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인의 배신' 삼성 무죄판결이 던진 근본적 질문

지난 7월 17일 대법원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경영권 불법승계 사건에 최종적인 면죄부를 선물했다. 이는 단순히 한 기업총수의 재판이 끝났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대한민국 자본시장이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그리고 상법과 회사제도라는 공적 시스템이 어떻게 특정개인의 사적 이익을 위해 마법처럼 동원될 수 있는지를 우리사회에 다시 한 번 묻는 상징적 사건이다. 이 판결을 계기로 우리는 재벌총수 일가에게만 허락된 특권의 본질과 이를 제어하지 못하는 우리민주주의의 실패를 직시해야만 한다.

이 사건이 유독 중요한 이유는 지난 25년간 한국사회의 가장 예민한 환부들을 모두 담고 있기 때문이다. 정경유착의 고리, 사법부의 독립성 문제, 엘리트 카르텔의 작동 방식, 그리고 대의민주주의 시스템의 근본적인 대리인 문제까지 삼성의 경영권승계 과정은 이 모든 모순이 응축된 하나의 거대한 프리즘과 같다. 따라서 이 판결의 의미를 제대로 분석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비판하는 것을 넘어 우리가 앞으로 어떤 경제 질서와 민주주의를 만들어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미래의 청사진을 그리는 작업과 직결된다.

‘제왕적 총수’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재벌의 구조적 특수성

대의민주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딜레마는 주권자의 대리인(agent)인 국회의원이 주인의 이익이 아닌 자신의 이익을 위해 법을 만드는 ‘셀프입법특권’에 있다. 대한민국 경제에는 이와 완벽하게 닮은꼴인, 그러나 더욱 교묘하고 파괴적인, 대리비용 문제가 존재한다. 바로 재벌총수 일가가 회사와 주주라는 주인을 배신하고 사익을 추구하는 ‘자기거래(self-dealing)특권’이 그것이다.

이 특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재벌체제에 고유한 구조적 특수성을 알아야 한다. 미국 대기업의 자회사가 대부분 100% 지분을 소유한 ‘완전자회사’인 것과 달리, 한국 재벌의 계열사들은 총수일가의 직접 지분은 매우 낮은 대신 다른 계열사들이 서로를 소유하는 복잡한 구조의 ‘부분 자회사’에 가깝다. 바로 이 구조가 총수일가에게 회사라는 공적 제도를 사유화할 수 있는 강력한 유인을 제공한다.

 

 여야가 합의한 상법개정안이 3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고 있다. 2025.7.3 연합뉴스
 여야가 합의한 상법개정안이 3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고 있다. 2025.7.3 연합뉴스

총수의, 총수에 의한, 총수를 위한 마법의 연금술

재벌지배구조 속에서 총수일가는 다양한 회사제도를 오남용하며 자신들의 부와 지배력을 강화한다. 그 첫 번째 마법은 비상장 계열사라는 비밀의 방이다. 과거 삼성 에버랜드가 그랬듯이 총수일가는 외부감시가 느슨한 비상장계열사를 실질적인 지주회사로 활용한다. 이곳에서 전환사채 헐값발행과 같은 편법적인 거래가 이루어지고 그룹의 유망한 사업기회를 총수의 개인회사에 몰아주는 회사기회 편취행위를 통해 상장사의 부가 비상장 개인회사로 이전되는 마술이 벌어진다.

두 번째 마법은 물적 분할이라는 알토란 빼돌리기다. LG화학이 전도유망한 2차 배터리 사업을 분가시켜 만든 LG에너지솔루션의 사례는 이 마법의 효과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기존 주주들이 소유한 회사의 가장 핵심적인 사업부문을 따로 떼어내 100% 자회사로 만든 뒤 상장시킨다. 이 과정에서 신설 알토란 자회사의 지분은 모회사가 독점하고 기존 모회사의 주주들은 신설회사의 주식을 단 한 주도 받지 못한다. 결국 총수일가는 모회사를 통해 신설 알짜회사에 대한 지배력을 그대로 유지하거나 오히려 강화하면서 막대한 상장이익을 독점하고 기존 주주들은 자신이 투자한 회사가 빈껍데기로 전락하며 주가가 폭락하는 것을 눈 뜨고 당해야만 한다.

세 번째 마법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서 보듯 불공정 합병을 통한 지배권 강화다. 상장사 간의 합병임에도 시장가격을 제쳐두고 총수의 이해관계에 따라 조작된 협의가격으로 합병비율을 결정한다. 네 번째 마법은 이른바 자사주의 마술이다. 주주의 돈으로 매입한 자사주를 소각하지 않고 보유하다가 총수일가의 지배권을 방어하기 위해 ‘백기사’(white knight)에게 넘기거나 합병 시 총수에게 유리한 의결권으로 활용하며 주주의 재산을 총수의 지배권 강화수단으로 둔갑시킨다.

법은 왜 재벌 앞에서 멈추는가

이러한 총수일가의 자기거래(self-dealing)행태를 규제하기 위해 우리 세법은 갖가지 상세한 증여의제 규정을 두고 있다. 그러나 재벌그룹 내 비서실과 거대로펌, 대형회계법인들은 끊임없이 법망을 우회하는 새로운 금융기법을 개발해낸다. 법이 특정행위를 금지하면 또 다른 편법을 찾아내서 치고나가기 때문에 뒷북치기 규제가 반복됐다. 노무현 정부 시절, 이러한 행위를 포괄적으로 규제하는 조항을 도입하기도 했지만, 법집행기관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현실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과거 IMF 외환위기 이후 주주자본주의 관점에서 추진된 사외이사 도입, 주주대표소송 요건 완화, 공시의무 강화 등의 개혁조치들도 기대효과를 내지 못했다. 이는 게임의 규칙을 만드는 심판(이사회)을 선수(총수)가 직접 임명하는 구조적 모순을 건드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미국 회사법을 참고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재벌체제는 지극히 한국적인 현상이라 이 문제를 해결할 책임과 힘은 오롯이 대한민국의 정치인과 학계에 있기 때문이다.

기회와 모순의 기로에 선 22대 국회

22대 국회는 현재 역사적 과제 앞에 서 있다. 최근 민주당 주도로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에 ‘주주’를 명시한 상법 개정안이 통과되고 자사주의 마술을 막기 위한 추가개정안도 추진되는 등 긍정적인 움직임이 일고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이 모든 개혁의 취지를 무력화할 수 있는 상법상 특별배임죄 폐지 법안이 민주당 의원입법으로 발의되었다는 사실은 심각한 모순이다.

재벌체제라는 특수한 시스템이 유지되고 그 안에서 총수의 배임적 ‘셀프거래’와 ‘쌍방대리’가 계속되는 이상, 민사적 책임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를 포괄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상법상 특별배임죄라는 형사적 최후보루는 반드시 유지되어야 한다. 이를 폐지하자는 주장은 재벌총수들에게 마음 놓고 사익을 추구할 허가장과 면죄부를 주자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해법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에 있다

진정한 해법은 ‘회장님’ 자본주의도, ‘소액주주’ 자본주의도 아닌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로 대전환에 있다. 기업의 성과를 함께 만들어가는 노동자와 협력업체가 우리사주제와 노동이사제, 이익균점권 등을 통해 기업경영과 현장혁신의 파트너로 나설 수 있어야 한다. 그 핵심은 이름만 바꾼 ‘독립이사’가 아닌 노동자와 사회전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회이사’의 도입이다.

이러한 제안이 단지 이상적인 구호에 그치지 않는 이유는 이것이야말로 재벌의 ‘자기거래/쌍방대리 특권’이라는 근본적인 병폐를 치유할 가장 현실적인 처방이기 때문이다. 총수의 전횡을 견제할 유일한 힘은 그와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또 다른 강력한 주체의 등장에서 나온다. 노동조합과 협력업체의 목소리가 이사회에 직접 반영될 때 비로소 총수는 회사를 자신의 개인금고처럼 여기는 행태를 멈추고 모든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고려하는 진정한 의미의 경영판단을 하게 될 것이다.

‘코스피 5000’ 시대를 위한 제언

이재명 정부와 민주당이 압도적 과반수를 차지한 22대 국회는 역사적인 기회와 책무 앞에 서 있다. 코스피 지수가 다시 사상 최고점을 향해 달려가는 이 중요한 시점에 자본시장의 근본적인 신뢰를 갉아먹고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불러오는 재벌총수의 ‘자기거래/쌍방대리 특권’을 해체하는 과감한 입법에 나서야 한다. 만약 지금, 이 기회를 놓치고 또다시 재벌개혁에 실패한다면 우리 모두가 염원하는 경제정의가 꽃피는 세상과 ‘코스피 5000’ 시대는 그만큼 멀어질 수밖에 없다. ‘국민이 주인인 나라’는 기업민주주의라는 튼튼한 경제적 토대 위에서만 비로소 구호가 아닌 현실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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