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미국에 세워진 최초의 한인 비행학교

초대 교장은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 장군

“독립전쟁 때 일본 날아가 도쿄 쑥대밭 만들자”

나라 잃고 미국 중국 오가며 무장 독립운동 헌신

공군력이 전쟁 승패 가를 것 예견한 선구자

‘쌀의 왕’ 김종림 거액 기부로 꿈 이루어

노백린 탄생 150주년, 윌로스 비행학교 105주년

국립항공박물관에 기념 조형물, 관련 자료 전시

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독립군 하면 우리가 떠올리는 이미지는 영국 <데일리메일>의 러일전쟁 종군기자 프레더릭 아서 매켄지가 1907년경 찍은 장면이다. TV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도 등장했던 이 사진에서는 한 명만 대한제국 군복을 입고 있고 나머지 10여 명은 남루한 한복 차림으로 총을 들고 있다.

1920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 때는 체코군으로부터 사들인 기관총 등 중화기로 무장하긴 했지만 여전히 일본군에 비해 장비나 화력면에서 절대 열세여서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술을 구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군용차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이 시기에 이미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현대전의 핵심 전력인 공군을 양성하고 있었다. 1920년 미국에 비행기 조종사를 길러내는 학교를 세웠고, 이듬해 이곳 출신 비행사들을 장교로 임명했다.

 

영국 종군기자 프레더릭 매켄지가 촬영한 항일 의병의 모습. TV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도 등장했다.
영국 종군기자 프레더릭 매켄지가 촬영한 항일 의병의 모습. TV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도 등장했다.

“일당만으로 일본인 처치할 각오로 훈련하자”

비행학교는 캘리포니아주의 소도시 윌로스에 자리잡았다. 교장은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 장군이었다. 그는 7월 5일 재미동포와 현지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개교식에서 생도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우리 비행사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일본 도쿄이다. 독립전쟁이 일어날 때 우리 공군이 일본에 날아가 도쿄 시내를 쑥대밭이 되도록 폭격하는 것이다. 이 목표를 꿈에라도 잊지 말고 명심불망하여 언제나 전투출격 태세를 갖추고 훈련해야 한다. 우리는 훈련이 아니라 실전이다. 실전으로 알고 싸우자. 일기당천(一騎當千)이라는 말이 있으나 우리 비행사는 일대당만(一臺當萬)으로 일본인을 처치해야 할 각오로 훈련하고 싸워 기필코 승리하자."

2025년은 우리나라 항공 역사의 효시가 된 윌로스 한인비행학교 개교 105주년이자 ‘대한민국 공군의 아버지’ 노백린 장군의 탄생 150주년이다. 올해가 을사늑약 120주년과 광복 80주년이어서 그 의미가 더욱 새롭게 다가온다.

 

1920년에 촬영한 윌로스 한인비행학교 교관과 생도들의 모습. 사진 위에 ‘미국 가주(加州·캘리포니아주) 한인비행대, 로백린 장군 지휘 하에'라고 적어놓았다.
1920년에 촬영한 윌로스 한인비행학교 교관과 생도들의 모습. 사진 위에 ‘미국 가주(加州·캘리포니아주) 한인비행대, 로백린 장군 지휘 하에'라고 적어놓았다.

매국노를 개 취급하고 일본 장교 꾸짖은 당찬 기백

노백린은 1875년 2월 15일(음력 1월 10일) 황해도 송화군에서 태어났다(양력 1875년 1월 10일, 혹은 1월 2일생이라는 기록도 있다). 어릴 때부터 키가 크고 성격도 호탕해 무인 기질을 보였다고 한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1895년 관비장학생으로 뽑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도쿄 게이오의숙에서 신학문을 배운 뒤 일본 육군사관학교 11기생으로 입학했다.

졸업 후 일본군에서 실무훈련을 받다가 귀국해 1900년 7월 대한제국 장교로 임관했다. 육군무관학교 교관 시절에는 호랑이 교관으로 이름났다고 한다. 그 뒤 육군무관학교장, 헌병대장, 육군 연성학교장 등을 역임했다.

노백린은 비록 국운이 기울어가는 나라의 군인이었어도 기백만큼은 꼿꼿했다. 1905년 을사늑약 직후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 고관들을 초청해 베푼 연회에 참석했다가 이완용·송병준 등 매국노들에게 ‘일본의 개’란 뜻으로 “워리 워리”라고 불렀다. 이를 알아듣고 격분한 일본의 조선주차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세미치가 칼을 빼들고 덤비자 노백린도 이에 맞서 칼을 뽑아 아수라장이 됐다. 육군무관학교 교장 시절에는 하급장교인 일본군 고문관이 자신에게 경례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호되게 꾸짖어 바로잡았다는 일화도 남겼다.

 

노백린 장군
노백린 장군

노백린은 민영환·이동휘 등과 비밀결사 개혁당을 조직하는가 하면 고종의 양위를 저지하기 위해 친일파 대신 암살을 계획하기도 했다.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육군무관학교 교장직에서 물러난 뒤 안창호가 만든 흥사단과 신민회에 가입해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했다. 보성학교 교장을 잠시 맡았다가 낙향해 광무학당을 설립하고, 피혁공장 경영에 참여하며 국채보상운동에도 앞장섰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노백린은 교육운동과 실업 활동을 통해 우리 민족의 힘을 키우려고 했다. 그러나 일제는 계몽운동을 혹독하게 탄압했고, 일본 자본을 진출시켜 민족자본의 싹을 짓밟았다. 피혁회사가 경영난을 겪자 1916년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했다.

노백린은 미국 네브래스카주에서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한 박용만 장군이 하와이 호놀룰루로 옮겨 대조선국민군단을 창설했다는 소식을 듣고 하와이로 떠났다. 국민군단의 별동단 주임을 맡아 독립군 양성에 힘쓰는 한편 샌프란시스코에서 태평양시보를 창간해 독립정신 고취에 나섰다.

현지 신문도 한인비행학교 설립 소식을 대서특필

노백린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직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고 오늘날 국방장관인 군무총장도 맡았다. 파리강화회의 대표단 일원으로 선발됐으나 사퇴하고 그해 10월 미국을 다시 찾았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의 전개 과정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 앞으로는 전쟁의 승패를 공군력이 좌우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재미동포들에게 “독립군도 비행사를 양성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열정과 탁견에 감복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곽임대 총무는 어려운 재정 여건 속에서도 매달 600달러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어림없었다. 그때 노백린의 꿈을 실현시켜줄 독지가가 나타났다. 거대한 농장을 경영하던 재미동포 최초의 백만장자 김종림이었다. 1886년 함경남도 정평 태생으로 1906년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으로 농업이민을 떠나 이듬해 캘리포니아로 건너갔다.

 

'쌀의 왕'이라 불렸던 애국지사 김종림
'쌀의 왕'이라 불렸던 애국지사 김종림

철도 건설 노동자로 일하다가 1912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벼농사를 시작했는데, 현지 신문들이 ‘쌀의 왕(Rice King)’으로 부를 만큼 뛰어난 수완을 보였다. 당시 현지 관습법은 소득의 90%를 지주가 떼가는 것이었는데도 탁월한 농사기술과 1차대전의 전쟁 특수 덕분에 한 해 3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김종림은 공립협회에 가입해 공립신보 발간에 참여하고 대한인국민회 법무원과 흥사단에서 활동했다. 또 임시정부에 거액의 후원금을 보내는가 하면 대한인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의 인쇄기 구매 자금도 기부했다.

김종림은 노백린을 만나 비행학교 설립 자금으로 우선 2만 달러를 지원하고 그 뒤로도 매달 3천 달러씩 운영자금을 대기로 약속했다. 노백린은 윌로스에 활주로를 만들 16만2천㎡의 부지를 확보했으며, 학교 건물로 쓰기 위해 2년 전 폐교한 퀸트학교도 사들였다. 교관 1명과 정비사 2명을 채용하고 학생 15명도 모집해 2월 20일 수업을 시작했다.

 

윌로스 한인비행학교 설립 소식을 담은 1920년 2월 19일자 (왼쪽)과 1920년 4월 27일자 . (국립항공박물관 제공)
윌로스 한인비행학교 설립 소식을 담은 1920년 2월 19일자 (왼쪽)과 1920년 4월 27일자 . (국립항공박물관 제공)

현지 신문 <윌로스데일리저널>은 1920년 2월 19일자 1면 머리기사에 ‘한국인들이 비행장을 갖는다(Koreans to have aviation Field)’란 제목 아래 “쌀농사로 부자가 된 한국인 김종림이 한인 청년들에게 조종술을 가르치기 위해 비행장을 설치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3월 1일자에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울 조종사를 양성하기 위해 비행학교를 만든다”는 노백린의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신한민보>는 3월 19일자 신문에서 “노백린 각하가 경영하는 윌로스 비행학교에 입학해 비행술을 연습하기로 결심한 학생은 건장한 청년 24명”이라고 소개했다. <신한민보>와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은 그 뒤로도 여러 차례 윌로스 비행학교 소식을 실었다.

비행기에 태극 문양과 ‘K.A.C’ 글자 선명하게 새겨

 

윌로스 한인비행학교에서 훈련용으로 쓰인 2인승 복엽기 스탠더드 J-1을 복원한 것. 꼬리날개에는 태극 문양을 그려넣었고 동체 옆면에는 ‘대한민국항공대’의 영문 약자로 추정되는 ‘K.A.C’를 새겼다. (국립항공박물관 제공)
윌로스 한인비행학교에서 훈련용으로 쓰인 2인승 복엽기 스탠더드 J-1을 복원한 것. 꼬리날개에는 태극 문양을 그려넣었고 동체 옆면에는 ‘대한민국항공대’의 영문 약자로 추정되는 ‘K.A.C’를 새겼다. (국립항공박물관 제공)

비행기를 처음 들여온 6월 22일에는 학생이 30명으로 더 늘었다. 7월 5일에는 동포 2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정식으로 개교식을 열었다. 미국인 수석교관 프랭크 브라이언트가 시범 비행을 선보인 뒤 노백린 교장이 연설했다. 미국 레드우드 비행학교를 졸업한 박희성·이용근·한장호·이용선·이초·오림하·장병훈 등도 교관으로 합류해 후배들을 지도했다.

재미 한인들은 물론 현지인 사이에서도 한인비행학교가 화제를 모으자 일본도 촉각을 곤두세웠다. 미국의 일본 정보원은 한인비행학교 운영 현황에 관한 상세한 보고서를 조선총독부에 올렸다.

9월 9일자 보고서에 따르면 연습생은 25명이고 무선전신 장치가 있는 완전한 비행기가 5대였다. 그 가운데는 미국 항공대의 최첨단 훈련기인 스탠더드 J-1 기종도 있었다. 당시 사진을 보면 비행기 꼬리날개에는 태극 문양이 선명하고 동체 옆면에는 ‘대한민국항공대’의 영문 약자로 추정되는 'K.A.C'가 적혀 있다. 한인비행학교는 운영 시스템과 커리큘럼도 체계화해 상급 기관으로 비행가양성사(飛行家養成社)를 신설했고 학생들에게는 조종술뿐 아니라 정비, 무선통신, 군사학 등도 가르쳤다.

그러나 독립군 조종사들이 태극 무늬 비행기를 몰고 도쿄 폭격에 나서는 모습을 보겠다는 노백린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1차대전이 끝나 곡물 특수가 사라진 데다 1920년 말 대홍수가 일어나 김종림의 농장이 파산 위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윌로스 한인비행학교 건물 앞에 성조기가 휘날리고 있다.
윌로스 한인비행학교 건물 앞에 성조기가 휘날리고 있다.

윌로스 한인비행학교는 결국 1921년 4월 문을 닫았다. 한인비행학교 학생인 박희성 등 3명이 조종사 자격시험을 보다가 기체 사고로 추락해 중상을 입는 불행도 겹쳤다. 노백린은 비행학교를 재건하려고 애썼으나 자금난과 일제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임시정부로 돌아와 군무총장과 교통총장을 겸하다가 이승만 탄핵으로 박은식이 대통령에 취임하자 국무총리로 지명됐다. 그러나 신경쇠약 증세가 깊어져 1926년 1월 22일 중국 상하이에서 숨을 거뒀다. 상하이 만국공묘(萬國公墓)에 묻혔다가 한중수교 이듬해인 1993년 봉환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김종림은 1973년 1월 26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별세했다. 정부는 1962년과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과 애족장을 각각 추서했다.

육해공 3군 가운데 가장 자랑스러운 공군 역사

그래도 이들의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다. 윌로스 한인비행학교는 3차례에 걸쳐 졸업생 40여 명을 배출했다. 박희성과 이용근이 1921년 7월 비행사 자격증을 따자 임시정부는 즉각 대한민국 비행장교 참위(오늘날 소위)로 임명했다. 졸업생 중 일부는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군 장교로 활약했으며, 이초는 미국전략첩보국 소속으로 한반도 침투작전에 참가했다.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 자리잡은 노백린의 묘소.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 자리잡은 노백린의 묘소.

2020년 7월 문을 연 서울 강서구 공항동의 국립항공박물관은 1층 항공역사관에 윌로스 한인비행학교 관련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2020년에는 개교 100주년을 맞아 노백린·박희성 유족과 역대 공군 참모총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국립항공박물관 마당에 훈련용 비행기와 생도 10명의 모습을 재현한 조형물 제막식을 열었다. 지난해 6~9월에는 ‘대한이 가진 첫 비행학교’란 이름으로 특별전을 마련했다.

대한민국 공군의 창군일(創軍日)은 1949년 10월 1일이지만 윌로스 한인비행학교를 뿌리로 인정하고 있다. 공군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1919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독립군 비행학교 설립을 추진한 것을 연혁의 맨 윗줄에 올려놓고 윌로스 비행학교 설립을 포함한 태동기 역사를 소개해놓았다.

육군은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회영, 봉오동·청산리대첩의 영웅 홍범도와 김좌진, 대전자령전투를 이끈 지청천, 광복군의 이범석·김원봉·김홍일 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을 두고 있다. 그러나 창군 과정에서 만주군 출신의 친일 장교들이 주도권을 쥐면서 용공 전력 등을 이유로 해방 전 역사를 모조리 지워버린 채 1946년 1월 15일 창설된 남조선 국방경비대를 시발점으로 명시해놓았다.

 

2020년 7월 14일 서울 강서구 국립항공박물관 마당에 선보인 윌로스 한인비행학교 기념조형물. 100년 전 개교 당시 사진을 토대로 스탠더드 J-1 훈련기와 생도 10명의 모습을 재현했다. (공군 제공)
2020년 7월 14일 서울 강서구 국립항공박물관 마당에 선보인 윌로스 한인비행학교 기념조형물. 100년 전 개교 당시 사진을 토대로 스탠더드 J-1 훈련기와 생도 10명의 모습을 재현했다. (공군 제공)

해군은 비록 창군 이전에 이렇다 할 독립전쟁 역사를 찾을 수는 없으나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독립운동가 손원일 제독이 광복을 맞자마자 동지들을 규합해 1945년 11월 11일 조직한 해방병단을 모체로 삼고 있다.

공군의 창군 역사는 육군은 물론이고 해군과 비교해서도 얼마나 자랑스럽고 떳떳한가. 그 한가운데 노백린 장군과 윌로스 한인비행학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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