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폭 80년 방미 증언단 기록 ④]“과거가 현재를 돕는다”

뉴욕 민권센터와 윤한봉의 재미 한청련

코리아타운에서 열린 ‘윤석열 탄핵’집회

‘아이캔’의 리버사이드 교회 ‘핵금지 주간’ 선포 행사

내부 및 외부 식민지서 핵실험을 한 5대 핵보유국

오지 못한 중국 신장위구르 피폭피해 활동가들

김찬휘 전 녹색당 대표
김찬휘 전 녹색당 대표

미국 체류 11일째, 드디어 최종목적지 뉴욕시에 도착했다. 뉴욕 라과디아 공항에는 민권센터 김갑송 국장이 마중을 나왔다. 뉴욕 퀸즈 플러싱(Flushing, Queens)에 있는 허름한 호텔에 여장을 풀고 민권센터 문유성 회장이 초대한 저녁 식사에 갔다. 문 회장은 1990년 미국에 유학 왔다가 ‘광주항쟁의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 선생의 재미한국청년연합(한청련) 활동에 투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김 국장은 1984년에 영화를 공부하러 LA에 왔다가 윤한봉 선생과 운명적인 만남을 했고 그후로 40년이 넘게 한청련 활동을 하고 있다. 두 분 다 학업을 포기하고 LA를 시작으로 여러 지역을 옮기며 조직을 다졌고, 이제는 뉴욕과 뉴저지에서 활동하고 있다.

​“과거가 현재를 돕는다” 윤한봉의 재미 한청련

김 국장에게 물어 봤다. 어떻게 윤한봉 선생과 함께 하게 되었느냐? 김 국장은 의외의 답변을 했다. "함께 밥을 먹고 윤한봉 선생이 설거지를 도맡아 하는 것을 보고 이 사람과 함께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고 한다. 모두의 일을 자기의 일로 여기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운동가의 제1덕목이지만, 41년 전에는 남성이, 그것도 연장자인 남성이 앞장서 설거지를 하는 일은 흔치 않았다는 것을 상기하면 이 말의 무게감이 느껴질 것이다. 윤한봉 선생은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침대에서 자지 않는다' '내 것을 갖지 않는다'의 3원칙을 스스로 실천했다고 한다. 동지들과 시민들이 쓰러져 간 광주 민중항쟁의 생존자로서 그의 결의가 어떠했을지는, 그를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도 절절히 느껴진다.

플러싱의 민권센터에서 김갑송 국장(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과 함께.   김찬휘
플러싱의 민권센터에서 김갑송 국장(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과 함께.   김찬휘

윤한봉 선생의 망명 첫 도착지인 시애틀에서는 늘푸른연대의 지원을 받았고, 뉴욕에서도 윤한봉 선생이 만든 민권센터의 지원을 받으니, “과거가 현재를 돕는” 느낌을 받았다. 윤한봉 선생이 망명생활을 마치고 귀국해 선배 김남주 시인을 찾아갔을 때, 김남주 시인은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윤한봉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순결한 사람이야. 백 프로 순결한 사람, 추호의 거짓이나 허황됨이 없는 철저한 사람.” 윤한봉의 뜻은 두 분 속에 살아 있었다. 문 회장은 겸손하고 포용력이 넘쳤고, 김 국장은 겸손하고 푸근했다. 김 국장은 구식 밴을 몰고 마중을 나왔는데, 밴 안에는 좌석이 딱 두 개뿐이고 냉장고와 옷가지, 생활도구들로 가득했다. 사실 이 밴은 그의 ‘뉴저지 집’이었다. 뉴욕에서 일을 볼 때는 퀸즈의 집에서 살고, 뉴저지에 일하러 가면 이 밴에서 잔다고 한다. 자산이 400만 달러가 넘고 1년 예산이 300만 달러에 달하는 민권센터의 활동가는 여전히 길 위에 있다.

즐거운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밤 11시에 플러싱 거리를 걷는데, 여기가 미국인지 중국인지 헷갈린다. 플러싱은 1970년대부터 대만인, 일본인, 한국인으로 이어지는 아시아인의 이주가 계속되었고, 1990년대부터 중국 본토의 이주자가 밀려들어 차이나타운을 방불케 하는 장소가 되었다. 낡은 호텔에 돌아와 보니 방은 좁고 화장실은 낡았고 비품이라곤 작고 얇은 백색 비누 두 개뿐이다. 앞으로 10일을 더블베드 3개에서 두 명씩 붙어서 여섯 명이 자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꿋꿋하게 걸레로 바닥을 열심히 닦고 신발을 벗었다. 침대는 움직일 때마다 삐꺽거리지만, 기대어 잘 수 있는 침대가 있음에 감사하며 고마운 후원자분들, 그리고 윤한봉 선생을 생각했다.

뉴욕 퀸즈 플러싱의 민권센터

플러싱을 거처로 정한 이유는 뉴욕에서 제일 싸다는 점 외에도 민권센터가 여기 있다는 점에 있었다. 다음날 아침 걸어서 민권센터를 방문했다. 김갑송 국장이 민권센터의 역사에 대해 설명해 주신다. 1984년 창립 이후 한국계 미국인 청년들의 교육과 한국계 노년들의 돌봄에 주력하던 시절에서, 1995년 워싱턴포스트 지에 반이민법안 반대 전면광고를 실은 캠페인을 계기로 한인 단체를 넘어 지역사회의 이주자, 저소득층, 노년층, 청년층을 위한 '커뮤니티 센터'로 성장해 온 민권센터의 역사를 잘 알 수 있었다.

차별받는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피해자의 10% 조선인들

점심을 먹고 있는데, 드디어 이치바 준코(市場淳子) 님이 오셨다. 이치바 준코는 47년째 ‘한국 원폭피해자를 돕는 시민모임’에 참여해 왔으며 현재는 이 모임을 이끌고 있다. 그녀는 대학 재학 중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피해자들 중에 한반도 출신자들이 10%에 달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한국 원폭 피해자들을 돕는 일을 시작했다. '한국의 히로시마'라는 책을 쓰기도 한 그녀는 “원폭 피해자라도 일본을 벗어나면 원폭 의료법 및 원폭특별조치법의 대상이 아니다”는 내용의 일본 후생성 ‘402호 통달(通達) 조치’를 폐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녀의 도움으로 일본 국외에 거주하는 피폭 1세도 일본이 제공하는 검진과 치료, 복지 수당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

일본은 1957년에 ‘원폭 피해자의 의료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피폭자 건강수첩을 교부하고 검진료와 치료비를 국가가 부담하게 했고, 1968년에 ‘원폭 피해자에 대한 특별조치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복지 수당을 지급했다. 이 법률들에는 일본인으로 한정한다는 ‘국적 조항’은 없었지만 지원 범위를 ‘일본국 내에 거주관계를 가지는 피폭자’로 한정해 사실상 한국인 등 외국인을 배제했다. 이에 원폭 후유증에 시달리던 손진두 님은 1970년 일본 밀항을 결행하고 밀입국자로 체포되어 복역 중, 건강수첩 교부를 신청했으나 거부되자 1972년 소송(일명 ‘원폭수첩재판’)을 제기했고 6년에 걸친 법정 투쟁 끝에 1978년 일본 최고재판소로부터 귀중한 승소 판결을 이끌어낸다. 이제 한국인도 피폭자 건강수첩을 받을 수 있게 되었지만, 앞서 말한 ‘402호 통달 조치’에 의거하여 원폭 피해자가 일본 국내에 살지 않으면 건강수첩에 따른 지원을 중단했다. 이에 한국에 거주하는 징병 피폭자 곽귀훈 님이 1998년 ‘피폭자 자격 확인 소송’을 제기해 2003년 결국 후생노동성의 ‘402호 통달’이 폐지된다. 여기까지 오는데도 무려 반세기가 걸렸지만, 여전히 피폭 2세와 3세 등에 지원은 전혀 없다는 것이 큰 문제다.

이치바 준코 님이 오신 것만 해도 좋은데, 선물까지 가져오셨다. 유엔 출입증(UN Pass)이다. 이전에는 개인별로 따로따로 신청했는데 이제부터는 참여단체가 일괄해서 발급받도록 되었다고 한다. 핵무기금지조약 3차 당사국 회담의 주요 참여단체로서 우리 방미증언단의 유엔 패스 발급을 도와주신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평통사)에게 특별히 감사를 드린다.

 

유엔 출입증
유엔 출입증

3.1독립운동=핵실험 날에 열린 ‘핵피해자 추모의 날’

한편, 늦은 오후 김동현 영화감독이 도착해서 우리 방미 증언단은 10명 완전체가 되었다. 자유시간이 생겨서 일부는 맨해튼에 있는 타임스 스퀘어(Times Square)를 가고, 다른 일부는 할렘에 있는 ‘말콤X 기념관’을 방문했다. 핵무기 관련으로 미국에 와서, 식민주의와 인종주의에 대해 새롭게 더 많이 생각하게 된 우리들에게 ‘말콤X’란 이름이 멀리 느껴지지 않았다. 전시관에 걸려 있는 그의 명언 “어떤 것을 위해서도 일어서지 않는 사람은 어떤 것에 의해서도 쓰러지게 된다”는 말이 강렬하게 와 닿았다.

 

말콤X 기념관. “어떤 것을 위해서도 일어서지 않는 사람은 어떤 것에 의해서도 쓰러지게 된다”  
말콤X 기념관. “어떤 것을 위해서도 일어서지 않는 사람은 어떤 것에 의해서도 쓰러지게 된다”  

다음날은 방미 13일째, 3월 1일이 되었다. 기고 3회에서 말한 캐슬 브라보 실험이 이루어진 날이 바로 3월 1일. 그래서 '아일릉긔나'는 1988년부터 이날을 국가공휴일로 지정하고 매년 ‘핵피해자 추모의 날’ 행사를 진행한다. 올해는 핵무기금지조약 3차 당사국회의가 열릴 뉴욕시에서 행사를 진행하기로 되어 있다. 놀랍게도 이날은 우리의 3.1독립운동과 날짜가 같다. 마셜 교육 이니셔티브의 베네틱은 말한다. “일본이 마셜제도를 식민지로 만들지 않았다면 미국이 마셜제도를 점령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미국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면 비극적인 핵실험도 없었을 것”이라고. 우리의 3.1독립운동도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없었다면 없었을 일이다. 우연이지만 우연 같지 않은 한 날의 이 두 개의 기념일을 연결시켜 국제연대의 공동 행사로 발전시키자는 얘기가 오고 갔다. 행사는 진보적 성향의 초교파 교회로 유명한 리버사이드 교회에서 열렸다. 캐슬 브라보 핵실험 71주년이 되는 오늘 행사는 특히 마셜 교육 이니셔티브가 마셜제도공화국 유엔 상설대표부와 협력하여 진행하는 첫 행사였다. 우리 방미 증언단은 전원 참석하여 연대의 마음을 전했다.

 

핵 피해자 추모의 날 행사.
핵 피해자 추모의 날 행사.

코리아타운에서 열린 ‘윤석열 탄핵’집회

추모 행사를 마치고 우리들은 교민들의 윤석열 탄핵집회에 참여했다. 집회는 코리아타운 입구에서 진행되었다. “탄핵이 마무리되는 중”이라 10여 명 정도가 올 거라고 했는데 우리 3명을 포함해 25명이나 왔다. 시위를 하는 중에 바람이 점점 강해져서 카메라 삼각대도 쓰러지고, 앰프도 방전되어서 육성으로 발언을 이어갔지만, 아무도 빨리 끝내자, 그만하자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이렇게 해외 교민들이 열심히 싸워주셨기 때문에 윤석열을 탄핵소추시킬 수 있었다고 말씀드리고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단지 몇 명을 감옥에 보내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앞으로 사회대개혁을 위한 여정에도 관심을 가지고 함께 해 주실 것을 부탁드렸다. 시위가 끝나고는 흥사단 사무실에서 뉴욕·뉴저지 비상시국회의 분들과 함께 시국 대화모임도 가졌다.

 

뉴욕 코리아타운에서 교민들과 함께한 '윤석열 탄핵' 집회. 
뉴욕 코리아타운에서 교민들과 함께한 '윤석열 탄핵' 집회. 

핵무기금지조약 3차 당사국 회의는 3월 3일에서 7일까지 열린다. 회의를 하루 앞둔 3월 2일 ‘핵무기 폐기 국제운동’(International Campaign to Abolish Nuclear Weapons, ICAN, 이하 ‘아이캔’)이 주최한 핵금지주간 선포 행사가 있었다. 아이캔은 1회 기고 때 말했듯이 핵무기금지조약 체결을 주도했고 그 공헌을 인정받아 2017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2022년 현재 110개국의 661개 조직이 아이캔에 참여하고 있으니,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 핵무기 반대 운동 조직이 아닐 수 없다. 아이캔의 창설자들은 '지뢰금지 국제운동'이 앞장서서 결국 1997년 '대인지뢰 금지조약'이 체결된 것에서 영감을 얻어 아이캔을 만들었고, 결국 핵무기금지조약 체결을 이끌어 내었다.

​‘아이캔’의 리버사이드 교회 ‘핵금지 주간’ 선포 행사

2017년 아이캔이 노벨평화상을 탔을 때,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국무부는 “(핵무기금지조약이) 세계를 더 평화롭게 만들지 못할 뿐 아니라 단 하나의 핵무기도 없애는 결과를 낳지 못할 것이며 어느 나라의 안보도 제고하지 못할 것”이라 혹평했고, 러시아도 “핵 균형 외에 국제안보와 안정을 위한 대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반대를 분명히 했다. 중국은 수상 소식만 전하고 논평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불편함을 표현했다. 좋아한 핵무기 보유국이 없었던 것은 확실하다.

핵금지 주간 선포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리버사이드 교회에 다시 왔다. 대회장에 들어가자마자 아이캔의 위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점심을 제공하긴 하지만 1인당 25달러씩 내고 들어가야 하는데,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사실상 핵무기금지조약 당사국회의에 맞추어 뉴욕에 온 핵피해 당사자들, 비정부기구, 반핵활동가들이 거의 다 운집한 '사전대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뉴욕 리버사이드 교회에서 열린 '아이캔' 주최 핵금지 주간 선포 행사.
뉴욕 리버사이드 교회에서 열린 '아이캔' 주최 핵금지 주간 선포 행사.

대회는 한국 원폭피해자 후손회 이태재 회장님의 증언과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선주민 언어로는 마오히누이 Mā’ohi Nui)의 히나모우라 크로스(Hinamoeura Cross) 의원의 발언으로 시작되었다. 이태재 회장님은 이번에 우리 '비핵평화 시민연대' 10명 그룹의 일원으로서 여기를 방문했다. 할아버지가 3.1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투옥되셨고 그후 일제의 감시와 괴롭힘으로 살기가 어려워 결혼 후 일본으로 이주하셨다. 그 이후 아버지가 일본 고쿠라에서 출생했고, 고등학교 졸업 직후 나가사키에 있는 미쯔비시 군수공장으로 징용되었다. 아버지는 원폭 폭발 당시, 야간 노동을 끝내고 숙소인 절에서 주무시고 있던 중이라 큰 피해는 면했지만, 폭발 이후 시가지 및 공장 정리작업에 한 달 이상 동원되어 추가 피폭을 당하셨다. 피해는 2세인 자신과 3세로 이어지고 있다는 증언을 했다.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마오히누이’의 피폭자들

마오히누이는 프랑스의 자치령으로서 ‘해외 국가’라는 지위가 부여된 프랑스의 식민지이다. 크로스는 대표적인 반핵운동가로서 2023년에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핵무기금지조약 당사국 회의에 공식 참여한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국회의장과 장관을 지냈고, 어머니는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 집안의 일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피폭자로서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하고 있다. 그녀는 25살에 백혈병이 발병했다. 프랑스는 1960-66년 사이에 알제리에서 17회 핵실험을 했고, 알제리 독립투쟁으로 실험이 여의치 않게 되자 1966-96년 사이에 마오히누이에서 193회의 핵실험을 자행했다. 마오히누이의 ‘기억일’은 7월 2일인데, 그날이 바로 프랑스가 1966년 마오히누이에서 최초로 핵실험을 한 날이다. 그들은 2014년이 되어서야 '어소시에이션 193'이란 이름의 단체를 결성하고 프랑스 정부에 진상 규명과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식민지 상태에서는 핵실험을 피할 수 없었고, 반식민지 해방 투쟁을 통해서만 그것을 면할 수 있었다는 것을 프랑스 핵실험의 역사는 잘 말해 주고 있다.

내부 및 외부 식민지에서 핵실험 한 5대 핵보유국

행사장에서 우리는 많은 피폭 당사자들을 만났다. 단상 위에서 진행되는 발언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제회의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연결을 만드는 것'이다. 서로 흩어져 있는 '점'을 연결하고, 그를 통해 선을 만들고, 그 선을 이어 면을 만들어 내야 한다. 점이 연결될 때 상상할 수 없는 힘이 만들어진다. 우리는 카자흐스탄 핵피해자들을 만났다. 구 소련은 총 715번의 핵실험을 했는데, 남쪽 카자흐스탄의 세마이(러시아어 세미팔라틴스크)에서 456번을 진행했다. 세마이에서는 소련의 최초 원자폭탄과 최초 공중 수소폭탄 실험이 모두 이루어졌다. 호주에서 온 엄마와 아들도 만났다. 영국은 영연방인 호주 정부와 협정을 맺고 총 45번의 핵실험을 했는데, 대부분 호주 남부의 선주민 지역인 에뮤필드와 마라링가에서 진행했다. 이렇게 핵무기 공식 보유 5개국의 핵실험은 예외 없이 ‘외부 식민지’ 혹은 ‘내부 식민지’에서 진행되었다. 5개 국 중 오직 중국에서 온 활동가만 만날 수 없었다. 중국은 어디에서 핵실험을 했을까? 45번의 실험 전부를 신장위구르 지역에서 했다. 하지만 신장위구르에서 온 피폭자도, 신장위구르를 대변하는 중국인 활동가도 볼 수 없었다.

뉴욕에서 만난 각국의 ‘아이캔’ 활동가들

각국의 아이캔 활동가들과의 만남도 의미 있었다. 특히 아이캔 국제운영위원회의 일원이자 일본 반핵 단체 ‘피스보트’(Peace Boat)의 열정적인 활동가 리코(Rico)는 박정순 님의 이야기에 큰 감동을 받았다. 리코는 히로시마 피폭 3세로서 코스타리카, 필리핀, 호주 등에서 핵무기 폐지를 위한 운동을 계속해 왔다. 메리 조이스(Meri Joyce)는 박정순 님 이야기를 들으며 연신 눈물을 흘렸다. 메리는 호주인으로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왔다가 큰 충격을 먹고 아예 일본에 정착해 2005년부터 피스보트의 활동가가 되었다. 영어와 일어 모두 유창해서 일본인 그룹의 통역을 도맡아 하고 있고, 2020년 문재인 정부 때 통일부에서 '한반도 평화 친선대사'로 임명되기도 했다.

 

일본의 반핵단체 '피스보트'의 활동가 리코(왼쪽)와 메리
일본의 반핵단체 '피스보트'의 활동가 리코(왼쪽)와 메리

일본 공명당 의원들도 만났다. 공명당은 일본 우파 정당 중에서 원폭 문제에 가장 적극적인 정당이다. 2017년에는 공명당 야마구치 대표가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 있는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찾아 헌화했는데, 주류 정당 중에는 최초의 일이었다. 공명당은 13세기의 승려 '일련'(日蓮, 니치렌)의 가르침을 따르는 '창가학회'(SGI, 우리나라에서는 '남묘호렌게쿄'라는 독경으로 잘 알려져 있다)에서 발원한 정당인데, 아이캔의 창립 때부터 밀접하게 활동해 왔고 핵무기금지조약에 일본이 가입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핵무기와 핵발전소의 원료인 우라늄 채굴이 이루어지는 콩고는 제일 먼저 피폭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콩고 출신의 이샤이야와의 만남도 잊을 수 없다. 그는 올해 8월 합천에 올 예정이다.

내일부터는 본격적인 행사가 진행될 것이다. 수많은 행사 전단지를 앞에 두고 우리는 다음과 같은 참여 계획을 세웠다. 첫째, 한국인 원폭 피해자의 진실을 더 많이 알릴 수 있는 곳, 둘째, 반핵운동의 큰 흐름 속에서 주변부로 밀려날 수 있는 선주민, 유색인종, 힘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연결될 수 있는 곳, 이런 곳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로 우리는 의견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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