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이 바꾼 유럽지정학

독일, 러시아·중국 의존 경제모델 수정

프랑스, EU 확장 쪽으로 외교 급선회

마크롱-숄츠 제휴, 'EU 운영방식' 공조모색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왼쪽)과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가 6일(현지시각) 독일 포츠담 레스토랑에서 만찬을 앞두고 포옹하고 있다. 2023.06.07. AFP 연합뉴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왼쪽)과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가 6일(현지시각) 독일 포츠담 레스토랑에서 만찬을 앞두고 포옹하고 있다. 2023.06.07. AFP 연합뉴스

우크라이나군의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됐다는 보도들이 흘러나오고 있는 가운데, 지난 6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베를린 근교의 포츠담에 있는 올라프 숄츠 독일총리의 사저를 찾아가 3시간여에 걸쳐 얘기를 나눴다. 넥타이 풀고 포츠담 거리를 함께 산책하고 저녁도 함께 먹었다. 마크롱 대통령은 7월 초에는 독일을 국빈방문하기로 예정돼 있다. 프랑스 대통령이 독일을 국빈방문하는 것은 27년만이며, 숄츠 총리가 외국 원수를 포츠담 사저에서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6일은 2차 세계대전 때인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이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를 탈환하기 위해 벌인 노르망디 상륙작전 기념일이었다. 그때 연합국의 주적이었던 독일의 총리를 2차대전의 전쟁양상을 바꾼 노르망디 상륙작전 디데이(D-Day) 기념일에 찾아간 것이다. 포츠담은 1845년 7월 미국 영국 중국 소련 등 연합국 주요 정상들이 모여 전후 국제질서 재편을 논의한 곳이기도 하다. 지금의 ‘주적’은 그때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러시아(당시는 소련)다.

마크롱의 7월 독일 국빈방문은 독일 쪽이 1963년에 체결된 엘리제 조약 60년을 맞아 초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엘리제 조약은 역사적으로 앙숙이던 프랑스와 독일이 과거사를 극복하고 협력해 나가기로 약속한, 양국 화해·협력의 역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 조약이다.

굳이 이런 역사적인 날들을 잡아 두 나라 정상들이 거듭 만나는 것과 최근의 주요국들간 관계의 극적인 변화 사이에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 관계변화를 촉발하고 추동한 것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우크라이나 전쟁)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왼쪽)과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가 6일(현지시각) 독일 포츠담의 레스토랑에서 만찬을 즐기고 있다. 2023.06.07. 로이터 연합뉴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왼쪽)과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가 6일(현지시각) 독일 포츠담의 레스토랑에서 만찬을 즐기고 있다. 2023.06.07. 로이터 연합뉴스

유럽을 바꾸는 우크라이나 전쟁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벌이고 있는 전쟁이 유럽을 바꾸고 있다.'

<이코노미스트> 지난 7일 온라인판 기사의 제목이다. 유럽의 동북부 변경지역인 핀란드와 스웨덴이 오래 견지해 온 중립적 지위를 버리고 구미 안보동맹체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담하고 있다. 쿠르드족 문제로 빚어진 튀르키예와의 갈등으로 스웨덴의 가입이 늦춰지고 있으나 시간문제일 뿐이다. 우크라이나와 몰도바는 27개국을 회원으로 거느린 유럽연합(EU)에 가입할 ‘후보국’ 지위를 얻었다.

변화는 유럽의 역사적 중심무대라 할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앞서 살펴봤듯이 두 나라 정상들은 최근 들어 이례적이라 할 정도로 자주 만나고 있다. 이는 두 나라 모두 각기 기존의 국가 기본전략 내지 외교전략이 직면하고 있는 중대한 도전에 대한 응전일 수 있다.

지속 불가능한 독일의 기존 경제모델

독일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값싼 러시아의 에너지와 중국에 대한 수출을 기조로 한 기존의 경제모델이 더는 그대로 작동할 수 없게 됐다. 러시아 천연가스 수입은 중단됐고, 중국에 대한 높은 수출 의존 체질도 유지하기 어렵게 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뒤 수십 년 간 군사력 증강에 거부감을 갖고 있던 독일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뒤에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지원을 꺼렸으나 최근 자국 레오파르트 전차를 지원하기로 하는 등 군사물자 공급을 늘리고 있다. 전범국가로서의 이미지를 의식해 온 독일로서는 대변신이라고 할 만하다. 그와 동시에 1000억 유로(1070억 달러)를 추가 투입해 자국의 재무장을 서두르고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숄츠 총리가 선언했던 ‘자이텐벤데’(역사적 전환)가 제대로 효과를 내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독일은 분명히 변하고 있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진단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왼쪽)과 주자나 차푸토바 슬로바키아 대통령이 31일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 대통령궁에서 회담한 뒤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2023.05.31. AFP 연합뉴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왼쪽)과 주자나 차푸토바 슬로바키아 대통령이 31일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 대통령궁에서 회담한 뒤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2023.05.31. AFP 연합뉴스

프랑스, EU확장 쪽으로 급선회

프랑스의 전환은 눈에 잘 띄진 않지만 변화의 강도는 독일 못지 않다. 프랑스는 수출의존도가 높지 않고, 비중이 큰 핵 발전(원전) 덕에 러시아 천연가스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경제모델에서 큰 변동이 일어나고 있지 않다. 프랑스가 기존의 기본전략을 획기적으로 바꾸고 있는 쪽은 유럽의 국경과 동맹관계, 그리고 안보분야다. 전통적으로 프랑스는 EU의 확장에 미온적이었다. 중부유럽과 동부유럽 국가들을 프랑스는 서유럽보다 한 수 아래로 취급했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당시 EU의 동부유럽쪽 회원국들이 이를 지지했을 때도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 정부는 반대했다. 2019년에는 알바니아와 북마케도니아의 EU 가입도 반대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이런 유럽에 구조적 변화를 몰고 왔다. 그 중요한 변화 가운데 하나가 프랑스가 EU확장에 미온적이던 자세를 버리고 적극적인 자세로 돌아선 것이다. 지난 6월 독일, 이탈리아 정상들과 함께 우크라이나 키이우를 방문했을 때 마크롱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 의사와 함께 몰도바의 EU 후보국 지위 부여를 지지했다. 알바니아와 북마케도니아의 EU 가입 거부 입장도 철회했다.

5월 31일 슬로바키아에서 한 연설에서는 EU를 “가능한 한 빨리” 확장해야 한다는 선언까지 했다. “문제는 우리가 확장해야 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확장하느냐다.” 중동부 유럽인들 앞에서 과거에 그들의 EU 가입을 탐탁치 않게 여겼던 프랑스의 대통령이 그 과거정책이 잘못됐다는 걸 고백하고 적극적으로 그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 연설은 유럽의 정치공동체를 더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마크롱의 구상이 실은 EU의 확장을 저지하기 위한 계략이라고 의심하던 사람들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는데 기여했다.

EU와 이웃나라 등 총 44개국 정상들이 매년 2차례 모이기로 한 대화의 자리가 6월 1일 두 번째로 몰도바에서 열렸다. 우크라이나 국경에서 20㎞ 떨어진 곳에서 열린 그 대화의 자리는 러시아에 대한 최전선국들인 우크라이나와 몰도바에 대한 지지와 지원을 과시하는 자리였다. 프랑스가 이런 일에 앞장서고 있다.

프랑스는 EU의 국경(영역)이 동쪽으로 더 확장돼야 한다고 본다. 러시아의 ‘영토 수정주의’”(마크롱의 보좌관 알렉산드르 아담)가 “이제 EU와 러시아 사이에 안정적인 그레이존(완충지대)은 더 이상 있을 수 없다”는 “지정학적 불가피성”을 증대시켰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왼쪽)과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가 20일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가 열린 일본 히로시마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마케팅 및 광고 금지. 우크라이나 대통령실 제공] 2023.05.21. AFP 연합뉴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왼쪽)과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가 20일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가 열린 일본 히로시마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마케팅 및 광고 금지. 우크라이나 대통령실 제공] 2023.05.21. AFP 연합뉴스

“뇌사상태의 나토” 관점 버린 마크롱

마크롱은 유럽이 자기방어에 좀 더 힘을 쓰고 미국에겐 좀 덜 의존하는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노선을 취하기를 바란다. 이는 지난 4월 중국 방문 뒤에 유럽은 미국의 속국(vassal state)이 아니라고 한 그의 발언을 통해서도 분명히 드러났다. 내년 선거를 앞두고 그는 그것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유럽인들은 마크롱의 그런 발언들이 그러잖아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더욱 불안해진 유럽에 대한 미국의 안보공약을 약화시키지 않을까 걱정한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이 바꾼 유럽대륙의 새로운 지정학은 오히려 프랑스가 더욱 더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압박한다. 슬로바키아 수도 브라티슬라바에서 마크롱은, 7월에 리투아니아 수도 빌니우스에서 열릴 나토 정상회의에서 우크라이나에게 나토 회원국이 되는 길을 열어 주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를 두고 <이코노미스트>는 2019년에 이 잡지가 마크롱을 인터뷰했을 때 그가 해서 유명해진 “나토가 뇌사상태에 빠졌다”는 말을 떠올리면서, 이제 마크롱이 완전히 생각을 바꿨다고 지적했다.

지금 프랑스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우크라이나의 재건과 안전보장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6월 19일에는 파리에서 유럽 국방장관들이 모여 유럽의 방공 및 “심층타격”(deep-strike) 능력에 대해 논의할 예정인데, 마크롱은 그 자리에서 프랑스의 핵 억제력에 대한 논의도 하자고 제안했다.

프랑스·독일의 동의는 EU에 필수불가결

독일과 프랑스는 지금 각자 나름의 전략으로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면서 새로운 유럽을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지 고심하고 있다. 독일은 말없이 조심스럽게, 다른 한쪽은 위험을 무릅쓰고 거리낌없이 활달하게. 두 나라 리더들은 그러면서 서로 상대방 의중을 읽어내기에 부심하고 있다. 두 나라는 유럽의 확장에는 뜻을 같이하지만, 더 큰 확장으로 이어질 EU 내부 운영의 새로운 룰(규칙)을 만들기 위해 치열한 논의를 벌이고 있다. 둘 사이에는 원자력발전, 군사장비 조달, 재정 규칙 등에 대해서는 여전히 차이가 있다. 독일은 미국처럼 우크라이나와 나토에 대해 여전히 조심스럽다. 이런 독일은 마크롱이 종종 거리낌없이 내뱉는 발언 때문에 화를 내고, 프랑스는 숄츠 연립정부의 혼란과 느려터진 대응에 좌절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그런 그들에게 유럽대륙 운영이 파리와 베를린 관계를 훨씬 더 넘어서는 광폭 차원의 것임을 일깨웠다. 그 덕에 독일과 프랑스는 서로 상대방에 대한 불만과 초조, 안달하는 일에 시간과 신경을 덜 쓰게 됐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얘기한다. 그러면서 이런 프랑스와 독일이 동의하지 않으면, EU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두 나라는 대다수 현안들에 대한 생각이 다르지만, 그 차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는 공유하고 있다면서, 그들의 그런 능력이 새로운 유럽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내다본다.

 

 G7 정상회의 참관국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21일히로시마 G7 정상회의장인 그랜드프린스호텔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에 앞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인사하고 있다. 2023.5.21. 연합뉴스
 G7 정상회의 참관국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21일히로시마 G7 정상회의장인 그랜드프린스호텔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에 앞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인사하고 있다. 2023.5.21. 연합뉴스

만일 프랑스·독일이 한국·일본 처지라면

유럽의 프랑스와 독일, 동아시아의 한국과 일본이 단순 비교대상이 될 순 없지만, 오랜 악연에 찌든 이웃국가들이 각기 상호관계를 어떻게 풀어가는지 그 유사점보다는 차이점을 뚜렷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양자 관계의 비교는 유효할 수 있다.

독일과 프랑스는 서로를 침공하고 지배한 복잡한 역사를 갖고 있지만, 한국과 일본처럼 ‘독도문제’와 같은 ‘영토분쟁’을 어떻게든 해소했고, 서로에게 저지른 과거사 ‘악행’들을 인정하고 배상하고 화해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했다. 독일과 프랑스는 여전히 서로 간단치 않은 복잡한 관계지만 적어도 그런 차원의 기본문제들은 넘어선 대등한 관계다. 그래야 경쟁과 협력도 미래 희망 추구도 가능하다.

최근의 ‘한일관계 복원’이라는 윤석열 정부의 정치 캠페인은 그런 기본 요건들을 완전히 무시해 버렸다. 단순하게 생각해서, 만일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아직도 ‘독도문제’와 같은 ‘영토분쟁’이 존재하고, 과거 침략·강점 역사에 대해 어느 한쪽이 사죄·배상은커녕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며, 착취와 능욕을 당한 희생자들을 오히려 조롱하고, 한쪽의 우려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고 원전에서 나오는 방대한 양의 방사능 오염수를 일방적으로 바다에 버리겠다고 고집하는 상황이 현재형으로 진행되고 있다면, 두 나라 사이에 제대로 된 화해니 협력이니 발전적인 미래 같은 얘기를 독일이나 프랑스인인들 할 수 있겠는가. 입에 올리기조차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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