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내년부터 첨단 기술 중국 투자 통제
중국 기술 자립 박차…반도체 턱밑 추격
대중 반도체 수출 감소로 한국 기업 휘청
트럼프 당선 땐 반도체 지원 축소 가능성
국익·기업 피해 최소화할 경제 외교 절실
미국과 중국의 기술 패권 전쟁이 더욱 격해질 것으로 보인다. 미국 정부는 반도체와 인공지능(AI), 양자컴퓨팅과 마이크로전자기술 등 최첨단 기술 분야에서 미국 자본의 중국 수출을 통제하는 내용의 ‘최종 규칙’을 28일(현지시간) 공개했다. 지난해 8월 조 바이든 대통령이 서명한 행정명령의 후속 조치다. 정식 명칭은 ‘우려 국가 내 특정 국가 안보 기술 및 제품에 대한 미국 투자에 관한 행정명령 시행을 위한 최종 규칙’이다. 여기서 우려 국가는 중국을 지칭한다.
미국, 최첨단 기술 분야 대중국 수출 통제 강화
문제는 미국의 압박이 커질수록 중국의 기술 자립도 높아진다는 점이다. 중국은 막대한 자금과 인력을 첨단 기술 분야에 투입하고 있다. 반도체 분야만 해도 미국의 견제 수위가 높아지면서 범용 제품의 기술 수준은 빠른 속도로 높아지고 있다. 이는 삼성전자가 범용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점유율이 줄고 있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중국은 한국 반도체의 최대 시장인데 낮은 사양 제품은 중국산으로 대체되고 있다. 그 결과 한국 반도체 수출에서 중국 비중은 점점 줄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기술 패권 전쟁은 곧 치러질 미국 대선 이후 더 격화될 가능성 높다. 누가 당선돼도 미국 우선주의에 입각해 중국으로 첨단 기술이 넘어가는 것을 막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되면 불확실성이 더 커질 수 있다. 조 바이든 정부가 추진한 반도체 지원 정책을 뒤엎을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밝히고 있어서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미국에 투자하는 외국 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에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해왔다.
미·중 기술 전쟁, 한국 기업에 불똥 튈 수도
내년 1월 2일부터 시행에 들어가는 ‘최종 규칙’은 미국 정부가 정한 최첨단 분야에서 중국에 투자하려는 기업은 사전에 세부 계획을 재무부에 신고해야 한다. 국가 안보 위협을 초래하는 기술 또는 제품과 관련된 특정 거래가 여기에 해당한다. 중국이 첨단 기술을 활용해 군사적 역량을 키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취지라는 게 미국 정부 설명이다. AI와 첨단 반도체, 양자 기술 등은 군사용 암호 해독 컴퓨터와 프로그램, 첨단 전투기 등에 활용될 수 있다. 최종 규칙을 위반하면 민사, 형사 처벌은 물론 벌금도 부과된다. 재무부는 또 금지된 거래를 무효화하고 투자금 회수 등을 명령할 수 있다.
우리 정부는 최종 규칙이 미국 기업과 자본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 한국 기업에는 영향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불똥이 어디로 튈지는 알 수 없다. 우선 미국 기술이 적용된 첨단 제품의 중국 수출이 제한받을 수 있다. 미국 수출 통제로 중국 반도체 산업이 위축되면 한국의 대중국 반도체 수출도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더 주목해야 할 대목은 중국의 반도체 기술 자립 속도가 빨라질 것이라는 점이다. 중국이 자체 생산한 반도체 비중을 키우면 한국 기업 매출이 감소할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 반도체 기술 자립에 자금·인력 쏟아부어
연합뉴스에 따르면 중국은 지난 5월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3440억 위안(약 66조 4000억 원)에 달하는 국가집적회로산업투자기금 3차 펀드를 추가로 조성했다. 이 자금은 고사양 반도체 기술 개발과 AI 반도체 연구개발에 집중 투입될 것이다. 화웨이와 알리바바, 텐센트, 바이두 등 중국을 대표하는 정보기술(IT) 기업들도 반도체 기술을 기반으로 독자 개발한 제품을 속속 선보이고 있다. 화웨이는 중국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업체 SMIC가 만든 첨단 프로세서를 내장한 스마트폰을 공개해 눈길을 끌었다. 미국이 첨단 반도체 대중국 수출을 통제하는 상황에서 나온, 자국산 반도체를 탑재한 스마트폰이기 때문이다. 화웨이 스마트폰은 삼성전자와 애플 제품과 비교해 성능이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다.
중국 반도체 산업 성장은 위협적이다. 대만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웨이퍼 기준으로 세계에서 중국 기업이 차지하는 D램 생산 용량 비중은 2022년 4%에서 올해 11%로 2배 이상 증가했다. 이런 추세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생산 수율이나 품질 측면에서 아직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반도체 기술 개발을 전폭 지원하고 있어 추격 속도는 더 빨라질 게 분명하다.
중국 기업들이 범용 반도체 공급량을 늘리면서 한국 기업의 중국 수출 비중은 줄고 있다. 동아일보가 한국무역협회 수출입 통계를 바탕으로 올 1~9월 중국이 한국 메모리 반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분석한 결과 2012년 이후 처음으로 30%대로 내려앉았다. 올해 3분기 전체 수출 실적이 예상보다 저조했던 것도 대중국 반도체 수출 물량이 큰 폭으로 감소한 영향이 작지 않다.
미국 정부의 반도체 보조금에 딴지 건 트럼프
미국 대선 이후 한국 반도체는 더 큰 시련에 봉착할 수 있다. 트럼프가 당선되면 바이든 정부에서 정해진 보조금이 축소될 가능성도 있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트럼프는 지난 25일 한 언론과 인터뷰하며 바이든 정부의 반도체 지원법을 비판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거래는 정말 나쁘다. 단 10센트도 내놓지 않아도 된다. 내 말은 매우 높은 관세를 부과해 그들이 와서 반도체 기업을 공짜로 설립하도록 하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오는 2026년 완공을 목표로 약 170억 달러를 투자해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에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다. 투자 규모를 450억 달러로 확대할 것이라는 계획도 발표했다.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주 웨스트라피엣에 38억 달러 이상을 투입해 반도체 공장을 건설할 방침이다. 이에 미국 정부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각각 64억 달러와 4억 5000만 달러의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물론 미국 의회를 통과한 반도체 지원법을 쉽게 폐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가 지향하는 정책이 바이든 정부와 너무 달라 트럼프가 당선되면 기업들은 큰 혼란을 겪을 수 있다.
위기의 한국 반도체 구할 경제 외교 시급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28일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미국 대선과 주요국 경기, 중동 사태, 주력 산업 업황 등 대외 불확실성이 상존하는 만큼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글로벌 경쟁 구도와 시장수요 전환기에 직면한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을 근본적으로 제고하는 데 힘쓰겠다”고도 했다. 외교부도 이날 경제안보외교 자문위원회를 열고 미국 대선 동향과 경제 안보 분야 대응 방향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미국 대선 이후 격화될 미·중 기술 패권 전쟁은 그렇지 않아도 경쟁력을 잃고 있는 한국 반도체 산업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 기업들은 기술력을 높이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하겠지만 민간 차원에서 대응하기 힘든 사안도 있다.
문제는 윤석열 정부가 중국을 소홀히 하고 미국에만 치중하는 일방적 외교를 펼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대선에서 누가 당선되든 자국 우선주의를 내세울 게 뻔하다. 미국 눈치만 보다 보면 한국 기업들 피해가 커질 위험이 있다. 말로만 미국 대선 이후 불확실성에 대응하겠다고 할 게 아니라 한국 기업과 국익을 위한 경제 외교의 틀을 다시 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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