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재집권의 위험과 윤석열 시대에 나온 속편
사회가 외면하고 듣지 않던 이들의 삶과 목소리
계급적 반란처럼 보였지만 불편함을 남겼던 조커1
극우 포푤리즘 운동의 지지자들이 더 열광한 이유
각성한 조커의 무정부적 폭동을 보고 싶었던 이들
조커의 재각성으로 기대가 무너지며 남은 배신감
'명태균 게이트' 등 한국 정치 상황 떠오르게 해
1. 당연하게도 '조커2: 폴리 아 되'는 '조커1'과 분리해서 볼 수도 이야기할 수도 없다. 조커1은 빈곤, 학대, 혐오, 소외에 시달리던 아서 플렉이 희대의 악당 조커가 되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였다. 영화 중반에 나오는, 정부의 예산 삭감으로 곧 없어질 심리상담소에서, 기댈 곳이 사라질 아서와 일자리를 잃을 상담사의 대화 장면에 영화가 말하려고 하는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내 말을 안 듣고 있죠? 단 한 번도 귀담아들은 적이 없어요"(아서의 질문) "당신 같은 사람한테 아무도 관심이 없어요. 나 같은 사람한테도요."(심리상담사의 답변)
2. 영화의 무대인 고담시는 불평등과 부조리로 가득 찬 전형적인 자본주의적 대도시이다. 그것도 신자유주의가 본격화하던 1980년대가 시간적 배경이다. 여기서 낮에는 억만장자 바람둥이이면서 밤에는 악당을 처단하러 다니는 부자 엘리트 배트맨의 활약이 아니라, 그 밑바닥에서 아서 플렉이 조커로 각성하는 과정이 '조커1'이다. 이것은 많은 이들에게 묘한 흥분과 어두운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아서가 우리 자신이나 주변의 존재감 없는 보통 사람들과 너무 닮았기에, 그것은 언뜻 지배계급 엘리트들에 맞선 계급적 분노와 복수, 반란처럼 보였다.
3. 하지만 '조커1'은 희망과 용기보다는 왠지 모를 서늘하고 불편한 뒷맛을 남긴 걸작이었고 문제작들이 흔히 그렇듯 수많은 다양한 해석과 논쟁을 낳았다. 정치적으로 해석해보자면 그 영화는 지금 전 세계적으로 곳곳에서 득세하고 있는 극우 포퓰리즘 운동의 지지자들에게 호응을 얻고 공명하는 측면이 더 많았다. 체제가 낳은 불평등과 부조리에 대한 분노를 사회를 지배하는 특정한 엘리트들에게 책임을 묻고 사적인 복수로 연결하는 세계관부터 그랬다.
4. 아서는 자신을 무시한 사회 엘리트들에 대한 사적인 복수를 망상을 통해 정당화하는데, 이것은 '대안적 사실'을 창조해서 반엘리트 선동을 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방향을 정당화하는 신우익들과 비슷하다. 주변에서 아서를 무시하거나 상처 준 사람들이 대부분 가난한 여성이나 흑인이었다는 것도 우연으로만 보기 어렵다. 밝고 따뜻한 웃음이 아니라 섬뜩한 병맛의 유머에 대한 집착은 오늘날 온라인 우파 커뮤니티의 특징이다. '조커1'에 트럼프나 윤석열-이준석을 지지하는 사람들이나 청년(남성)들이 더 열광한 것은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다.
5. 따라서 조커2 제작에 대한 소문이 나오기 시작할 때 더 많은 사람이 무엇을 기대하고 기다렸는지는 분명해 보인다. '각성'한 아서가 조커가 되면서 무정부적 폭동을 일으킨 사람들과 결합하는 장면이 1편의 마지막을 장식했기 때문이다. 이제 조커는 2편에서 할리퀸과 손잡고 본격적으로 (반)혁명적인 반란을 일으켜서 고담시를 뒤집어엎을 것이라는 기대는 자연스러웠다. 1편에서 전율을 일으켰던 그 특유의 춤을 조커와 할리퀸이 같이 추면서 계단을 내려오는 예고편은 이런 기대와 흥분을 더욱 부풀렸다.
6. 하지만 '조커2'는 관객들의 뒤통수를 치면서 그런 기대를 산산조각 낸다. 두 사람이 계단에서 춤추며 내려오는 장면은 영화에서는 나오지도 않는다. 비판받아 마땅하게도 이것은 극장을 찾아가게 만든 일종의 낚시였던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2편에서 아서 플렉은 조커에서 다시 아서 플렉으로 돌아오는 '재각성'을 한다. 영화 속에서도 이것에 누구보다 배신감과 실망감을 느끼는 것으로 나오는 것은 '조커 영화를 20번은 봤다'라고 스스로 자랑할 정도로 조커를 열광적으로 숭배하던 리 퀸젤(할리퀸)이다.
7. 리 퀸젤은 아서 플렉이 조커로서 변신을 완성하게 되면 그 지지자들의 불만과 분노를 거대하게 결집하면서 반동적 봉기의 폭발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면서 리 퀸젤은 아서 플렉이 경험한 가난과 학대, 소외를 자신도 모두 겪었고 누구보다 공감하는 것처럼 말했다. 아서를 동정하며 도우려는 변호사보다 더 아서의 신뢰와 사랑까지 얻었다. 하지만 사실 리 퀸젤은 부잣집 출신의 엘리트 지식인이었다.
8. 리 퀸젤을 보면 가난한 백인들, 희망이 없는 청년들의 절망감과 억울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공감하는 척하면서 반동적 대안을 설파하는 억만장자 트럼프와 하버드 출신 정치인 이준석 등이 생각나게 된다. 그들의 목적은 아서같은 이들의 삶을 이해하고 목소리를 듣는 게 아니라, 그것을 이용해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는 데 있다. 반면 조커를 아서로 '재각성'시키는 것은 정말로 아서와 똑같이 가난, 소외, 멸시, 조롱에 시달렸던 친구 개리 퍼들스다.
9. 가난하고 장애인이기도 한 개리는 법정에 들어올 때도 나갈 때도 혼자일 뿐 아니라 사람들의 비웃음 소리만이 들린다. 심지어 아서조차 법정에서 개리를 무시하고 조롱한다. 누구도 자신의 비참한 삶에 진정으로 관심이 없고, 자신의 말을 듣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던 아서는 자기도 개리의 삶과 목소리를 외면했다는 진실을 깨닫고 큰 혼란에 빠진다. 아서는 조커의 가면을 벗어버리고 세상은 하나도 바뀌지 않는다. 결국 기대감에 부풀어 '조커2'를 보러 간 사람들에게 남는 것은 혼란스러운 패배감과 절망감이다.
10. 이처럼 조커2는 아서와 리 퀸젤의 '공유정신병'을 보여주는 영화라기보다는 관객들에게 '조커1은 우리 모두가 공유한 망상(폴리 아 되)이었다'라고 선언하는 영화처럼 보인다. 망상에서 갑자기 깨어난 사람들은 허탈감과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 감독의 용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더 나아가 조커1이 '악인과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하는 것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영화라면 조커2는 '그럼에도 악인과 가해자의 서사를 파헤칠 필요성'을 증명하는 영화다. 악인과 가해자를 그저 타고난 괴물로만 그리는 납작한 작품들보다 더 탁월한 작품들인 이유다.
11. 어떤 사회적 구조와 요인들이 악인과 가해자를 낳는지 알아야, 또 다른 가해자와 피해자가 나타나는 것을 어떻게 막고 문제를 바로잡을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두 영화를 모두 만든 미국의 토드 필립스 감독이 왜 관객들의 기대를 저버리면서 2편의 방향을 1편과는 반대로 돌린 것인지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1편의 흥행 성공이 작품에 대한 더 큰 자율성을 가져왔기 때문에? 1편에 대한 반응을 보고 걱정이 커져서? 권력자들의 불안을 다독이기 위해? 다만 '조커1'은 트럼프가 집권하던 2019년에 나왔고, 조커2는 다가오는 트럼프 재집권의 위험을 앞두고 개봉했다는 것을 주목하게 된다. 현실의 조커를 경고하고 막고 싶은 마음 아니었을까?
12. 조커2의 변화된 방향에 동의하더라도 아쉬움은 남는다. 반동적 봉기를 피한 것은 알겠지만, 혁명적 반란의 희망은 왜 나오지 않냐고 기계적으로 묻고 싶지는 않다. 1편이 보여준 드라마틱한 감동과 온몸을 감싸던 전율이 2편에서는 좀 부족하다. 강조점과 메시지의 변화가 낳은 필연적 결과 같지는 않다. 아서의 재각성이 교도관들의 끔찍한 폭행 이후에 배치된 것도, 부당한 폭력에 대한 굴복처럼 느껴지게 한다. 할리퀸 캐릭터는 레이디 가가의 연기와 노래로는 덮기 어려울 정도로 설명이 불충분하다. 뮤지컬은 좋은 시도였지만, 영화의 흐름과 잘 섞이지 못한다. 1편과 마찬가지로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에서 자유롭기 어려운 구조를 가지고 있다.
13. 윤석열 시대일 뿐 아니라 마침 명태균 게이트까지 터지면서 '조커2'는 여러모로 한국 정치 상황을 떠오르게 한다. 조커2는 '조커와 그의 그림자'라는 애니메이션으로 시작하는데 요즘 명태균은 자신이 윤석열 부부의 "그림자"였다고 말하고 있다. 조커 3편은 없을 것 같지만, 만약 나온다면 2편에서 가장 빛나는 장면을 만들어낸 개리의 삶과 목소리를 담으면 좋을 것 같다. 또 1편에서도 라디오에서만 들을 수 있었던 고담시 청소노동자 파업 소식의 뒷이야기도 궁금하다. 그것도 우리 사회가 관심 없고 들으려 하지 않던 이들의 이야기와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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