를 앞세워 과감하게 전부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이로써 세계 어느 나라에서 발생했더라도 엄중한 처벌이 불가피한 중대사건이 법과 상식을 배반하고 무죄판결로 귀결됐다.

최고 경제권력에 대한 법의 지배를 열망하며 오랫동안 싸워온 시민이자 학자의 입장에서 몹시 서글프고 분통터지는 일이다. 삼성경영권 무세상속을 둘러싼 사법부의 일련의 판결은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한국사법부에 큰 불명예와 치욕을 안겨준 가장 불의한 판결로 기억될 것이다. 위에서 망라해본 15개의 부끄러운 초상화는 하나의 진실을 가리킨다. 재벌총수의 불법적인 사익추구는 경제발전 신화와 삼성이 망하면 나라가 결딴난다는 집단공포를 자양분 삼아 국가시스템의 모든 감시망을 무력화시켰다는 것이다. 검찰의 칼날은 무뎌졌고, 법관의 저울은 기울었으며, 언론의 목소리는 사라졌고, 학자의 펜은 멈췄다. 각자의 자리에서 양심과 원칙을 지키는 대신 있는 힘을 다해 기득권의 질서에 순응하는 길을 택한 이들의 비겁한 선택이 모여 오늘의 비극을 만들었다.

이 기록은 단순히 과거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 아니다. 나는 미래세대를 위한 실패의 교과서를 쓰고 싶었다. 이 작은 기록을 통해 우리사회가 무엇이, 어떻게, 왜 잘못되었는지를 처절하게 복기해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리하여 다시는 특정 기업의 사적 이익이 국가의 공적 시스템을 압도하는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아야 한다. 법과 원칙, 상식이 금권 앞에 두 손을 든 부끄러운 역사를 직시하고 기록하는 고통스러운 작업을 멈추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경제민주주의를 향한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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