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메아리 적었던 '변혁적 중도' 외침

윤의 몰락과 새 정부 출범으로 가능성 발견

유고집에나 실으려나 했던 발언들을 책으로

'변혁적 중도의 때가 왔다' 표지. 
'변혁적 중도의 때가 왔다' 표지. 

〈변혁적 중도의 때가 왔다, 나라다운 나라를 어떻게 만들까〉(백낙청 지음, 창비 펴냄) 출간 기자간담회가 지난 29일 열렸다. 지은이의 모두발언에 이어 기자들과 지은이의 일문일답이 이뤄졌다.

모두 발언은 책을 왜 쓰게 됐는지, 책의 얼개는 어떠한지, 지은이의 오랜 화두이자 이번 책의 거멀못에 해당하는 ‘변혁적 중도’가 나오게 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배경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었다. 군더더기 없이 명쾌했다. 하지만 이어진 문답은 중구난방이었고, 책의 본령에 접근하기보다 논점을 흐리는 쪽으로 전개됐다. 여든일곱 고령의 지은이와 세대를 달리하는 젊은 기자들의 접점은 어긋났다.

이러한 어긋남은 어쩔 수 없었다는 생각이다. 책의 방점은 ‘변혁적 중도’가 아니라 ‘때가 왔다’에 있는데, 질문의 초점은 ‘변혁적 중도’였기 때문이다. 지은이의 ‘변혁적 중도’ 구상은 2009년 첫 글을 시작으로 수구-진보를 오가는 정권교체를 거치면서 다듬어 완성한 것으로 짧은 간담회에서 충분히 설명하기 어려웠을뿐더러 ‘다 안다 치고’ 마이크를 잡은 지은이에겐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을 법하다. 그 구상은 국민주권정부의 출범에 따라 ‘2025년 체제’와 연결되는 바 이것 역시 간담회를 뛰어넘는 주제였고 1시간여의 간담회는 엉겁결에 끝났다. 간담회 말석을 채웠던 필자가 뒤늦게 책을 살펴봤다.

책이 방점을 찍은 ‘때가 왔다’로 이야기를 푸는 것은 불가피하다. 지은이는 ‘변혁적 중도’의 관점에서 이재명 정부가 해야 할 일을 먹고살게 해줘야 한다(①), 내란청산(②). 그리고 그 저변에 깔린 분단체제의 극복(③)을 꼽는다. ①은 이 대통령이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먹사니즘’, ‘잘사니즘’과 통한다. 지난 31일 발표한 ‘2025년 세제개편안’에서 윤석열 정부가 감행한 부자감세를 원래대로 되돌리는 쪽으로 방향을 설정한데서 보듯이 첫 단추는 잘 꿰었다고 본다.(필자 생각) 지은이는 다른 건 몰라도 이 대통령이 살림은 잘 하겠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②내란청산은 내란특검을 충실하게 운용하면 무리 없을 거라고 본다. 다행하게도 윤석열과 그 일당이 뻘짓을 하면서 청산해야 할 대상을 적나라하게 노출했기 때문이다. 다만, 내란본체 수구세력은 매우 ‘유능’해서 기득권을 위해서라면 허수어미든, 모지리든 가리지 않고 내세웠던 바 깊이 뻗은 뿌리에 이르지 못할까 걱정이다. ③ 역시 낙관적이다. 딱히 이재명 정부의 통일론을 거론하지 않지만 분위기가 조성됐다는 판단이다. 북한이 통일 얘기 그만하자, 국가 대 국가로 가자고 하는 게 ‘적대적 두 국가’가 문제이기는 하나 남북연합 또는 국가연합 즉, 우리 쪽이 주장해온 것에 근접한다는 것이다. 물론 흡수통일을 주창하는 극우가 있기는 하지만 백령도 사격훈련, 풍선 날리기, 평양 드론침투 등 윤석열 정부의 도발에도 북한이 자제하는 모습에서 일단의 희망을 본다. (이재명 정부를 향한 김여정 담화에서 적대적 표현을 걷어낸 것도 마찬가지다.) 시급한 것은 9.19군사합의의 복원.

지은이가 강조해 마지않는 ‘2025년 체제’란 무엇인가. 이에 앞서 대체되어야 할 ‘1987년 체제’를 짚어봐야 한다. 1987년 체제는 6월항쟁의 결과로 쟁취한 대통령 직선제를 근간으로 하는 ‘체제’를 말한다. 군사정권과 개발독재의 ‘1963년 체제’를 대체했으나 분단을 공고화한 ‘1953년 체제’를 무너뜨리지 못했다. 이명박, 박근혜, 윤석열 등 수구세력이 집권할 때마다 기득권 유지 수단으로 악용돼 왔다. 지은이는 분단이 오래 지속되면서 우리사회, 국민의식 전반에 체제로 고착돼 각종 문제의 근원으로 작용해 왔다는 진단이다. ‘윤석열의 난’ 역시 그 잔재가 엽기적으로 노정된 결과라고 본다. 헌법수호의 보루로 작용했던 헌법재판소가 한계를 드러낸 것도 부수효과. 줄이자면 2025년 체제란 고질적인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한반도에 평화체제를 구축함을 일컫는다. 문제는 평양 당국 역시 분단체제의 한 플레이어이며 분단체제의 기득권 세력이라는 것. 거기에다 미일-중러 대립이라는 주변국 상황까지 얽혀 이재명 정부의 힘만으로 풀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7월 29일 열린 〈변혁적 중도의 때가 왔다, 나라다운 나라를 어떻게 만들까〉 기자 간담회에서 지은이 백낙청 선생이 발언을 하고 있다. 창비 제공
7월 29일 열린 〈변혁적 중도의 때가 왔다, 나라다운 나라를 어떻게 만들까〉 기자 간담회에서 지은이 백낙청 선생이 발언을 하고 있다. 창비 제공

지은이는 시민사회의 힘에 주목한다. 고비마다 시민항쟁이 물꼬를 틀어온 바, 광주항쟁, 6월항쟁, 2016~17년 촛불대항쟁을 거치며 눈부신 성장을 거듭해 왔다. 특히, 2024~2025년 ‘빛의 혁명’ 국면에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과 K팝이 결합하는 양상을 보였다. 지은이는 미국이 주인 노릇 하고 일본이 상머슴 노릇 하고 한국이 시다바리 노릇 하는 3자구도가 빛의 혁명으로 깨졌다고 평가한다. 제도적인 측면을 들여다보면 더욱 고무적이다. 깨인 사람들이 대거 정당에 가입하면서 민중자치의 가능성이 열리고 있으며 사회적 협동조합의 급속한 성장과 함께 상법 상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로 소액주주의 힘이 강화되어 경제민주화로 나아가고 있다.

‘변혁적 중도’는 단순히 좌우 사이의 중간 입장을 취하는 절충적 노선이 아니다. 한반도의 분단체제가 만들어온 정치·사회적 구조를 넘어서는 동시에, 신자유주의가 심화시킨 불평등과 경쟁 중심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극복하려는 장기적 체제 전환의 전략이다. 이는 진보와 보수 등 다양한 흐름과 입장 간의 전략적 연대를 바탕으로 기존 이념의 한계를 뛰어넘고 대립과 반목을 넘어서 지속 가능한 민주주의의 새로운 구조를 상상하는 정치적 기획이기도 하다. 특히 단기적인 정치적 유불리를 따지기보다는 분단의 극복과 민주주의의 질적 도약, 사회경제적 대안을 아우르는 장기적 비전과 실천을 동시에 담고 있다. (〈변혁적 중도의 때가 왔다〉 보도자료)

요체는 헌법 개정. 지은이는 5.18정신을 전문에 포함하고, 대통령 권한을 축소하는 등 스스로 구체적인 것을 제시하기보다 시민의 몫으로 돌린다. 기후위기와 젠더갈등 해소도 시민의 역할에 기대는 바 크다. 이를 위해서 개헌을 쉽게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본다. 독재정권의 전횡을 막기 위해 개헌을 어렵게 해 놓았으나 이제는 그게 아니라는 판단이다. 노파심일 테지만, 지은이는 기득권, 즉 국회의원들이 반발이 예상된다며 심지어 민주당 안에서도 이견이 있을지 모른다고 귀띔한다.

다시 간담회 이야기. “이 책은 특이한 책입니다. 대개는 다른 데 실린 것을 다시 싣는 일이 없는데, 이번에는 기존에 공간된 것과 발표했지만 출간되지 않은 것에 몇 개 새로 쓴 원고를 합쳐서 냈습니다. 그렇게라도 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유고집에서 쓸 것들인데, 시민, 선배, 동지들께서 새 시대를 열어줬기에 책을 내게 돼 다행스럽고 무한 감사합니다.” 애초 겸사로 이해했던 지은이의 모두발언이 솔직한 고백으로 다가온다. 때가 왔다며 <2013년체제 만들기>를 펴냈다가 박근혜 정부의 탄생으로 김칫국을 마신 적이 있기에 그렇다.

지은이 말마따나 이만큼 준비된 대통령을 김대중 이래 처음으로 만난데다 김대중 대통령에 비하면 좋은 여건에 놓였으니 쇠가 달궈져 내려칠 때가 됐다고 보지 않았겠는가. 다만, 여든일곱 나이에 전면에 나서는 모습이 감사한 한편 짠하다.

변혁적 중도를 상세히 알고싶다면 다음 책을 더 읽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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