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탄발전소 노동자가 탄소배출 주범인가?

라이더노동자도 한통속이라 비난할 수 있나?

그들 노조를 기후연대에서 배제하는 건 옳지 않아

요는 두 운동 사이의 교집합을 만들어내는 일

박태주 60+기후행동 운영위원
박태주 60+기후행동 운영위원

지난 글(탄소중립 거버넌스 앞에서 갈라진 양대 노총’)에서 노동조합과 기후단체 사이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노동운동과 기후운동은 다르다. 두 운동은 정체성이나 지향도 다르고 조직의 구성이나 운영방식에서도 차이가 난다. 가령 노동운동이 이해지향적이라면 기후운동은 가치지향성이 강하다. 다시 말해 노동운동이 특정 계급의 요구나 이해관계를 중시한다면 기후운동은 시민운동으로서 모든 시민을 위한 가치를 중시한다. 노동조합은 총회(대의원회) - 중앙위원회 - 위원장 – 상무집행위원회 등으로 이어지는 수직적인 조직체계와 관료적인 운영방식을 갖고 있다. 이에 반해 기후단체의 그것은 훨씬 수평적이고 민주적이다(물론 일반화할 수 있는 진술은 아니다). 노동운동과 기후운동의 만남을 ‘운동 내의 동맹’(within-movement coalitions)이 아닌 ‘운동을 가로지르는 동맹’(cross-movement coalitions)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이익지향적 노동조합과 가치지향적 기후단체의 만남

노동조합과 기후단체 사이의 관계가 그리 돈독한 것도 아니었다. 정치적 전망이나 개혁의 비전을 공유하지 못한 채 각기 개별 운동으로 존재해 온 탓이다. 때로는 반목이 앞서기도 했다(실제로 적지 않은 시민운동가는 노동운동을 통해 사회운동에 입문했다가 노동운동의 한계를 느껴 시민운동으로 떠났다). 그만큼 노동조합을 바라보는 기후단체의 시선에는 긴장과 경계가 깔려있다.

민들레에 실린 유정길 운영위원(60+기후행동)의 글이 그런 예다(‘노동은 기후위기 성장동맹? 운동 동력·주체 재배치해야’). “노동운동이 주장하는 정의로운 전환은 일자리만 강조하는, 이념·조직의 비전이 없는 왜소한 운동”이며 이러한 일자리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노동운동은 ‘자본-노동 중심의 산업사회’를 유지해 온 세력이 되었다.”

요는 노동자는 임금의 인상과 고용의 안정을 위해 성장을 지지함으로써 기후위기를 조장한 것은 물론 체제유지세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낯선 지적은 아니다. 어떤 학자는 노동을 자본, 국가와 함께 ‘성장동맹’(economic growth alliance)의 일원이자 생산의 쳇바퀴(treadmill of production)를 밀고 가는 주역이라고 말한다(Mayer, 2009).

 

20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경기도청 앞에서 기후위기경기비상행동, 경기환경운동연합 등 환경단체 관계자들이 석탄으로 생산된 전기를 거부하고 재생에너지 확충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4.8.20. 연합뉴스
20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경기도청 앞에서 기후위기경기비상행동, 경기환경운동연합 등 환경단체 관계자들이 석탄으로 생산된 전기를 거부하고 재생에너지 확충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4.8.20. 연합뉴스

자본과 한통속인 동시에 자본에 맞서 싸우는 노동의 모순

굳이 반론을 제기할 할 생각은 없지만 몇 가지 의문은 있다. 단일공장으로 국내 탄소배출의 13%를 내뿜는 탄소공장, 포스코의 반기후적 행태는 포스코 노동자가 책임을 질 일일까. 현대차가 토요타와 폭스바겐에 이어 세계 3위의 완성차 메이커로 자리를 잡았다면 이는 자랑인가 부끄러움인가. 현대차 노동자는 그런 회사에 고용되어 월급을 받는다는 걸 부끄러워 해야 할까. 석탄화력발전소가 탄소를 배출한다고 거기서 일하는 노동자를 탄소배출의 주범으로 낙인찍을 일이 아니듯이 휘발유 오토바이로 아스팔트를 달려 음식을 배달하는 라이더 노동자를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유정길 위원의 말이 틀렸다고 말하기보다는 유정길 위원이 노동운동의 한 측면만을 보고 있다는 걸 지적해야 할 것 같다. 노사관계는 저항과 협력이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모순의 동네다. 저항과 협력의 상당 부분이 임금과 고용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노동이 고용과 임금을 위해 자본과 한통속이 된다는 주장의 이면에는 노동이 자본의 착취에 저항하고 투쟁한다는 사실도 존재하는 것이다.

노동운동이 지닌 모순은 그 지향에서도 드러난다. 흔히 노동조합이 신자유주의의 기표인 경쟁과 공정으로 포장된 능력주의, 그리고 각자도생을 내면화하면서 신자유주의의 포로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노동조합은 전통적으로 사회의 한 부분으로서 ‘기득권의 유지’ 못지않게 ‘사회정의의 칼’이라는 역할도 맡아왔다. 한국의 노동조합이 기업별 체제에 갇혀 있으면서도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에서 보듯 사회개혁을 위한 투쟁을 외면한 것은 아니다.

연대는 상대방의 투쟁을 자신의 투쟁에 통합하는 일

이러한 모순은 노동조합이 경제적 조합주의에 매몰된 조직이라는 해석을 넘어 사회개혁의 담당자로 나설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런 점에서 유정길 위원의 인식은 기후단체의 연대에서 노동조합을 배제함으로써 노동조합은 물론 기후운동의 역량까지 훼손할 수 있다. 노동운동과 기후운동은 연대를 통해 기후위기의 파괴적인 영향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한다는 공통의 지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노동조합과 기후운동은 어떻게 손을 잡을 수 있을까.

연대는 조직과 조직의 만남이다. 연대는 다름을 전제로 한다. 연대의 움직임은 상대방을 인정하고 공동의 가치를 발견함으로써 시작된다. 또한 전면적인 만남이 아니라 부분적인 만남이고 언제든 해소할 수 있는 만남이다.

“(사회운동의 연대는 각자의 요구들을) 통일시키는 것이 아니라 서로 교차시키는 것이다. 노동조합주의, 생태주의, 대안 세계화주의, 페미니즘, 반인종주의 등의 동맹을 조직해내기 위해서는 각각의 투쟁 주체들이 다른 투쟁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투쟁에 통합해 나감으로써 … 싸움의 모든 차원을 구체적으로 접합해 나가야 한다”(다르도 외, 『내전, 대중혐오, 법치』)

결국 연대는 접합(articulation)이라는 이야기다. 연대는 상대방의 투쟁이 갖는 정당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자신의 투쟁에 통합함으로써 두 운동 사이의 교집합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가령 노동조합이 기후위기의 해결을 자신의 의제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면 기후운동은 정의로운 전환, 특히 일자리의 보장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10일 오후 여의도 산업은행 인근에서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라이더유니온 관계자들이 배달라이더 생존권 보장과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3.5.10. 연합뉴스
10일 오후 여의도 산업은행 인근에서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라이더유니온 관계자들이 배달라이더 생존권 보장과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3.5.10. 연합뉴스

​​​​​​​기후위기 해결과 일자리 보장을 통합하는 녹색 노동운동

노동운동은 정의로운 전환을 넘어 노동운동의 녹색화, 나아가 녹색 노동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여기서 기후위기의 해결과 일자리의 보장은 상호 충돌하는 이슈가 아니라 하나로 통합된다. 탄소중립의 지체가 일자리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탄소중립의 조기실현이 에너지 경쟁력을 높여 산업전환을 이끌고 일자리를 만든다.

“36년까지 28기의 석탄화력발전소의 폐쇄로 인한 8418명, 단 한 명의 해고도 없는 발전노동자 총고용보장 쟁취하자!” 지난 9월 7일, 기후정의행진에서 발전 비정규 노동자들이 서울 강남대로를 걸으면서 외친 요구다. ‘단 한 명의 해고도 없는 총고용보장’ … 이 무슨 뜻일까.

총고용보장이 지금까지 일하던 작업장에서 모든 직원이 계속 일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것이 최선이겠지만 폐쇄되는 작업장에서 ‘전 직원의 계속 고용’을 보장하라는 건 비현실적이다. 차선은 기존의 숙련을 활용할 수 있는 동종 산업에서 일자리를 얻는 일이다. 가령 재생에너지 산업이 그것으로, 발전노동자들이 공공 재생에너지산업의 확충을 주장하는 이유의 하나다. 그 다음 대안은 아예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 일이다. 이 경우 교육훈련비나 생계비, 이주비용 등과 함께 구직활동에 대한 사회적 지원이 요구된다. 나이가 많은 노동자는 조기 은퇴를 지원하는 방안을 강구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같이 정의로운 전환기금의 설치가 필요한 이유를 말한다.

전환과정에서도 불평등과 싸워야 하는 노조의 ‘정의의 문제’

노동조합이 탄소중립을 실현하기 위해 나설 영역은 고용보장 외에도 적지 않다. 거기에는 노동조합이 고유하게 할 수 있는 일이 포함된다. 녹색 단체협약이나 경영참여를 통해 녹색 일터(green workplace)를 구축하는 일이 대표적이다. 예를 들면 △ 태양광 패널의 설치나 난방 및 환기 시스템의 개선 △ 친환경 통근계획의 수립 △ 재활용 및 폐기물 감소 조치의 시행 △ 무탄소 원재료나 유기농 먹거리와 같은 녹색조달정책의 도입 △폭염 및 기후재난에 대한 대비 및 건강 보호 등이 그것이다. 친환경 소비자나 정치적 유권자로서의 역할도 존재한다. 이러한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노동조합 내에 녹색 대의원을 선임한다든지 기후관련 집행부서를 설치하기도 한다.

녹색 노동운동이 기업 차원에 머물 일은 아니다. 기업 차원의 미시정치(micro politics)는 국가 차원의 거시정치(macro politics)와 연관된다. 정부의 기후정책과 산업전환 정책에 대한 노동조합의 개입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사회적 대화나 산별 차원의 단체교섭과 같은 탄소중립 거버넌스의 구축을 강조하는 이유다.

노동조합의 역할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의 하나는 기후위기가 특정 노동자 집단에게 집중되는 희생을 막고 불평등에 맞서는 일이다. 기후위기나 전환의 과정이 미조직노동자나 하청노동자, 비정규 노동자에게 피해를 집중시킬 가능성이 높다면 이들과 연대하는 일은 정의의 문제에 속한다. 국제노총(ICTU)이 ‘모두를 위한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 for all)을 말하는 까닭이다. 노동조합이 기후위기 해결과 함께 불평등의 해소에 나서는 것, 그리하여 노동운동이 사회운동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노동-기후 연대의 중요한 내용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기후운동은 노동자 일자리의 중요성을 인정해야

노동조합이 기후시민단체와 연대를 추구하는 주요한 목적은 노동조합이 자신의 요구에 대해 사회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사회적으로 추진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른바 사회적 힘(societal power)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사회적 힘은 노조가 사회단체와 연대하는 데서 비롯되는 연대적 힘(coalitional power)과 노조의 요구에 사회적 정당성과 지지를 제공하는 담론적 힘(discoursive power)으로 이뤄진다(Schmalz, 2018).

노동조합이 기후단체와 연대해 사회적 힘을 얻을 수 있다면 기후단체는 노동조합과 연대해 운동의 대중적 토대를 마련하는 계기를 장만한다. 일전에 기후운동(시민운동)이 시민과 유리된, 자기만족적인 엘리트 운동의 성격을 갖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기후운동, 자기만족적 엘리트 운동에 머물 것인가’ 시민언론 민들레 2023년 8월 12일). 기후운동이 노동조합과 연대하여 기후담론을 노동조합 내에 확산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기후담론의 대중화이자 정치화라고 할 수 있다.

노동조합이 기후위기의 해결과 불평등의 해소에 진심일 필요가 있다면, 기후단체는 노동조합이 갖는 이해지향의 측면, 특히 일자리의 확보에 진심일 필요가 있다. 일이란 ‘저주받은 돈벌이 활동’이지만 사회통합의 출발이자 자기실현의 수단이기도 하다. 더욱이 기후위기 과정에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는 그것이 정부의 기후정책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서 환경 실업자(environmental unemployed)에 해당한다. 이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은 정부의 책임이다.

고용보장과 관련해서 대두되는 문제는 이른바 녹색 일자리를 만드는 일이다. 국제노동기구(ILO)는 녹색 일자리를 “녹색 산출물(상품 및 서비스)을 생산하거나 환경친화적인 생산과정(녹색 프로세스)을 갖는 괜찮은 일자리”라고 정의한다. ‘괜찮은 일자리’(decent jobs)라는 개념이 내포된 친환경 일자리를 말한다. 기후단체로서는 노동과 연대해 경제 전반에 걸쳐 녹색 일자리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의제로 삼아야 한다.

공동실천을 통해 함께 변화하고 진화해야

연대는 상호학습의 장이자 함께 변화하고 진화해가는 과정이다. 노동조합은 기후단체를, 기후단체는 노동조합을 인정하고 함께 실천하면서 배운다. 노동조합이 기후위기와 불평등의 해소를 자신의 과제로 삼는다면, 기후단체는 노동자의 일자리 보장과 권리 보장을 자신의 의제로 삼을 때 두 운동은 접합하며 진화한다.

그간 노동운동과 기후운동은 분리된 채 기후위기의 과정에서 주변세력을 벗어나지 못했다. 노동운동과 기후운동이 기후위기의 대안세력으로 등장하려면, 그리하여 탄소중립을 앞당기려면 두 운동이 ‘운동을 가로질러’ 연대하는 것이 절박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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