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싱글맘 가정에서 벌어지는 공포스런 사건

액땜과 퇴마 오가는 넷플릭스의 기이한 이야기

미국 사회는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고 있는가?

할리우드 블랙 파워 한 단면을 보여주는 작품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오동진 영화 평론가
오동진 영화 평론가

필라델피아 피츠버그의 흑인동네에서 살아가는 여성 에보니 잭슨(안드라 데이)은 아이 셋을 키우는 싱글맘이다. 그녀의 이름처럼 여자는 갈색 피부를 지녔다. 흑백 혼혈이다. 에보니의 엄마 앨버타(글렌 클로즈)는 백인 여성이다. 에보니의 남편은 현재 이라크에 가 있다. 그녀의 가정은 정상이 아니다. 에보니는 알코올 중독이고 아이들의 할머니 앨버타는 교회에 빠져 있고, 평생을 흑인 남자에 홀려있다. 일종의 섹스 중독이다. 이 나이 먹은 여성의 의상은 너무 야하다. 그러면서도 이 할머니는 현재 암 치료를 받고 있다. 머리가 다 빠져 있으므로 역시 야한 금발의 가발을 쓰고 다닌다.

문제투성이 흑백 혼혈 가정에서 벌어지는 액땜과 퇴마

에보니의 어린 막내 아들인 안드레(앤서니 B. 젠킨스)는 다른 뭔가에 홀려 있다. 혼잣말을 하고 이상한 존재를 본다. 아이는 지하에서 트레이라는 아이를 봤다고 한다. 엄마 에보니는 그런 막내가 불안하지만 못내 모른 척 하려 애쓴다. 그녀는 무서워 하는 안드레를 놔둔 채 또 술을 마신다. 에보니는 폭력 엄마이다. 지나치게 공격적이며 화를 자주 낸다. 큰 아들 네이트(케일럽 맥러플린)와 딸 샨테(테미 싱글턴)는 종종 그녀에게 얻어 맞는다. 그러니 이 집안의 악마는 술 취한 엄마 에보니이다. 물론 할머니도 정상이 아니고 애들도 이런저런 문제가 있지만 엄마만큼은 아니다. 아동보호국의 신시아(모니크)가 이런 에보니를 감시 관찰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아이들은 차례로 이상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트랜스 상태(일종의 최면상태)에 빠진다.

넷플릭스에 최근 올라있는 영화 ‘딜리버런스’는 인간의 광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공포물이다. 딜리버런스는 직역하면 구원, 구출이란 뜻이지만 영화 내용을 보면 그보다는 우리 식으로 ‘액땜’이라 해석하는 게 더 맞아 보인다. ‘액땜을 하다’는 ‘구마의식을 치른다’와는 약간 다른 뜻이다. 악에서 벗어나기 위해 뭔가 대체물이 필요하다. 일종의 ‘희생’으로 대신하는 것이 바로 액땜이다. 퇴마는 악을 쫓아내는 것이다. 영화 ‘딜리버런스’는 액땜과 퇴마의 얘기를 오가는 내용이다.

영화 ‘딜리버런스’는 이전에 나왔던 전설적인 악령 영화들, 오컬트 무비들에 빚을 지고 있다. 윌리엄 프리드킨이 만든 ‘엑소시스트’(1973)에 가장 많은 빚을 졌다. 빙의된 악령이 아이의 몸을 지배하는 장면, 퇴마 장면이 후반부를 채운다. 조금 더 멀게는 로만 폴란스키가 만든 ‘악마의 씨(Rosemary baby 1968)’도 이 영화의 원조 격이라고 할 수도 있다. 루시퍼의 악령이 임신한 여인의 몸으로 들어가 악마를 탄생케 한다는 이야기 구조를 빌려 오기 때문이다. 앨런 파커의 ‘앤젤 하트’(1989)도 떠올려진다.

 

영화 '딜리버런스' 포스터들.
영화 '딜리버런스' 포스터들.

노이로제와 집착의 병 걸린 사회, 해결 방법이 없다

기독교 광신자들은 루시퍼가 하늘에서 나올 때 천사의 3분의 1이 따라 나왔고 루시퍼는 그 힘으로 인간 세계에 악을 퍼뜨리고, 또 행하고 있다고 믿는다. 한편으로는 이 모든 것이, 그렇게 생각하는 인간의 종교적 집착의 결과일 수 있다. 영화 ‘딜리버런스’는 극 중반을 넘어서면서 급작스럽게 퇴마의식의 영화로, 얘기의 중심을 퇴마사의 얘기로 전이시킨다. 엄마 에보니를 지배하는 것은 스스로를 사도라 부르는 한 부흥사이다.

공포영화지만 사람을 몸서리치게 할 만큼 놀라게 하거나 무섭게 하는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이상한 깨달음의 느낌을 주는데, 지금의 미국 사회든 아니면 세상의 어떤 다른 사회든, 심각한 중독과 노이로제, 집착의 사회라는 것을 보여 준다. 각 개인의 겪는 스트레스, 정신적 상처와 병은 너무 깊은데다 인간, 특히 가족이라 불리는 주요 구성원 간의 문제가 너무 복잡해져서 현재의 사회 시스템으로는 감당이 안 된다는 애기를 하는 것이다. 그건 아동복지국도, 교회의 목사도, 학교의 선생들도, 병원의 심리치료사들이나 정신과 의사들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 문제는 이제 현대 사회 시스템의 용량을 넘어 섰음에도, 가장 큰 문제는 인간들이 이걸 여전히 해결할 수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건 일종의 자만이자 오만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디에 기대어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에보니의 집안에는 파리가 들끓는다. 지하에서 뭔가가 썪고 있다. 지하실에 뭔가가 있다. 영화 ‘딜리버런스’는 초반부에 미스터리 살인극처럼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냄새가 나고 파리가 끓는다면 뭔가가 심하게 썪고 있다는 얘기이다. 혹시 이 집안에는 보이지 않는 아빠의 시체가 있는 것은 아닐까. 엄마인 에보니는 종종 지하실로 가는 계단에서 그 밑을 바라 보는 걸 별로 무서워 하지 않는다. 에보니가 자신의 남편, 아이들의 아빠를 죽이고 유기한 것은 아닐까.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부성의 부재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남성들이 겪는 거세 공포증의 일단을 보여주려 한 것일까.

 

영화 '딜리버런스' 한 장면
영화 '딜리버런스' 한 장면

미국 사회 블랙 파워 역설하는 흑인 감독·배우들의 공포물

작금의 할리우드 영화에는 블랙 파워가 넘쳐 나고 있고 흑인 감독, 흑인 배우들이 공포물까지 섭렵하거나 장악한 모습을 선보인다. 조던 필의 ‘겟 아웃’(2017)부터 여성 흑인 감독 니아 다코스타의 ‘캔디맨’(2021)까지, 할리우드의 흑인 커뮤니티가 어쩌면 백인 전용물처럼 여겨졌던 공포영화의 철학, 정치성, 무엇보다 그 공포의 강도를 훨씬 크게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할리우드 공포영화에서 흑인은 공포가 저질러지는 대상이었지 그것의 주체, 곧 공포영화의 제작과 소비의 주인은 아니었다. 미국 사회에 진정한 블랙 피플 파워가 완전히 자리잡고 있음을 역설한다.

영화 ‘딜리버런스’는 앞서의 수많은 공포영화에서 레퍼런스를 가져오되 그것을 흑인의 시선으로, 곧 흑인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흑인 중산층이 흑인 사회의 주류로 자리 잡은 것은 물론, 미국 사회 전체의 메인 스트림이 됐음을 시사하고 있다. 예수도 흑인 여성의 이미지로 형상화 되고 있으며 목사도, 전도사도, 퇴마사도 다 흑인이고 여성이다. 이 영화를 만든 흑인 감독 리 다니엘스는 탈백인과 여성주의의 확립이야 말로 지금의 미국사회가 나아갈 방향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이야기의 전개가 재미있다기보다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이건 약간 질적 차별성이 있는 얘기이다. 재미는 있는데 의미가 겉핥기로 느껴지면 흥미가 떨어진다. ‘딜리버런스’는 그 반대의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뒤로 갈수록 종교적 상징이 강해지고 재미의 느낌이 반감되지만 감독인 리 다니엘스가 말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점점 더 명료해지되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더 모호해진다. 각자의 생각대로 정리하되 각자대로 성찰을 요구한다는 얘기이다.

 

영화 '딜리버런스' 한 장면
영화 '딜리버런스' 한 장면

위대한 여배우가 보여주려는 미국 사회 붕괴의 정치학

예컨대 이 영화의 이야기는 2010년대 필라델피아에서 발생한 실제 사건을 모티프로 한 것이라고 하지만 어쩌면 지나친 알코올중독 상태였던 한 싱글맘이 벌인 환각의 범행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아이들이 악마에 빙의했다지만 그것 역시 자신의 상상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집이라는 공간, 엄마라는 존재, 교회와 병원이라는 사회 보호시스템이 이제는 사상누각에 불과한, 가장 믿을 수 있는 공간과 존재가 내부로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보여 주고자 하는 작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미국 사회가 붕괴하고 있는 것이다. ‘명료한 모호함’이란 바로 그런 것을 의미한다.

위대한 여배우 글렌 클로즈가 이 영화에 출연한 것도 그런 백 그라운드의 정치학을 이 영화가 담고 있다고 생각해서였을 수도 있겠다. 글렌 클로즈는 암환자 역답게 머리가 다 빠진 모습으로 나오면서도 젊은 흑인 남자를 유혹하는 늙은 여자의 이미지를 보여 줄 요량으로 가슴 볼륨과 신체의 노출을 꺼리지 않는 과감한 연기를 선보인다. 특히 악령에게 빙의돼 작아진 이빨을 드러내며(악마는 이빨이 다 작다.) 딸인 에보니에게 흉측하고 (도덕적으로) 더러운 말을 쏟아 내뱉는 모습은 마치 ‘엑소시스트’의 빙의 소녀 린다 블레어가 늙어서 또 다른 모습으로 출연한 느낌을 준다. 글렌 클로즈의 연기는 글렌 클로즈 외에는 할 수가 없다. 그녀를 두고 ‘살아 있는 전설의 연기자’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극장에 이렇다 할 영화가 없다고 생각하면 OTT를 뒤지면 나오는 것이 많다. 종종 공포물 같은 장르 영화를 보는 것은 역설적으로 생활의 활력소가 된다. ‘딜리버런스’가 바로 그런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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