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과 변화를 바라는 서방 주요국 대중
그것을 수행할 힘도 의지도 없는 정당들
여론은 왼쪽으로, 정치는 오른쪽으로
“정당은 과대망상적 이기주의자들의 단체”
한국은 다를까?
2023년은 전환점이 될까
1945년은 유럽이 2차 세계대전 뒤의 평화와 경제 재건, 복지국가 건설을 향해 매진하기 시작한 해였다. 1979년은 석유가격이 급등했던 몇 차례의 오일 쇼크와 10년의 스태그플레이션 이후 국가와 기업들이 안온한 유착(협력)관계에서 벗어나 시장과 민간기업 쪽에서의 역할을 키워가기 시작한 해였다. 이처럼 어떤 해(연도)가 국가나 대륙이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전환점이 되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이제 막 시작된 2023년은 어떨까? <이코노미스트>가 새해 첫날에 서방 주요국들의 정치를 전망하면서 던진 질문이다.
왼쪽으로 가는 주요국 정치?
이 잡지는 2023년도 충분히 그런 전환점이 될만한 해라고 본다. 올해는 지난 10여년간의 저금리 시대가 끝났으며, 유럽이 전란에 휩싸인 가운데 에너지 가격과 인플레가 치솟고,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코로나 팬데믹이 휩쓸고 있는데다 이른바 G2의 하나였던 중국이 글로벌 통합체제에서 한 발 물러서기 시작한 시기에 연차가 바뀐 해다.
이런 변화들이 부유한 민주주의 국가들(주로 G7 국가들을 지칭하는 <이코노미스트>의 표현)의 폭넓은 정치적 전환의 전조라면, 그리고 지난 10여년간 중도 우파 정부들이 주로 지배해 온 이 국가들이 이에 대처하려 한다면, 정치가 왼쪽으로 움직여 갈 것이라고 이 잡지는 예상한다. 이는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우파·중도우파에서 중도좌파로
예컨대 2022년 6월 독일의 휴양도시 바바리안 알프스에 모인 G7 정상회의에 참석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만난 정상들 중에 캐나다의 미셸 트뤼도, 프랑스의 엠마뉘엘 마크롱, 독일의 올라프 숄츠, 이탈리아의 마리오 드라기 등을 이 잡지는 중도 좌파로 분류한다. 이탈리아는 7월에 드라기 총리가 사임하고 9월 총선에서 극우 조르자 멜로니가 승리하지만, G7 정상회의 당시 적어도 5명이 중도 좌파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2010년 G7 정상회의에서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 한 사람만 빼고 모두 우파 내지 중도 우파 정치인들이었다. 따라서 이를 두고 본격적인 좌선회라고 하긴 어렵겠지만, 10여년 전에 비해서는 분명히 서방 주요국들 정치가 왼쪽으로 움직여 왔음(이탈리아라는 예외가 있지만)을 보여주는 지표가 될 수도 있겠다.
국민 절반 이상이 기업에 부정적, 개혁 희망
이런 왼쪽으로의 움직임이 초국가적 저류를 이루고 있다는 걸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지표로, 이 잡지는 퓨 리서치센터가 지난해에 주요국들 국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제시한다. 은행 등 금융기관들, 대기업, 테크(기술)기업 등에 대해 최근 3년간(2019년 8월~2022년 10월) 이들이 국가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는지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는지를 물었는데, 미국의 경우 은행 등 금융기관들에 대한 긍정적인 응답이 3년 전의 49%에서 40%로 줄었다. 대기업에 대한 평가는 더 낮아서 긍정적인 응답이 같은 기간에 35%에서 25%로 줄었다. 테크기업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응답이 상대적으로 많았으나, 이 또한 60%에서 50%로 내려갔다.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 프랑스, 독일 응답자들도 절반 이상이 기업에 대해 부정적인 응답을 했고, 자국의 경제에 중대한 변화 또는 전면적인 점검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처럼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응답한 사람들 중의 다수가 자신들을 좌파로 인식했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지적했다.
가장 큰 걱정거리는 기후위기
잡지는 응답자들이 이런 변화를 바라는데에는 기후위기에 대한 우려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는 실제 조사 결과로도 확인할 수 있다. 퓨 리서치가 19개국에서 벌인 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4분의 3(75%)이 기후위기를 가장 큰 위협으로 인식했다. ‘당신의 나라에 다음과 같은 사항들이 큰 위협이라고 보느냐 아니냐’를 묻는 질문에 이처럼 4명 중에 3명이 큰 위협이라고 응답했고, 그 다음으로 온라인 거짓정보 확산 70%, 타국의 사이버 공격 약 65%, 세계경제 상황 60%, 감염병 확산 60% 순이었다. 서방 주요국들 국민 대다수가 코로나 팬데믹이나 세계경제보다 기후위기를 더 큰 위협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인구 구성의 변화-생산가능연령 비율 감소
왼쪽으로의 좌표 이동, 즉 개혁이 필요한 또 한 가지 이유는 인구 구성의 변화다. 잡지는 지난 수십년간 세계인구 중 생산가능연령 비율(점유율)이 커졌다가 다시 줄어들고 있는 점을 광범위한 변화로 가는 구조적 전환이 필요한 이유로 들었다. 그 기간에 생산가능연령 비율이 어린이와 은퇴자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늘었고, 이것이 세계경제에 이른바 ‘인구배당효과’(demographic dividend)를 가져다 주었다. 생산가능연령 비율의 증가는 이자율과 임금을 내리도록 압박했고, 소득 불평등을 키우면서 성장 속도를 높이고 대기업에 대해 좋게 평가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런 추세가 때로는 빠르게 바뀔 수 있다. 생산가능연령 점유율은 지난 10년간 떨어졌고, 이자율은 오르기 시작했다. 기업에 대한 평가도 내리막길이다. S&P 500개사의 조정을 거친 주가 수익률을 보면, 2021년 말에는 39%였으나 2022년 12월에 27%로 떨어졌다.
정당들이 정치를 바꿀 의지·권한·힘이 없다
이런 변화들은 민주주의 정치에서 중대한 방향 전환으로 읽을 수도 있으나, 실제로 그런 전환이 일어나기에는 여론이나 경제적 변화가 불충분하다. 과거에 그런 전환은 정당들이 새로운 생각(신념)을 옹호했을 뿐만 아니라 이상을 현실로 바꾸기 위해 필요한 타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의 정당들은 그렇게 할 권한, 힘, 의지가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지적한다.
줄어드는 득표율, 득표차
마거릿 대처와 로널드 레이건이 1980년대 영국과 미국 선거에서 압승했지만 그런 일은 이제 드물어졌다. 1980년과 1996년 사이에 미국 대선의 승자들은 거의 10%포인트 정도 차로 이겼다. 하지만 2000년에서 2020년 사이에 그것은 2.6% 포인트 이하로 좁혀졌다. 게다가 바이든은 분열된 정부 관리문제까지 안고 있다. 1945년에서 1960년까지 영국에서 집권당은 평균 48%를 득표했으나 2010년 이후에는 40% 이하로 줄었다. 대다수 부유한 민주국가들에서 투표율은 급락했다. 정당들은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설사 받더라도 그것은 지속되지 않는다. 2022년 4월의 프랑스 대선에서 마크롱은 우익 마린 르펜을 59% 대 41%로 확실하게 이겼다. 그러나 그 두 달 뒤 치러진 총선에서는 마크롱의 여당은 야당보다 적은 의석을 얻었고, 르펜의 국민연합은 다른 어떤 정당보다 더 많은 의석을 추가했다. 마크롱도 바이든처럼 정부의 분열 탓에 힘을 잃었다.
정당, 대중운동에서 편협한 이해집단들 단체로
1960년대의 유럽 정당들은 수백만 명의 당원을 지닌 대중운동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영국은 의회 의석을 지닌 6개 정당(북아일랜드는 빼고)의 총 당원수가 84만 6000명으로, 왕립 조류보호협회 회원수보다 적다. 유권자들은 더 변덕스러워졌고, 정당을 정치적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줄었다. “우리의 당파적 충성은 정부가 무슨 일을 해야 할지에 대한 원칙적인 견해보다는 생활양식(라이프스타일)이 됐다”고 테네시 주 내쉬빌의 밴더빌트 대학 로버트 탤리스는 말했다. 정당들은 폭넓은 사회운동에 뿌리를 둔 것이라기보다는 편협한 이해집단들-때로는 과대망상적 이기주의자들-의 자기표현(expressions)이 됐다.
파시즘 출현 예고
대규모 당원의 부재와 점점 더 표차가 근소해지는 선거라는 현실에서 대다수 민주 국가들의 정당들은 지지자들을 가능한 한 행복하게 하고 위험을 감수하지 않게 해 주는 쪽으로 움직이게 된다. 이건 정치의 새로운 전환을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뉴스가 아니다. 더 폭넓은 변화 욕구는 있는 것 같지만 정부와 야당들은 그것을 활용하는 데 조심스러워할 것이다. 이것이 <이코노미스트>의 진단이다.
결국 희망이 없다는 얘긴가? 다수 대중은 분명히 변화와 개혁을 바라고 있는데, 기성 정당들이 변화와 개혁을 감행할 의지도 힘도 없다면, 매우 위험한 상황이다. 서방 주요국들 정치가 왼쪽으로 가는 듯 보이는 것은 대중들의 그런 욕구에 영합하고 추수하는 것일 뿐, 그것을 구조적 전환으로 선도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힘과 의지를 과시하는 자칭 개혁적 선동가가 출현하면 변화를 바라는 대중들의 지지가 그쪽으로 일거에 쏠리는 현상을 지난 역사는 거듭 보여 주었다.
대중은 왼쪽으로 가기를 바라지만 정치는 오른쪽으로 가고 있다. 서방 주요국들의 이런 정치상황은 파시즘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르펜, 멜로니를 비롯한 우파와 극우파들이 급속히 세를 확장해 가고 있는 유럽 상황이 불길하다. 유럽만이 아니다. 전쟁까지 감행한 푸틴의 러시아가 그렇고, 극우쪽으로 전락해 온 일본 등 동아시아, 그리고 민주·공화 양당 모두 트럼프주의자들이 설쳐대는 미국도 불길하다. 핵전쟁까지 입에 올리기에 이른 남북한이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2023년, 새로운 출발점이 될까 파국의 시작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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