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수로 공사 둘러싼 한·중 농민 간 시비가 발단

조선일보 오보로 흥분한 군중이 화교 보복 공격

400여 곳 폭동…233명 사망·실종, 546명 부상

민족 감정 자극해 양 국민 분열시키려는 일본 계략?

오보 낸 조선일보 창춘지국장, 사과문 발표 뒤 피살

탄핵 정국 속 반중 시위, 중대사관 난입 뭘 노리나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1931년 7월 1일과 2일 중국 지린성(吉林省) 창춘현(長春縣) 북동쪽 만보산(萬寶山·완바오산) 지역 삼성보(三姓堡·싼싱바오)에서 중국인 400여 명과 한인(조선인) 200여 명이 충돌했다. 이른바 만보산 사건이다.

발단은 한인들이 그해 4월 만보산 북서쪽 황무지를 임차해 개간하려고 당국의 허가나 땅 주인의 승낙도 받지 않은 채 20리 떨어진 이퉁허(伊通河)에서 물을 끌어오는 수로 공사를 벌인 것이었다. 더욱이 이곳 한인들은 중국인 하오융더(郝永德)에게 속아 허위로 토지 임대 계약을 맺은 상태였다.

 

만보산 사건의 발단이 된 관개수로
만보산 사건의 발단이 된 관개수로

수로가 지나는 지역의 중국인들은 침수 피해와 수운(水運) 장애를 이유로 반대하며 공사를 방해해 여러 차례 시비가 벌어졌다. 창춘현 정부는 공사 중단을 명령했으나 한인 농민들은 일본 경찰의 비호 아래 공사를 강행했다. 그러자 중국인들이 완공을 눈앞에 둔 수로를 파괴해 유혈 사태를 빚은 것이다.

일제의 식민지 수탈과 만주 침략 과정에서 불거진 한·중 농민의 갈등에다가 일본·중국 경찰의 힘겨루기가 얽힌 사건이었다. 한인 농민들에겐 생존권이 달린 문제였고, 중국인들은 한인들을 땅 빼앗으러 온 경쟁자이자 일본 대륙 진출의 앞잡이로 여겼다.

양측이 삽과 곡괭이를 든 채 난투극을 벌이다가 일본 경찰과 중국 농민은 총격전까지 벌였다. 중국인 한 명이 어깨에 총상을 입는 등 부상자가 다수 발생했으나 다행히 숨진 사람은 없었다.

<조선일보>는 호외까지 뿌리며 반중 감정 자극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조선일보>는 7월 2일자 2면에 ‘중국 농민 대거 폭동 / 삼성보 동포 수난 갈수록 심해져 / 200여 명 또다시 피습 / 완성된 수로 공사 전부 파괴’, ‘인수(引水) 공사 파괴로 금년 농사는 절망 / 파종 시에 여차(如此) 폭거’란 제목 아래 “많은 조선인이 살해됐다”고 보도했다.

 

서울과 인천에 뿌려진 조선일보 호외. 만보산 인근 삼성보의 동포들이 중국인 폭도들에게 공격받고 있다는 내용을 담았다.
서울과 인천에 뿌려진 조선일보 호외. 만보산 인근 삼성보의 동포들이 중국인 폭도들에게 공격받고 있다는 내용을 담았다.

서울과 인천에는 호외도 뿌렸다. 제목은 ‘삼성보 일·중 관헌 1시간여 교전 / 중국 기마대 600명 출동 급박한 동포 안위’ ‘300여 중국 관민이 삼성보 동포를 포위 / 사태 거익(去益) 험악화 / 기관총대 급파 전투 준비중 / 폭동 중국인 중 순경도 50명’이었다.

7월 4일자 지면 제목도 ‘중국 관민 800여 명과 200동포 충돌 부상 / 주재중 경관대(警官隊) 교전 급보로 창춘 일본 주둔군 출동 준비 / 삼성보에 풍운 점급(漸急)’ 등이었다.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사태의 위험성을 크게 부풀렸다. 한인 농민이 중국 농민에게 일방적으로 습격당했다고 서술한 전반적인 논조도 명백한 오보였다.

 

만보산 사건을 보도한 7월 4일자 조선일보 지면. 사태의 심각성을 과장한 기사가 실려 있다.
만보산 사건을 보도한 7월 4일자 조선일보 지면. 사태의 심각성을 과장한 기사가 실려 있다.

김이삼 <조선일보> 창춘지국장은 현장 취재나 추가 확인을 하지 않은 채 일본 영사관이 제공한 정보만 듣고 기사를 작성해 타전했다. 서울의 <조선일보> 본사도 그가 보낸 전보를 믿고 그대로 활자화했다.

<동아일보>는 호외를 내지 않았으나 4일자 신문에 ‘중국 농민의 폭거 / 만보산 수로 파괴 / 조선 농민 포위하고 공포 위협’이란 제목으로 기사를 실었다. 김이삼은 <동아일보> 주재기자도 겸하고 있어 비슷한 논조로 보도한 것이다.

이들 기사를 보고 흥분한 모국의 조선인들은 만주 동포들을 대신해 복수하는 마음으로 국내 거주 중국인들을 공격하고 나섰다. 그렇지 않아도 화교들이 무역과 식당 등 상권과 일자리를 잠식해 반감을 품고 있던 터여서 울고 싶은데 뺨을 때려준 격이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는 속담처럼 일제에 당해온 분풀이를 만만한 국내 화교에게 한 측면도 있었다.

국내 중국인에 대한 공격을 역사적으로는 화교 배척 사건, 혹은 배화폭동(排華暴動)이라고 부른다. 이전에도 화교를 상대로 혐오 표현을 하거나 폭행을 가하는 사건은 꾸준히 일어났으나 만보산 사건의 여파는 제노사이드(국민·인종·민족·종교 등의 차이를 내세운 집단 박해나 학살)로 치달았다.

 

만보산 사건 소식을 접한 뒤 보복 궐기대회에 참석하러 가는 평양 군중
만보산 사건 소식을 접한 뒤 보복 궐기대회에 참석하러 가는 평양 군중

“피에 주린 이리떼처럼 맞아 죽을 사람 찾아다녀”

7월 3일 새벽 2시께 도화선에 불이 붙은 곳은 화교의 첫 국내 정착지였던 인천이었다. 화교가 경영하는 율목리 호떡집 앞에 격분한 조선인이 몰려들어 돌을 던졌다. 유리창이 모두 깨졌고 잠을 자다가 놀라 뛰쳐나온 주인은 집단 구타를 당했다. 성외리, 중정, 용강정 등 7곳에서도 중국인 폭행 사건이 발생했다.

날이 밝자 조선총독부는 비상계엄령을 내려 모든 화교 상점의 영업을 중지시키고 시내에 흩어져 있던 화교들을 중국 영사관으로 대피하도록 했다. 그러나 배화폭동의 불길은 그날 밤 서울(경성)을 비롯해 전국으로 번져갔다. 출처 불명의 유언비어도 떠돌았다. 4일까지 서울에서만 170건이 넘는 폭행과 기물 파손 행위가 일어났으며 서울 주재 중국 총영사관으로 피신한 화교만 4200여 명에 달했다.

가장 큰 참극이 벌어진 곳은 평양이었다. 이곳은 화교들의 반일 성향이 강한 곳이어서 일본 경찰이 적극적인 보호 조치에 나서지 않았다는 의혹도 있다. 5일 저녁부터 손전등과 곤봉·칼·도끼 등을 든 조선인이 수백 명씩 떼로 몰려다니며 보이는 대로 화교들을 공격하고 집과 가게에 불을 질렀다. 7월 8일까지 사망자가 109명, 부상자가 163명, 행방불명자가 63명에 이르렀다. 사망자 가운데는 임신부나 갓난아이까지 있었다.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발행되던 시사신보(時事新報)는 ‘평양의 대도살(大屠殺)’이란 제목 아래 “조선 평양에서 폭동이 발생해 화인(華人) 29명이 사망하고 130명이 중상을 당하고 일본 경찰 3명도 중상을 당했다. 폭동은 5일 밤 9시에 발생해 6일 새벽 4시에 그쳤다. 한인은 화인의 가옥 100여 곳을 훼손했으며, 특별한 이유 없이 화인을 도로 한가운데로 끌고 나와 도살하고 상해를 입혔다. 폭동 당시 경찰서로 피한 자들은 부상을 면했다. 폭동이 일어난 후 경찰과 소방대는 즉시 출동해 질서 회복에 노력하고 조선인 100여 명을 체포했다”고 보도했다.

시인 오기영은 문학잡지 ‘동광(東光)’에 “군중은 완전히 잔인한 통쾌에 취해버렸다. 서너 명 내지 예닐곱 명씩 피 흐르는 곤봉을 든 장정을 앞세우고 200~300명씩 무리를 지어 피에 주린 이리떼처럼 맞아 죽을 사람을 찾아서 헤맨다. ‘여기 있다!’ 한마디의 외침이 떨어지면 발견된 중국인은 10분이 못 지나서 살려 달라고 두 손을 합장한 채 시체가 되어 버린다”라는 목격담을 실었다.

 

폭도들의 습격으로 폐허가 된 평양 화교 거리
폭도들의 습격으로 폐허가 된 평양 화교 거리

<동아일보> 사설 “허무한 선전에 속지 말라”

전국 400여 곳에서 1주일 남짓 이어진 폭동으로 중국 국민당 정부 추산 142명의 중국인이 사망했고 546명이 부상했으며 91명이 실종됐다. 조선에 있던 약 7만 명의 중국인 가운데 1만 7000여 명이 영사관에 피신했고 재산 피해도 400만 원(현 화폐가치로 320억 원)에 이르렀다. 심지어는 일본에서도 조선인들이 현지 중국인들을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소식은 중국에도 알려져 중국 농민들에게 박해받던 재만(在滿) 한인들의 신변은 더욱 위태로워졌다. 일부 한인은 창춘의 일본 영사관으로 피신했다. 즉각적인 대규모 보복 폭행은 없었지만 한동안 중국인들의 폭행과 약탈에 시달려야 했다.

한바탕 광풍이 몰아친 뒤 언론과 지식인들은 폭동의 원인이 일제의 계략에 의한 것임을 깨닫고 사태 수습에 나섰다. <동아일보>는 7일자 신문에 ‘이천만 동포에게 고합니다 - 민족적 이해를 타산하여 허무한 선전에 속지 말라’는 사설을 실었다. 신언준 상하이특파원이 “중국 국민당 정부가 일본 정부에 항의하고 국제연맹에 호소해 정당한 해결을 도모하려고 하니 보복적 행동을 피해주기 바란다”는 보고를 본사에 올린 것이 보탬이 됐다. 김이삼 창춘지국장은 <조선일보>에 정정보도문을 싣고 공개 사과문을 발표했다.

 

만보산 사건에 투입된 일본 경찰들
만보산 사건에 투입된 일본 경찰들

한용운·안재홍·송진우 등 민족지도자들은 배화폭동이 조선인 전체의 의사가 아님을 천명하고 중국 정부와 중국인에게 사죄했다. 조선의 여러 단체도 피해자를 위문하고 성금을 전달했다. 조만식과 오윤선은 평양사회단체협의회를 조직해 평남지사에게 중국인 보호 대책을 촉구했다. 서울의 화상(華商)총회는 지린성 정부에 재만 한인을 선처해 달라는 서한을 보냈다.

“일제가 만주사변에 이용하려고 민족 감정 자극”

윤치호는 7월 13일 일기에서 의심스러운 정황 증거를 네 가지 들었다. ▲김이삼은 일제 밀정으로 알려져 있다(그는 사과문 발표 다음날 살해됐다) ▲종로경찰서 형사가 <동아일보>에 “왜 중요한 사건에 호외를 내지 않았느냐”고 추궁했다 ▲서울 경찰당국이 폭동을 수습하기 위한 조선인대표자회의 개최를 허가하지 않았다 ▲유능하고 막강한 일제 경찰이 폭동을 막지 못할 이유가 없다.

7월 18일 중국 국민당은 “만보산 사건은 일본의 계획적인 음모에 의한 것이고 조선인들의 국내 폭거도 일본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사건을 조사한 주일 중국공사도 “만보산 사건은 민족 감정을 자극해 조선인과 중국인을 분열시키고 만주사변을 일으키는 데 이용하고자 한 고도의 계략이었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총독부가 만보산 사건을 조작해 발표한 점 ▲폭동을 한동안 방치하고 수일 동안 진압하지 않은 점 ▲일본인이 조선인 옷을 입고 폭동을 지휘한 점 ▲화교에 대해 교통·통신 기관을 폐쇄한 점 등을 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오보와 유언비어만 믿고 중국인들을 무차별 폭행하고 목숨까지 빼앗은 범죄는 지탄받아 마땅하다. 더욱이 1923년 간토(關東) 대지진 때 재일 조선인이 제노사이드의 희생자였다는 점을 떠올리면 역사의 비애를 느끼게 한다.

만보산 사건에 이은 배화폭동은 많은 화교로 하여금 조선을 떠나게 만들었다. 1930년 말 6만 7790명이던 국내 화교 인구는 1년 만에 3만 6780명으로 줄어들었다. 만주의 봉천군벌은 귀국 화교들을 적극 받아들였고 이들은 만주사변 이후 한인 약탈에 앞장섰다.

오늘날의 반중 정서, 누가 배후이고 무엇을 노리는 건가

2016년 한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제) 배치와 중국의 한한령(限韓令)으로 두 나라 사이가 급속히 얼어붙으면서 국내에 확산한 반중·혐중 정서가 대통령 탄핵 정국을 맞아 위험한 지경으로 치닫고 있다.

중국이 부정선거에 조직적으로 개입했다느니, 중국인들이 탄핵 찬성 집회에 대거 참여했다느니, 탄핵 반대 시위를 진압하는 경찰 가운데 중국 공안(公安)들이 섞여 있다느니, 헌법재판소 공보관과 연구관이 중국인이라느니, 주한 중국인들이 세금이나 대출이나 대학 입학 등 수십 가지나 되는 엄청난 특혜를 누리고 있다느니 하는 근거 없는 괴담들이 떠돈다.

지난 7일 서울 중구 명동의 주한 중국대사관 앞에서는 ‘멸공 페스티벌’이란 이름으로 혐중 시위가 벌어지는가 하면 14일에는 마블 캐릭터 ‘캡틴 아메리카’ 옷차림의 윤 대통령 지지자가 중국대사관 문이 열린 틈을 타 난입을 시도하다가 체포되는 일까지 있었다.

 

2월 7일 중국 명동 주한 대사관 앞에서 열린 ‘멸공 페스티벌’ 집회 현장. (연합뉴스 제공)
2월 7일 중국 명동 주한 대사관 앞에서 열린 ‘멸공 페스티벌’ 집회 현장. (연합뉴스 제공)

1세기 전 만보산 사건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미디어와 통신이 발달하고 민주주의와 인권이 신장됐음에도 걱정을 떨칠 수 없다. 일부 신문과 유튜브 등이 허위 조작 정보를 빛의 속도로 전파하고 대통령을 비롯한 여권 정치인들이 반중 감정을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극우 단체 ‘재특회(재일 조선인의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모임)’와 유사한 형태의 반중 커뮤니티들도 속속 생겨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국내 거주 중국인들을 향한 헤이트 스피치(혐오 발언)를 넘어서 중국 체류자들이나 화교 상점들이 공격받는 일이 일어날 우려가 높다. 이를 빌미로 중국 현지인들이 그곳에 사는 우리 동포들에게 테러를 가할지도 모른다.

민족이나 종교 등을 이유로 한 혐오나 공격은 그 자체로 반인륜적 범죄일 뿐만 아니라 경제와 외교와 안보 등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는 일이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만 과오를 되풀이할 수는 없다.

 

오늘날의 인천 차이나타운 모습. 거리 입구에 패루가 우뚝 서 있다. (한국관광공사 제공)
오늘날의 인천 차이나타운 모습. 거리 입구에 패루가 우뚝 서 있다. (한국관광공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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