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박물관서 개인전 연 고승욱 작가
공식 역사에서 지워진 이들 되살리기
서울 구로구 평화박물관 스페이스99에서 고승욱 작가의 개인전 '어떤 이야기'가 8월 1일부터 9월 6일까지 열린다. 이번 전시는 제주 4.3사건을 비롯해 한국 전쟁과 동두천 미군 기지촌 등 한국 현대사 속 국가폭력의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추모해온 작가의 작업 세계를 조망한다.
국가폭력 속 소외된 이들을 향한 예술적 시선
1968년 제주 출생인 고승욱 작가는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1997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우리 사회의 소외된 목소리에 주목해왔다. 그는 특히 국가폭력의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작업을 지속해왔으며, 2005년 이건용 작가와 함께 '타이틀 매치'전을 선보여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광주비엔날레(2008), 부산비엔날레(2006) 등 국내외 주요 전시에 참여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이번 전시가 열리는 평화박물관은 전쟁과 폭력의 고통을 기억하며 생명·인권·평화의 가치를 확산하기 위해 설립된 공간이다. 고승욱 작가는 2011년에도 이 공간에서 '말더듬 두 번째' 개인전을 개최했다. 14년 만에 다시 돌아온 이번 전시는 2008년부터 최근까지 작가의 17년간의 작업을 총체적으로 선보이는 자리다.
동두천에서 시작된 추모의 여정
고승욱 작가의 작업 방향에 중요한 전환점이 된 것은 2005년 동두천에서의 경험이었다. 지역 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동두천 상패동 공동묘지를 방문했던 작가는 묘비조차 없는 수많은 무덤들을 마주하며 깊은 충격을 받았다. 그는 당시를 "역사적 공동체에서도 개인주의 사회에서도 어떤 자격도 얻지 못한 채 잊혀진 이들을 마주했을 때의 감정이 강렬하게 남았다"고 회상했다.
이 경험을 시작으로 작가는 제주 4.3사건 현장, 노근리, 지리산 실상사, 홍천 등 한국 전쟁과 관련된 장소들을 찾아다니며 작업을 진행했다. 공식 역사에서 지워진 이들의 기억을 되살리고 추모하는 것이 그의 주요 작업 주제가 되었다.
'돌초'와 '말더듬'으로 재현되는 영혼의 울림
이번 전시에서 눈여겨볼 작품으로는 사진 연작 '돌초'와 '탁영'이 있다. 작가는 각지의 돌들을 파라핀 왁스로 본떠 초를 제작하고, 이를 바닷가나 절벽에서 태우는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작가는 이러한 '돌초'가 마치 '데스 마스크'와 '라이프 캐스트'의 중간 지점에 있는 작업이라 설명하며, 이는 망자의 혼을 불러들이고 영접할 준비를 갖추는 행위로 해석될 수 있다고 말한다.
작가는 이러한 제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소리를 '말더듬'이라 표현한다. 이는 일반적인 언어로 온전히 표현할 수 없는 망자들의 한을 전달하는 방식이라는 작가의 설명이다. 작가는 전시 도록을 통해, 근대 민족국가의 서사 형식으로는 담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제주 무속의 방식을 빌려 전달하고자 한다고 밝힌다. 마치 제주 무속의 심방이 '영게울림'을 통해 죽은 자와 산 자를 잇듯이, 고승욱 작가의 '말더듬' 역시 영혼의 아픔을 달래는 실천적 행위로 이해된다.
제주에서 후쿠시마까지, 공감과 연대의 확장
고승욱 작가의 관심은 국내를 넘어선다. 최근 10여 년간 제주 중심의 생태학, 민속학, 문화인류학 연구를 바탕으로 '돌아옴'이라는 주제 의식을 심화시켜왔다.
제주 동광리 무등이왓에서 조 농사를 지어 희생자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는 '잃어버린 마을에서 보내는 선물' 프로젝트는 일본 후쿠시마 농민들의 이야기와 연결된다. 2022년 작품 '밭과 소'에서는 동일본 대지진 이후 목장을 재건하는 후쿠시마 농부의 모습과 제주에서 생명을 일구는 공동체의 모습을 함께 다룬다. 작가는 살아남은 이들의 생명 회복 서사와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씨앗을 틔우는 작은 공동체의 협업이 만나는 지점을 보여주려 한다.
과거와 현재 잇는 시간의식, 그리고 새로운 시도
작가의 작업에서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시간의식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2018년 작품 '△의 풍경'은 1950년 노근리 사건과 2016-2017년 촛불시위를 연결하며, 과거의 사건들이 현재와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탐구한다. 노근리 학살의 트라우마와 박근혜 탄핵을 위한 촛불 시위의 정치적 열망이 만나는 지점을 포착하며, 민주주의에 대한 염원과 망자에 대한 추모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작가는 촛불 시위 현장에서 수집한 초를 재활용하여 새로운 작업에 활용하기도 하는데, 이는 이름 없이 떠도는 영혼을 위해 불을 밝히는 '가상의 발원 공동체' 또는 '소망의 연대 집단'을 제안하는 작가의 의도를 드러낸다.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되는 신작 '몰래물이야기'(2025)는 작가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전쟁과 개발로 인해 국가로부터 집단 이주를 강요받았던 제주 제성마을 노인들의 왕벚나무 지키기를 다룬 작품이다. 작가는 베어진 왕벚나무 그루터기 가지를 살리려 시도하는 과정에서, 노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다른 왕벚나무 가지도 함께 꺾꽂이하는 시도를 했다고 밝힌다. 작가는 이를 원본의 진실성을 다소 '오염'시키는 일종의 '선한 속임수'이자, '트릭스터'의 역할로 설명한다. 노근리 학살 희생자와 유가족과 함께한 영상작업 '북극성'(2023)의 촛불 그림자 퍼포먼스에서도 작가의 의도를 통해 희생자와 살아남은 자가 서로 손을 맞잡는 탁영의 형상을 만들어낸다.
30년 작업 활동의 집대성
이번 전시는 처음 선보이는 신작 유화 7점을 포함해 비디오 6점, 사진 21점, 드로잉 5점, 설치 1점, 오브제 1점 등 총 41점의 작품으로 구성된다. 30년 가까운 작가 활동 중 신작들이 포함된 만큼, 고승욱 작가의 작업 세계를 폭넓게 조망할 수 있는 기회다.
작가는 2005년 쌈지스페이스 이건용 작가와의 '타이틀매치'전 이후 광주비엔날레(2008), 부산비엔날레(2006) 등 주요 국제 전시에 참여했으며, 독일 다름슈타트 미술관, 네덜란드 몬테비디오 미디어 아트 인스티튜트 등 해외 전시 경험도 풍부하다.
광복 80주년, 애도와 저항의 메시지
2025년 광복 80주년을 맞아 열리는 이번 전시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한국 현대사의 과제들을 예술을 통해 다시금 환기시키는 계기가 된다.
작가는 냉전 이데올로기가 자본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전개되는 현재의 지정학적 상황 속에서, 제주 강정과 같은 '신냉전 시대의 산물'들을 목격하는 현실을 언급한다. 그는 역사적 트라우마의 치유 없이는 그 아픔이 공동체의 부재 속에 지연되어 다른 형태로 재현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보여준다.
작가가 제시하는 것은 매 순간 상징적으로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며 관객에게 생명의 파동을 전달하는 '줄놀이 광대'의 연희와 같은 것이다. 그는 살아내는 힘, 고통을 견디는 힘의 회복을 통해 애도가 저항이 되고, 추모가 연대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작품으로 제시한다.
■ 작품 이미지
구글 드라이브 링크(아래 링크에서 작품 사진을 다 볼 수 있습니다)
https://drive.google.com/drive/folders/11pVYGudyJk06VuhFXC6aYwRcf47_R5D2?usp=drive_link
전시 정보
전시명: 어떤 이야기 – 고승욱 개인전
기간: 2025. 8. 1.(금) ~ 9. 6.(토)
장소: 스페이스99 (서울시 구로구 부일로9길 135, 평화박물관 2층)
관람시간: 화-금 오후 2-5시 / 토 오전 10시-오후 5시
휴관일: 일·월요일, 공휴일
관람료: 무료
문의: 02-735-5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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