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지배자 국민은 무엇으로 주권자가 되는가
김현철 『민주주의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한국 민주주의의 빈곤과 부실에 대한 진단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으로 시작하는 책 『민주주의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서 저자 김현철 변호사는 '민주주의'라는 용어의 과잉과 모호함에 대해서부터 얘기한다. 그가 인용한 프랑스 철학자 장 뤽 낭시의 “민주주의는 정치, 윤리, 법, 권리, 문명, 모든 것을 뜻하지만 또 아무것도 뜻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의 빈약함과 무의미를 지적한다. 그리고 그것은 저자가 책을 통해 일관되게 얘기하듯 한국 민주주의의 빈곤과 부실에 대한 지적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화영 대북 송금 의혹 사건의 변호인으로서 그 사건의 실체를 『나는 고발한다』라는 책으로 써 냈는데, 이 책 『민주주의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는 한국의 민주주의 현실에 대한 고발장으로도 볼 수 있을 듯하다. 민주주의가 민주주의를 파괴하기도 하는 일이 벌어지는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고발과 함께 더 많은 민주주의, 더 큰 민주주의, ‘민주주의의 민주화’에 대한 제안문이기도 하다.
저자는 종전까지의 정치학 교과서들이 거의 제기하지 않았던 주제들을 제시하고자 했다고 이책의 저술 동기를 밝힌다. 대의제와 민주주의의 관계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 '인민을 위하여(for the people)'가 진짜 민주주의를 의미하는가, 광장은 과연 직접민주주의의 요람인가, 대중은 왜 영웅을 숭배하고 그에 복종하는가, 스위스의 시민들은 왜 시위를 하지 않는가, 공화정의 통치구조는 과연 대등한가, 어떤 공화정이 독재로 타락하는가, 통치구조는 어떤 규칙 아래에서 진화하는가 등의 질문들이다.
이들 질문은 대한민국의 현실과 경험에서 제기되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로 이어진다. 어떻게 하면 무능한 지도자, 부패한 통치 엘리트를 쉽고 빠르게 교체할 수 있는가? 통치자의 반복되는 무능과 부패를 최대한 방지하려면 어떻게 제도를 설계해야 하는가? 피지배자가 통치 엘리트를 견인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저자의 눈에 촛불혁명으로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하고, 빛의 혁명으로 윤석열 대통령을 탄핵한 '위대한 대한민국 민주시민'들이지만 우리에겐 아직도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 광장과 대의제라는 상반되는 것의 공존, ‘민주’ 없는 ‘공화국’ 등의 진단을 내리면서 저자는 '윤석열 사태'는 이번으로 끝이 아니며, 10년 뒤에 또 재현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같은 사태의 반복은 150년 전 누군가의 말처럼 희극이 아니라 처절한 비극이 될 것이라고 걱정한다.
지식인의 '우환(憂患) 의식'이랄 수 있는 저자의 '선지적' 경고는 그래서 10년 뒤에 재현될 수도 있는 또 다른 '윤석열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민주주의 실천 방법론 제시로 이어진다.
양당체제의 특징과 문제점, 나쁜 선거제도와 좋은 선거제도로서 단순다수대표제와 비례대표제, 대통령제·이원정부제·의원내각제의 이해와 비교 분석 등을 통해 대의제의 민주적 개혁 방안을 제기한다. 특히 대통령제의 폐해에 대해, 그래서 의원내각제를 대안적 정치체제로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이유들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한다. 저자의 주장의 핵심은 무엇보다 주권자의 자기통치를 어떻게 더욱 충실히 제도화하고 확장하느냐다.
이 책의 부제 ‘피지배자의 정치학’으로 저자는 무엇을 얘기하고자 했을까. 이 부제로부터 주제목 '민주주의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해석해보자면, 피지배자들은 어떻게 '시민'이 되고 민주주의를 이뤄내는가, '인민을 위한 민주주의'가 아니라 '인민에 의한 민주주의'는 어떻게 이룰 것인가를 저자는 얘기하려는 것이다. '인민'을, 능동적 시민을, 결국은 민주주의의 주체이자 주인으로서의 인민, 자기결정자로서의 주권자 시민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 아니 어떻게 시민이 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얘기하려는 것이다. “모든 민주주의에서 국민은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알렉시스 토크빌)는 말처럼 국민의 수준이 성숙하고 높아질 때 그에 맞는 정부와 민주주의가 나온다는 것을 설파하려 하는 것이다.
인민의 수동성에 기초해 이뤄진 민주주의는 모래 위에 지어진 집이다. 저자는 '광장'에서의 시민 의지 분출을 예찬하면서도 자칫 영웅을 숭배하는 광장이 돼서는 안 된다고 냉철하게 얘기한다.
한국의 민주주의 현실, 주권자의 현실에 대해 다소 극단적으로 얘기하자면 국민이 주인이 되는 거의 유일한 기회는 선거이지만 그 선거에서조차 주인으로서의 민(民)들은 구경꾼으로 물러나 있다. 그 자신이 임명하는 하인들에 의해 대상화되는 기이한 전도 현상이 선거판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 사육제에서 국민들의 열광과 무지는 서로 협력해 거기에 참여할수록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역설을 빚고 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실질적인 결정은 사실 다수 국민이 아니라 소수의 사람들이며 대중들은 그럼에도 자신들이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있는 것으로 착각할 뿐인 무력한 존재들”이라고 지적했던 월터 리프먼의 『여론』에서의 경고처럼, 저자는 한국 민주주의가 아직 '민주 없는 공화국'에 머물러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같은 가혹한 비판과 진단으로써 결코 민주주의에 대해 낙담케 하려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향한 길에 깊은 생각을 품고 함께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저자는 당부하는데, 이 책은 저자의 '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생각'의 노정의 한 결실이다. 이 책은 그의 민주주의 탐구 연작의 3부에 해당되는, <지배당한 민주주의>(2018)와 <민주주의에 관한 공화주의적 왜곡>(2021)에 이은 것이다.
"제왕의 자리에 ‘국민’을 앉힌 민주헌정 설계도"라고 이 책을 요약한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은 “변호사가 본업인 저자가 이 같은 뛰어난 저서를 통해 학계의 분발을 촉구하고 나선 것”이라고 평했다.
대학 시절 치열한 운동을 옥고를 치르기도 한 저자의 이력은 한국 민주주의의 좌절과 성공, 그 성공이 또한 실패로 이어지는 과정과 겹쳐 있다. 저자는 변호사라는 직업 이전에 무엇보다 민주주의자, 민주주의 학습자라고 할 만하다. 이는 이 책에서 인용된 수십 권의 책들의 목록에서뿐만 아니라 저자의 일상에서의 진지한 민주주의 탐구, 한국 사회 탐색에서 보이는 면모다.
우리가 저자의 주장에서 확인해야 할 것은 민주주의는 그것이 ‘발전된 정체(正體)’인 만큼 ‘발전된 주체’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같은 성숙된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국민이 들뜬 구경꾼이나 잠시 동안의 주인에 머물지 않으려면 자기 학습이, 권리와 함께 진지한 의무감이 필요하다. 민주주의에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단칼에 쳐 내는 마법이 필요치 않다. 혹여 마법과 기적이 있다면 그건 지리한 논쟁과 학습으로만 얻어질 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민주주의에 대한 학습서로서, 다만 대답 이전에 하나의 질문으로서 읽기를 권한다. 이 책을 통해 대의제에서 뽑는 이들의 자격을 묻기 이전에 인민됨의 자격을 스스로 묻기를 권한다. 나라와 민주주의의 주인될 자격을 스스로 물어보기를 권한다. 우리 자신에 대해, 자신 안의 우중(愚衆)과 시민의 두 모습 중에 무엇이 될 것인지를 스스로 묻는, 그런 질문을 찾는 책으로 삼아 보기를 바란다. 이 책이 던지는 질문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면, 아마 보이지 않는 민주주의의 문지기에게 주민증이 아닌 '시민증'을 보여줄 수 있게 될 듯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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