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폭 80년 방미 증언단 기록 ⑤]워싱턴에 간 증언단

“핵은 식민지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유엔 처치센터에 열린 핵 피폭 증언들

서구와 일본 중심 반핵운동의 한계-핵피해 당사자들 소외

식민지 반핵운동가들과 함께 한 ‘밥상 연대’

평통사, 내년의 원폭 국제민중법정 위한 설명회

김찬휘 전 녹색당 대표
김찬휘 전 녹색당 대표

영화 상영 내내 흐느낌이 그치지 않는다. 카자흐스탄 활동가들이 ‘자라(JARA) - 방사능 가부장제: 카자흐스탄의 여성들’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상영하고 있다.

‘자라’는 카자흐스탄 말로 '상처'라고 한다. 러시아의 40년간에 걸친 핵실험은 사람, 동식물, 곤충, 물, 공기, 흙 모두에게, 더 나아가 과거, 현재, 미래 세대 모두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 이 영화를 제작, 촬영, 편집한 아이게림 세이테노바(Aigerim Seitenova)는 3세 피해자로서 ‘카자흐스탄 핵피해 당사자연합’의 공동 창설자이기도 하다. 영화 상영 이후 증언하시는 분은 팔이 없다.

유엔 처치센터에 열린 핵 피폭 증언들

1953년 10월 15일 영국은 호주 서부 사막지대인 에뮤필즈(Emu Fields)에서 핵실험을 자행했다. 영국과 호주 정부는 사막에 “아무도 없다”고 말했지만, 그곳에는 호주 아난구(Anangu) 선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의 캠프에는 방사능으로 오염된 검은 먼지가 쏟아졌다. 증언하는 피해 2세 카리나 레스터(Karina Lester)의 아버지 야미(Yami)는 그 후유증으로 시력을 잃었다. 야미가 핵실험 당시를 증언하는 영상에서, 파리가 끝없이 날아와 그의 얼굴과 입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서구와 일본 중심 반핵운동의 한계-피해 당사자들의 소외

카자흐스탄과 호주의 증언이 이루어지고 있는 이곳은 유엔 건물 길건너에 있는 처치센터(Church Center for the UN). 핵진실 프로젝트(Nuclear Truth Project) 행사가 연일 열리고 있다. 핵범죄자들 뿐만 아니라 주류 반핵운동도 도외시해 왔던 핵과 핵무기의 진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만을 열거하며 배제했던 여러 지역 핵피해 당사자들의 육성, 서구와 일본 중심의 반핵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핵식민지 주민들의 외침이 울려퍼지고 있다. 감리교가 지어 유엔에 헌정한 처치센터는 초교파적 정신이 충만한 곳으로, 역사적인 1층 예배당(Tillman Chapel)에서는 종교가 다르거나 국가와 문화가 다른 커플의 결혼식이 자주 열린다고 한다.

 

화면에 "이 우물물은 마실 수 없다"는 글이 떠 있다.  핵무기 실험으로 방사능에 오염된 나바호 선주민 지역.  사진 김찬휘
화면에 "이 우물물은 마실 수 없다"는 글이 떠 있다.  핵무기 실험으로 방사능에 오염된 나바호 선주민 지역.  사진 김찬휘

처치센터에서 우리는 뉴멕시코, 네바다 외의 또다른 미국 핵 피해자를 만났다. 피폭은 우라늄 채굴에서부터 시작된다. 애리조나, 뉴멕시코, 유타에 걸쳐 있는 나바호 선주민 지역(Navajo Nation)에서는 핵무기 실험 전인 1944년부터 우라늄 채굴이 시작되었고, 그 채굴 작업은 모두 선주민이 담당했다. 500개 이상의 광산이 버려진 지금, 방사능은 계속 유출되고 있다. “이 우물물은 마실 수 없다”라는 팻말이 서 있지만, 상수도가 없는 곳에 사는 선주민은 이 물을 먹을 수밖에 없다. 당국은 말한다. "정수하거나 희석해서 먹으면 된다." 이 말을 들으면서 후쿠시마 오염수에 대해 일본전력과 일본정부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우리는 월성 등 핵발전소 지역 주민들이 피폭과 싸울 때, 지구 어디선가 우라늄을 채굴하면서 제일 먼저 피폭당하고 있을 사람들을 잊으면 안 된다. 우라늄 채굴을 막을 수 있다면 핵발전과 핵무기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식민지 반핵운동가들과 함께 한 ‘밥상 연대’

우리는 마샬제도, 폴리네시아란 명칭을 버렸듯이, 스페인 정복자들이 붙인 ‘나바호’라는 호칭도 버리기로 했다. 우리는 그들을 그들의 고유어인 ‘디네’(Diné)로 부르기 시작했다. 패널 4명 모두가 디네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말한다. “미국 정부는 여기를 나바호 ‘네이션’이라 부르지만, 우리는 우라늄 채굴/운반/처리/정화 작업에 대해 어떤 권한도 없다. 의사결정 기구에도 참여하지 못한다. 연방정부가 멋대로 할 뿐이다. 우리는 주권이 없다.” 이름만 ‘네이션’일 뿐 아무런 주권이 없는 이곳을 ‘콜로니’(식민지)라 불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이렇게 식민지 반핵운동의 주체들과의 소중한 만남에 감사하고 그 마음을 영원히 이어가기 위해서, 우리 방미 증언단은 그들을 코리아타운의 한식당으로 초대해서 밥과 막걸리를 함께 먹는 이벤트를 준비했다. 이것을 우리는 ‘밥상 연대’라 이름붙였다. ‘식구’(食口)라는 말이 있듯이 마음을 나누는데 음식을 나눠먹는 것만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밥상 연대’는 문유성, 김갑송 님의 민권센터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민권센터는 예산이 빡빡한 우리 방미 증언단을 돕기 위해 3000달러(420만 원)를 지원해 주셨다. 우리는 이 후원금의 대부분을 밥상연대 비용으로 사용했다.

3월 2일 밥상연대 첫날, 마호이누이(4회 연재 참고)의 히나모우라(Hinamoeura Cross) 의원과 그녀의 동료들, 호주의 카리나(Karina)와 그녀의 아들 윌리엄 휴즈(William Hughes), ‘카자흐스탄 핵피해 당사자연합’의 공동 창립자인 예르다울렛(Yerdaulet Rakhmatulla)과 인디라(Indira Weaver)를 초대했다. 인디라는 전문 산악인으로서 험준한 산을 오르면서 기금을 모아 카자흐스탄의 참혹한 핵 피해자들을 돕는 ‘7개의 정상 오르기’(7 Summits Project)를 진행하고 있다. 한국에서 온 우리들은 손에 손을 잡고 ‘아리랑’을 부르고 마호이누이의 친구들도 고국의 노래로 답가를 들려주었다. 카자흐스탄 친구들은 시 낭송으로 화답했다.

 

'밥상 연대' 1차 모임. 
'밥상 연대' 1차 모임. 

한가지 해프닝이 있었다. 한국 막걸리의 참맛을 맛보이고 싶어 몇 병 시켰을 뿐인데, 나중에 계산서를 보니 막걸리 값만 300달러(42만원)가 나왔다. 너무나 놀라서 알아보니 막걸리 한 병이 20달러(2만8천원)! 값도 모르고 흥겨운 기분에 막걸리로만 후원금의 10분의 1을 썼다. 2차 밥상연대부터는 막걸리 주문 제한령이 발동되었다. 다음날 2차 밥상 연대에는 아칸소에서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준 아일릉긔나 친구들 5명과, 참여연대를 대표해 당사국 회의에 온 이영아 님을 초대했다. 이 날 우리는 ‘아침이슬’을 불렀다. 나는 노래를 부르다 울었다. 이미 많이 친해진 우리들 사이에는 얘기꽃이 피어났다. 누군가 리아일릉긘과 우리가 ‘형제자매’라고 말했다. 그렇다. 우리는 비핵평화운동의 주요한 동맹자를 얻었다.

 

우리의 동맹자, 아일릉긔나 ‘형제자매’들과 함께.
우리의 동맹자, 아일릉긔나 ‘형제자매’들과 함께.

신과 직접 만나려는 위계 없는 퀘이커들과의 대화

3월 4일, 방미 증언단 16일째 일정은 퀘이커하우스(Quaker House)에서 시작되었다. 퀘이커는 1650년 조지 폭스(George Fox)가 설립한 교파로서 정식 명칭은 ‘종교친우회’(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다. 요한복음 15:14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다 행하면 너희는 내 친구다"라는 말씀을 따라, 퀘이커는 서로를 ‘친구’라 부른다. 퀘이커는 사회정의에 앞장선다. 일찌기 성 평등, 노예제도 반대, 전쟁 반대 등에 앞장섰고 1947년에 퀘이커 봉사위원회가 종교단체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탔다. 함석헌 선생이 퀘이커인 것도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우리 일행 중에 한 명이 퀘이커 교단의 특징에 대해서 묻자, 한 분이 "사람 하나하나가 신을 증거할 수 있는 내적 빛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따라서 중간에 매개자가 없이 신과 직접 연결되는 것, 개인 스스로의 영적 체험을 중시"한다고 대답한다. 또 "우리는 위계(hierarchy)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실제로 퀘이커는 전문 성직자가 없고, 때로는 급여를 받는 '목사'가 있기도 하지만 높은 위치에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모임을 돕고 친구들과 지역사회의 연결을 돕는 유급 봉사자 정도라 한다. 우리는 평화의 한 마음으로 따뜻하고 우애 넘치는 대화를 나눴다.

 

'퀘이커의 집' 방문.
'퀘이커의 집' 방문.

평통사의 원폭 국제민중법정 셜명회

이 날도 처치센터에 왔다. 오늘은 평통사가 내년 뉴욕에서 개최할 원폭 '국제민중법정'(International People's Tribunal)을 앞두고 원폭 피해자 증언 및 조직위원회 설명회를 연다. 원폭 국제민중법정은 1945년 미국의 원폭 투하가 국제법 관점에서 볼 때 위법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민간 법정이다. 2015년 5월 핵확산금지조약(NPT) 회의에서 한국 원폭피해자협회 합천 지부장 심진태 님이 “피폭자들이 앞장서서, 다시는 핵무기를 못쓰게 하는 운동을 벌여야 한다. 그 첫번째가 미국이 자기 책임을 인정하게 하는 것”이라 연설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한국의 원폭 피해자들이 원고가 되어 미국을 고소하고, 각국의 변호사, 법률 전문가들이 판사 등을 구성해서 법정이 진행될 예정이다. 행사를 끝내고 드디어 최종목적지 유엔으로 입장한다. 입장하기에 앞서 우리는 “핵무기 금지! 평화”(NO NUKE! PEACE!)를 힘차게 외쳤다.

 

뉴욕의 유엔 본부 건물 앞에 선 증언 방문단.
뉴욕의 유엔 본부 건물 앞에 선 증언 방문단.

존 레논 암살에 사용된 리볼버를 형상화한 ‘묶여 있는 총’

이대수 단장, 이태재 회장 외에는 처음 들어가 보는 유엔 건물. 보안검색이 삼엄하다. 경내로 들어가니 커다란 ‘묶여있는 총’이 눈에 들어온다. ‘비폭력’(Non-Violence)이라는 제목의 이 유명한 청동상은 스웨덴의 예술가 로이터스워드(Carl Fredrik Reuterswärd)가 만든 것이다. 1980년 존 레넌이 암살당했을 때 존 레넌을 알고 지냈던 로이터스워드는 큰 충격을 받았다. 밤을 꼬박 새워 암살범 채프먼이 사용한 리볼버를 묶어 못 쓰게 만든다는 작품 구상을 완성했다. 1984년에 조각이 완성되었고 유엔 앞마당에 전시된 것은 1988년이다. 청동상은 단지 존 레넌의 추모를 넘어, 폭력 없는 세상에 대한 인류의 염원을 상징하게 되었다.

 

존 레논 암살에 사용된 리볼버를 쓸 수 없게 묶어 형상화한 청동상 '묶여 있는 총' 앞에서.
존 레논 암살에 사용된 리볼버를 쓸 수 없게 묶어 형상화한 청동상 '묶여 있는 총' 앞에서.

히로시마 피폭자 2세 한정순 님 증언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실은 텅 비어 있었고, 핵무기금지조약 당사국 회의는 유엔 신탁통치이사회 회의실에서 열리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조약을 비준한 ‘당사국’도 아니고 우리 방미 증언단은 따로 시민사회 신청을 한 것도 아니라서, 더 관심이 가는 소회의실 행사,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핵위기 극복을 위한 행동’에 참여했다. 평통사 팀과 함께 오신 심진태님, 한정순님(원폭피해자 2세 환우회 회장)의 증언이 있었다. 한정순 님의 어머니는 임신 중에 히로시마에서 피폭을 당하셨다. 태내 피폭자인 오빠는 1년만에 세상을 떠났고, 한정순 님의 6남매 모두가 뇌경색, 심근경색 등 원폭 후유증을 앓고 있다. 한정순 님은 ‘대퇴부 무혈성 괴사증’으로 인공관절 수술을 하는 등 총 12차례의 수술을 받았다. 피폭 3세인 아들은 뇌성마비를 가지고 태어났다. 자신의 몸도 성하지 않지만 한정순 님은 ‘2세 환우회’를 이끌면서 미국의 책임 인정과 사죄 및 배상을 요구하며 핵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참여연대의 이영아 님도 발언하셨다. 이영아 님은 남한의 국민 71%가 남한의 핵무장을 원한다는 작년 말 여론조사와, 북한과의 공식 대화채널의 부재, 윤석열 쿠데타 때 북한의 도발을 유도했던 사실 등을 거론하면서 한반도의 핵확산과 군사적 긴장 고조에 대한 우려를 표하고 전쟁 방지와 긴장 완화를 위한 대책을 호소했다.

일본에서 사민당, 레이와 신센구미, 입헌민주당 등에서 4명의 정치인이 참여했는데, 사회를 보던 일본인이 “한국은 지금 대통령도 없고 정치인도 한 명도 참여하지 않았는데, 일본은 4명의 정치인이 참여했다”고 발언하고 좌중이 박수를 치는 일이 있었다. 우리 대표단의 이승주 님이 즉시 발언 신청을 해서 “이 공간은 연대와 협력을 위한 자리이고 서로 존중해야 하는데, 정치적 이슈로 양국을 비교를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정중히 항의했다. 이어 “한국과 일본이 미국에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것이 마땅하듯이 한국은 일본에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데, 여기에 있는 일본 정치인들과 시민단체들은 침략, 착취, 위안부, 강제징용 등에 대한 반성할 준비가 얼마나 되어 있느냐?”고 일침을 놓았다. 아까 박수치던 사람들이 끽소리도 못했다.

‘이사야 벽’ 앞 핵무기 폐기 집회

3월 5일, 방미 17일째는 유엔 건물 반대편 유서깊은 ‘이사야 벽’ 앞에서의 핵무기 폐기 집회로부터 시작되었다. 이곳의 정식 명칭은 1950년 흑인 최초 노벨평화상 수상자의 이름을 딴 랄프 분체 공원(Ralph Bunche Park)이지만, 굳이 이사야 벽이라 부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벽에 성경 이사야서 2장 4절의 유명한 문구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가지치는 낫을 만들 것이다.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칼을 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우지도 않을 것이다.”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치고 유엔을 만들 때, 이런 마음을 갖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었겠는가? 하지만 벽에 새긴 이 말은 전후에 지켜지지 않았다. 집회는 다양한 뉴욕의 반핵/평화 단체들이 주최했다. “핵무기 자원을 기후위기 해결로 돌리자” “핵탄두를 풍력발전 풍차로 바꾸자” 등의 구호가 눈에 띄었다.

 

뉴욕 핵 폐기 집회에서 연설하는 이태재 회장.
뉴욕 핵 폐기 집회에서 연설하는 이태재 회장.

워싱턴의 국회의원실을 찾아간 방미 증언단

이날 방미증언단의 이대수, 이태재, 김찬휘 3명은 그룹과 분리되어 워싱턴DC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미국 의원실을 방문하여 한국인 원폭 피해자의 실태를 알리고 사과와 배상을 기조로 하는 해결방향을 설득하며, 핵확산 방지와 더불어 핵무기의 종국적 금지에 대해 워싱턴 정가의 여론을 조금이라도 우호적으로 만들기 위함이다. 440km 거리를 3시간 40여분이 걸려 미국의 수도로 가던 그 시간에, 뉴욕의 남은 그룹은 리코 등 일본인과 3차 밥상 연대를 진행했다.

다음날 워싱턴 일정은 조현숙(Echo)님과 오스틴(Austin Headrick)님의 큰 도움을 받았다. 두분은 일정 확정 및 이동과 통역을 도맡아 주셨다. 조현숙 님은 ‘비무장지대를 건넌 여성들’(Women Cross DMZ)의 열정적인 활동가이다. 이 단체는 2015년 정전협정을 끝내고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한다는 절박한 요구를 가지고 북한을 입국한 다음, 박근혜 정부의 허가를 받아 비무장지대를 뚫고 내려와서 전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 2명을 포함한 여성 30명이었다. 퀘이커인 오스틴은 메노나이트(Mennonite) 교단이 운영하는 한국평화교육훈련원(KOPI)에서 7년이나 근무해 한국어가 능숙하다. 이틀전 퀘이커하우스 방문도 오스틴이 주선해 준 것이다.

첫번째로 방문한 의원실은 인도계 로 카나(Ro Khanna) 민주당 하원의원실. 케빈 폭스 보좌관이 응대했다. 우리는 한국인 핵 피해자의 존재, 미국 정부의 책임있는 태도와 행동, 한반도 핵확산 방지와 평화 회복을 위한 노력 등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했지만, 폭스 보좌관은 이따금씩 타이핑을 할 뿐 공감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두번째로 찾아간 곳은 한국계 최초의 상원의원 앤디 김(Andy Kim) 민주당 의원실이다. 한국계니까 한반도 문제에 좀 전향적이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는데, 오히려 관련 이슈를 조심스러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을 먹고 마지막으로 민주당 크리스 반 홀렌(Chris Van Hollen) 상원의원실을 방문했다. 그는 미 상원 외교위 위원으로서 과거 동아시아태평양소위원회 위원장을 지내기도 한 거물 정치인이다. 펠로우인 후다 이브라임(Huda Ibrahim)은 세 의원실 중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응대했다. 게다가 우리 팀도 세 군데를 돌다 보니 점점 더 능숙해져서, 요구 조건을 더욱 간명하게 전달하고 미국 의원이 공감할 만한 방식으로 우리의 요구를 포장하는 능력도 생겼다. “미국이 북한과의 채널을 차단하고 있으니, 북한 핵무기의 위협을 느낀 남한에서 핵무장의 여론이 커지고 있다. 남한이 핵무장하면 미국 ‘핵우산’이 무너지게 되니, 북한과 대화를 시작하고 한반도 긴장을 완화해야 하지 않겠냐?”

 

워싱턴의 국회의원실을 찾아가 한반도 평화협정, 피폭자 문제 등을 설명하고 얘기를 나눴다.
워싱턴의 국회의원실을 찾아가 한반도 평화협정, 피폭자 문제 등을 설명하고 얘기를 나눴다.

“핵은 식민지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열심히 워싱턴 애드보커시(advocacy) 활동이 진행되고 있던 시각, 뉴욕에서는 언론 인터뷰와 박정순님의 추가 증언이 진행되었다. 밤에는 카자흐스탄, 디네, 콩고 활동가들과 4차 밥상 연대를 했다. 3월 7일, 방미 19일째는 핵무기금지조약 3차 당사국회의가 폐막했다. 전날 강행군한 방미증언단은 오전에 쉬고 오후 늦게 미주한인 평화재단, 코리아평화 풀뿌리네트워크 공동주최의 교민 대상 증언 대회를 위해 플러싱의 민권센터로 갔다. 박정순 선생님의 증언을 여기 와서 여러번 들었지만, 이날의 증언이 제일 좋았다. 47년간 한국 원폭 피해자를 도우신 이치바 준코 선생님도 오늘은 많이 벅차오르시는지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씀을 길게 다 토해내셨다.

2시간 행사를 꽉 채우고 뒷풀이를 하며 이태재 회장이 이치바 준코 님에게 감사의 말씀과 선물을 전달하셨다. 이치바 준코 님의 도움으로 작년 일본 원수폭피해자단체협의회의 노벨 평화상 수상식에 참여하였던 이태재 님이, 당시의 상장을 복사하여 특별 증정도 하셨다. 민족주의를 대단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으나, 동포애가 아무리 뜨거운들 인류애의 뜨거움을 이기겠는가? 아무 댓가도 바라지 않고 자신을 내세우지도 않고, 묵묵히 47년간 한국 원폭 피해자들을 돕고 핵 없는 세상을 향해서 분투해 온 이치바 준코님, “존경합니다.”

 

귀국한 뒤 인천공항에서 한 방문단 해단식.
귀국한 뒤 인천공항에서 한 방문단 해단식.

이제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21일간의 방미증언단 활동은 수많은 후원자와 관심 갖고 지켜 봐 주신 분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덕분에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큰 성과를 거두었다. 한국인 핵무기 피해자들의 실상을 널리 알렸으며, 핵은 식민지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 핵발전과 핵무기 및 우라늄 채굴은 하나라는 것을 깨달았고, 핵무기를 없애기 위한 식민지 핵 피해자들의 국제연대의 영감을 얻고 그 초석을 다졌다. 방미증언단은 앞으로 ‘비핵평화시민연대’ 조직을 발전시켜 합천에서, 한반도에서, 세계 곳곳에서 ‘핵무기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향해 계속 싸울 것이다. 5회에 걸친 긴 연재를 읽어주신 시민언론 민들레 독자들에게 큰 감사를 표한다. ‘핵은 식민주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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