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폭80년 방미 증언단 기록①] 핸포드, 미국에서 가장 오염된 곳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돼버린 '그라운드 제로'

강에 기대 살던 선주민, 핵 재처리 공장 건설로 쫓겨나

핵무기에 맞서 수백 번 체포당하며 싸우는 사람들

“평화를 향한 변화는 내 삶으로부터 시작한다”

올해는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투하한 지 80년이 되는 해다. 피폭으로 인한 피해는 대를 이어 계속되고 있다. 우리나라 원폭 피해자 1세와 2세, 비핵평화시민연대 회원 등 10명이 ‘방미증언단’ 이름으로 올해 2월 17일부터 여정을 시작해 유엔 핵무기금지조약 3차 당사국 총회가 열리는 뉴욕의 유엔본부를 다녀왔다. 김찬휘 전 녹색당 대표도 방미증언단에 참여했다. 그가 기록한 방미증언단의 활동과 소회를 앞으로 5회에 걸쳐 싣는다. 김찬휘 님의 승낙을 받아 <민들레>와 <탈핵신문>이 동시에 연재한다. 이 글은 그 첫 번째 글이다.

핵발전소뿐만 아니라 핵무기 금지를 위한 활동까지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김찬휘 전 녹색당 대표
김찬휘 전 녹색당 대표

유엔 핵무기금지조약(TPNW) 3차 당사국 총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주인공은 말한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계의 파괴자가 되어버렸다”고. 이 '세계의 파괴자'와 싸우기 위해 피폭 1세 박정순 님, 피폭 2세 이태재·김규리 님을 포함해 10명으로 구성한 ‘원폭 80년 방미증언단’이 2월 17일 긴 여정에 올랐다. 최종 목적지는 UN 핵무기금지조약(TPNW) 3차 당사국 총회가 열리는 뉴욕의 UN본부. 2023년 11월 2차 당사국 총회에 이어 두 번째다.

 

지난 3월 인천공항에서 열린 선발대 출정식. 맨 뒤 빨간 점퍼를 입은 이가 김찬휘 전 녹색당 대표. 
지난 3월 인천공항에서 열린 선발대 출정식. 맨 뒤 빨간 점퍼를 입은 이가 김찬휘 전 녹색당 대표. 

TPNW가 생소한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NPT(핵확산금지조약)는 대부분 알 것이다. NPT는 쉽게 말해 핵보유국을 2차대전 전승 5개국으로 제한하는 조약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 5개국 외에도 4개국이 더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바로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 그리고 북한이다. 앞의 세 나라는 NPT에 아예 가입하지 않았고, 북한은 유일한 탈퇴국이다.​

이런 상황에서 선택은 두 가지밖에 없다. 핵을 갖고 싶은 나라는 모두 갖는 것, 아니면 모두 함께 핵을 없애는 것.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후자를 지지할 것이다. 그래서 2017년 UN에서 122개국 찬성으로 핵무기금지조약(TPNW)이 체결되었다. 핵 보유 9개국 및 한국, 일본, 호주, 나토 회원국 등 핵우산 아래에 있는 국가들은 모두 조약 체결에 불참했다. 그러나 TPNW를 이끈 주역인 ‘핵무기 폐기를 위한 국제 캠페인’(ICAN)은 그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핵무기금지조약 체결에 이른바 ‘강대국들’이 불참했다고 해서 핵무기 폐기를 위한 여정을 멈출 수는 없다. TPNW 이후 2022년, 2023년 연이어 당사국회의를 열었고, 올해 3월 3차 당사국회의가 열리게 된 것이다. ​

또한 올해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떨어진 지 80년이 된 해이다. 당시 피폭된 사람들 중 10분의 1 정도가 재일 조선인들이다. 하지만 미국, 일본, 한국 정부의 외면과 냉대 속에 외면당해 왔다. 한국 정부가 「한국인 원폭 피해자 지원법」을 만든 것이 겨우 2016년이고, 그나마 피폭 1세만 인정되었다. 피폭 2세이자 반핵운동가인 김형률 님이 34세에 세상을 떠난 것이 2005년이었음에도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원폭 80년 방미증언단’으로 규정하고 몇 개의 원칙을 정했다. 첫째, 한국인 핵 피해자들의 존재를 널리 알릴 것. 둘째, 핵 피해자를 중심에 둔 핵무기 반대운동을 벌일 것. 셋째, 세계의 핵 피해자들과 연대를 강화할 것. 그리고 이 증언단에 참여, 후원, 혹은 지지하는 단체 및 개인과 함께 '비핵평화 시민연대'(Korean Anti-Nuclear Peace Action)를 결성하고 방미 준비를 마쳤다.

 

미국 핵무기 역사가 시작된 워싱턴 주 핸포드 인근에 세워진 와나품 헤리티지 센터. 핸포드에 최초의 원폭용 우라늄과 플라토늄 처리공장이 세워졌고, 지금도 이곳엔 대량의 고준위 핵폐기물들이 지하에 보존돼 있다.  김찬휘
미국 핵무기 역사가 시작된 워싱턴 주 핸포드 인근에 세워진 와나품 헤리티지 센터. 핸포드에 최초의 원폭용 우라늄과 플라토늄 처리공장이 세워졌고, 지금도 이곳엔 대량의 고준위 핵폐기물들이 지하에 보존돼 있다.  김찬휘

강에 기대어 살던 선주민들,
핵 재처리 공장 건설로 쫓겨나다

선발대 6명이 처음 방문한 곳은 시애틀.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란 영화 제목도 있듯이 시애틀 하면 낭만적 느낌을 갖게 된다. 하지만 시애틀이 속한 워싱턴주는 미국의 핵무기 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2차세계대전 중 미국의 원폭 기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의 3대 지역 중 하나인 핸포드 사이트(Hanford Site)가 시애틀 근처에 있다.

미국 원폭 개발 3대 지역은 워싱턴주 핸포드(나가사키에 떨어뜨린 팻맨 폭탄의 플루토늄 제조가 이루어진 곳), 테네시주 오크리지(히로시마에 떨어뜨린 리틀보이 폭탄의 우라늄 농축이 이루어진 곳), 그리고 뉴멕시코주 로스알라모스(원자폭탄을 연구개발하고 실제로 만들어진 곳, 영화 오펜하이머의 중심 무대)다. 이 세 곳을 미국 정부는 ‘맨해튼 프로젝트 국립 역사공원’(Manhattan Project National Historical Park)으로 지정하여 자랑하고 있다.​

시애틀에서 하룻밤을 보낸 다음 날, 233km 떨어진 핸포드 사이트로 향했다. 눈이 덮인 산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우리는 핸포드 사이트 근처에 있는 와나품 헤리티지 센터로 왔다. 센터는 휴무일이었지만, 센터장 이하 직원들 모두가 출근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와나품’은 핸포드 사이트에 원래 살고 있던 선주민 부족의 이름으로, 그 뜻은 ‘강 사람’(river people)이라고 한다. 그들은 강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살던 부족이었다. 이곳엔 콜럼비아강이 흐르고 있는데, 이 풍부한 물의 존재가 이곳에 비극적인 핵 재처리 시설이 지어진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1942년 갑자기 군이 들이닥쳤다. 주민들에게 나가라는 것이었다. 주민들은 플루토늄 제조 공장을 만들 계획을 알 리 없었다. 주민들은 인근 지역에 옮겨 살고 있었는데, 1953년에 수력발전 댐을 만든다고 또 나가라고 했다. 살던 곳이 모두 물에 잠겼다. 와나품은 이렇게 두 번 ‘소개’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살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에 다시 거주지를 만들었다. 와나품의 리더였던 아버지를 둔 센터의 관장은 “우리는 우리 고향 근처를 떠나지 않는다. 언젠가는 고향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생각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후손들에게 말하겠구나. 저곳이 ‘우리의 땅’이라고.

와나품은 전통을 존중하고, 지혜를 소중히 여기고, 그 지혜를 함께 나누는 공동체다. 땅과 물, 풀과 동물, 그리고 와나품은 모두 하나다. 놀랍게도 100여 명의 와나품 주민들은 다른 선주민들과 달리 연방 정부의 보조금을 전혀 받지 않는다고 한다. 미국 정부는 선주민이 사는 보호지역에 대한 선주민의 토지의 권리를 존중하는 협정을 맺었는데, 와나품은 그 협정을 맺지 않았다. 그 이유를 묻자, 센터장은 “우리는 그 땅의 소유자가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생각대로 행하는 것, 그들은 그것을 한 것이다.​

센터를 나와 ‘맨해튼 프로젝트 국립 역사공원’에 갔다. 직원 한 명이 있는데, 심드렁하게 15분짜리 비디오 하나를 틀어준다. 얼마나 핸포드가 2차세계대전 종전에 큰일을 했는지, 이곳이 얼마나 대단한 인류사적, 과학적 업적이 이루어진 곳인지 자부심이 ‘뿜뿜’하는 영상이었다. 히로시마 원폭 피해 2세인 이태재 님이 자신을 소개하니, 그 직원의 대답은 너무 간단했다. “쌩큐~”. 방문해주어서 감사하다는 의례적인 답변이었다. 나에게 그 “Thank you”는 “So what?”(무슨 상관이야?)처럼 들렸다.

핸포드, 사람이 살 수 없는 곳

​핸포드 사이트 투어 버스가 있는데, 4월에서 9월까지만 운행한다고 한다. 겨울철에는 쉬는 유적, 여지없이 관광지다. 차를 몰고 근처라도 가 보려고 했더니 검문소에서 막아서고 유턴하라고 한다. 핸포드 사이트 소개를 보니, 원자로(B Reactor)와 공장(T Plant)을 직접 볼 수 있다고 한다. 원자로는 우라늄235를 플루토늄239로 바꾼 곳이고, 공장은 이 플루토늄239를 화학적으로 분리해서 로스알라모스로 운송할 수 있게 만든 곳이다. 원자폭탄 7000개 분량의 플루토늄이 이곳에서 생산되었고, 지금 핸포드 사이트 지하에는 177개 탱크에 2억 리터가 넘는 고준위 핵폐기물이 묻혀 있다. 그래서 이곳을 ‘미국에서 가장 오염된 곳’이라고 부른다.​

와나품 선주민의 고향을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든 핵무기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끝나지 않는다. 미국의 핵무기는 워싱턴주로부터 태평양 전역으로 나아간다. 시애틀 인근 킷샙에는 미국의 핵잠수함 기지 두 곳 중 하나가 있다. 킷샙-뱅고르 해군 기지에는 8개의 핵잠수함(길이가 약 170미터)이 있고 1000개가 넘는 핵탄두가 보관되어 있는데, 세계에서 가장 핵탄두 밀집도가 높은 곳이다. 기지의 위치가 알려진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을 대신해서 그 위치를 알 수 없는 핵잠수함의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SLBM)이 현대 핵무기의 핵심 전력이다. 이에 맞서 50년 가까이 싸우고 있는 이들을 시애틀 방문 3일째에 방문했다. 바로 ‘그라운드제로’(Ground Zero)다.

 

워싱턴 주 시애틀 인근에 있는 킷샙의 '그라운드 제로'
워싱턴 주 시애틀 인근에 있는 킷샙의 '그라운드 제로'

방미 3일째, 그라운드제로를 가다

‘그라운드제로’라 하면 많은 사람들이 911테러 현장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 용어는 911테러 현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원래의 뜻은 ‘핵폭탄이 터진 지표 지점’이다. 예컨대 히로시마에도 그라운드제로가 있다. 폭탄이 터지면 모든 것이 절멸되고, 원점으로부터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된다. 그래서 그라운드제로는 ‘원점’의 의미로 확장된다. 우리가 방문한 ‘비폭력 행동을 위한 그라운드제로 센터’는 이 의미에 무게를 둔다.

그라운드제로는 비폭력의 원칙에 따라 핵무기에 맞서 싸우는 평화 단체다. 1970년대 ‘트라이던트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Trident SLBM) 배치에 맞서 싸우던 평화 운동가들이 ‘핵무기 없는 태평양’을 향한 기획으로 1977년 잠수함 기지와 바로 붙은 4600평에 달하는 부지를 구매했다.

“평화를 향한 변화는 내 삶으로부터 시작한다”

1982년 트라이던트 미사일을 장착한 잠수함이 처음으로 워싱턴주에 들어왔을 때, 그들은 해상에 작은 배를 타고 나가 시위를 벌였다. 이후 그들은 땅에서, 바다에서, 법정에서 계속 싸웠고 수백 번 체포되었다. 그라운드제로 리더인 캐서린 레일즈백은 1990년부터 이주/이민 전문 변호사를 하면서 내전으로 상처 입은 아프리카 이주자들을 위한 힐링 프로그램도 운영했다. 그와 캄보디아인 남편은 50년 가까이 이곳을 지키면서, 시애틀 반핵운동의 중심을 만들었다. ​그들은 사람과 세상의 선함을 믿고 일상생활에서도 비폭력 정신을 실천한다. 그들은 “평화를 향한 변화는 내 삶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말한다.

 

그라운드 제로 시설 내의 게시물. "세상에는 좋은 것(선)이 있다는 것을 믿으세요"
그라운드 제로 시설 내의 게시물. "세상에는 좋은 것(선)이 있다는 것을 믿으세요"
그라운드 제로 안의 또 다른 게시물 '비폭력 서약'. 말다툼이나 신체적 폭력에 가담하지 않으며, 약물(마약)이나 술을 지참하거나 무기를 휴대하지 않고, 상처받더라도 보복하지 않으며 모든 존재들에게 열려 있고 친절하며, 그들을 존중하겠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라운드 제로 안의 또 다른 게시물 '비폭력 서약'. 말다툼이나 신체적 폭력에 가담하지 않으며, 약물(마약)이나 술을 지참하거나 무기를 휴대하지 않고, 상처받더라도 보복하지 않으며 모든 존재들에게 열려 있고 친절하며, 그들을 존중하겠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센터 안은 전 세계의 평화주의자와 평화 운동가들이 붙여 놓은 것들로 가득했다. 강정마을의 포스터도 있었다.​ 우리는 그라운드제로와 함께 한국인 원폭 피해자의 증언 대회를 준비했다.

성별과 나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1982년 핵잠수함이 들어왔을 때 작은 배를 타고 직접 해상에서 저지 시위를 한 오래된 활동가부터, 미국의 군사적 팽창을 연구하는 젊은 지리학 박사, 망명한 필리핀 민주화 청년 운동가도 참여했다.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의 증언

우리의 증언이 시작되었다. 박정순 님은 1934년 생으로 군수공장에서 일하던 아버지를 따라 가족이 살고 있던 히로시마에서 피폭을 당했다. 12살 때 겪은 일이기 때문에 그때의 현장과 참상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또한 귀국 후 ‘귀환 동포’라는 낙인 아래 멸시받고, 어떤 보상도 지원도 없는 가운데 육체적 고통을 겪고, 차별과 배제를 피하려 ‘피폭자’임을 감추며 살아온 70여 년의 세월을 증언했다.

박정순 님은 92살의 나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힘차고 굳세게 미국과 일본의 사과와 배상, ‘핵무기 없는 세상’을 향한 염원을 부르짖었다. 함께 온 김규리 님은 그녀의 차녀로서 수많은 병마에 시달리고 있지만, 밝고 긍정적인 자세로 한국원폭피해자협회 부산지부 후손회를 이끌고 있다.

한국원폭피해자 후손회 이태재 회장도 증언했다. 그의 아버지는 미쯔비시 군수공장에 징용되어 일하던 나가사키에서 원폭을 겪었다. 그의 아버지는 파괴된 나가사키시와 군수공장 정리작업에 한 달 이상 참여하면서 추가 피폭을 당했다. 이태재 회장은 피폭 2세로서 위암 수술을 받았고 관절염 등 많은 병을 앓고 있지만,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할 때 시작한 한일고교생 평화 교류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으며, 2024년 일본 원수폭피해자단체협의회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할 때 한국인 대표로 참가했다.

400년 뒤 희망의 카누가 될 삼나무

한국의 원폭 피해자들과 미국의 원폭 반대 활동가들이 서로의 삶을 함께 나누며 공감하고 교류하는 경험을 무엇에 비하랴! 시애틀에서 우리의 거처와 식사를 마련해 주고 모든 일정을 준비해 주신 ‘늘푸른연대’ 분들이 준비해 간 김밥과 식혜 등으로 점심을 함께하고, 캐시의 안내로 그들의 집이자 쉼터이자 센터인 곳을 둘러보았다. 일본 불교 교파인 창가학회(SGI)가 짓고 있는 탑도 있었고, 미국 퇴역군인이 기부한 평화의 새 조형물도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1994년 미국 토착 선주민이 직접 카누를 타고 와서 심은 작은 나무다. 31년이 지나 이제 제법 자란 이 나무 앞에는 2394년이 적힌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 이 나무는 실제로 카누를 만드는 나무인데, 400년 후인 2384년에는 우람한 나무로 커 있을 것이고, 그때 다시 누군가 이 나무로 카누를 만들 것이라는 희망을 담았다고 한다. 400년이 지나 카누를 다시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꿈, 그것이 바로 ‘생명 평화’의 꿈이다.

 

1994년에 심은 시더(cedar) 삼나무. 400년 뒤 희망의 카누를 만들자는 꿈이 서린 나무다.
1994년에 심은 시더(cedar) 삼나무. 400년 뒤 희망의 카누를 만들자는 꿈이 서린 나무다.

킷샙-뱅고르 해군 기지와 그라운드제로를 가르는 철조망에 다다랐다. 평화 운동가들은 철조망에 ‘가자를 죽이지 마라’(Let Gaza Live)라는 글자를 설치했다. 미군도 보라고 반대 방향도 설치했다고 한다. 50년째 굴하지 않고 꿋꿋이 싸우고 있는 미국의 동지들에게 열렬한 연대의 마음을 전한다.

 

철조망에 "가자를 죽이지 마라"(Let Gaza Live !)는 구호가 설치돼 있다.
철조망에 "가자를 죽이지 마라"(Let Gaza Live !)는 구호가 설치돼 있다.

그라운드제로에서 멋진 시간을 보내고 아쉬운 작별을 했다. 저녁에는 시애틀 한인회관에서 늘푸른연대, 시애틀 미주민주참여포럼 등 우리를 초대해 준 분들이 마련한 행사에 참여했다. ‘사회적책임을 위한 워싱턴 의사회’ 간사이자 ‘미국의 민주적 사회주의자’ 회원인 숀과의 만남도 기억에 남는다. 전날 와나품 탐방을 주선해 준 분이다. 그와 자신의 삶과 가치에 대해 긴 대화를 나누었다.

​늘푸른연대는 시애틀의 진보적 한인들의 플랫폼이다. 북미 서부 지역에서 가장 오래 활동해 온 진보 단체로서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5.18광주민중항쟁의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 선생이 1984년에 창립한 한국청년연합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윤한봉 선생이 목숨을 건 35일간의 밀항으로 처음 미국 땅에 발을 딛은 곳이 바로 시애틀이다. 광주 민중항쟁의 정신을 잃지 않고 평생을 분투한 윤한봉 선생처럼, 온 마음으로 우리 증언단을 지원해 준 이구 님을 비롯한 늘푸른연대의 모든 분께 이 지면을 빌어 큰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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