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21대 국회의 마지막 본회의에서 민주유공자법이 통과되었다. 예상했던 대로 윤석열 정권은 재의결 요구라는 명목으로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21대 국회가 바로 종료되었기 때문에 재의결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거부권을 습관적으로 하는 정권이므로 별로 충격적이지 않고, 실망할 것도 없다. 21대에서 못했으면 22대에서 하면 된다. 민주유공자법 제정 거부로 윤석열 정권이 반민주 독재정권임이 분명해졌다. 이제 민주세력 총단결로 이 법을 제정시켜야 한다.
민주유공자법에 대한 거부권 행사는 윤석열이 거부권을 행사한 14개 법률 중 하나의 거부권 행사로만 볼 수는 없다. 민주유공자법 제정은 지금까지 우리 사회의 민주화 정도를 판단하는 시금석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입버릇처럼 ‘민주화 이후’라는 말을 한다. 1987년 이후가 민주화된 사회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진짜 민주화된 것 맞나? 내 삶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은데 진짜 사회는 민주화되었나? 이런 의구심도 한편에서는 갖고 있다.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 끌려가서 고문당하는 일이 일단 없어졌고, 말 몇 마디 때문에 잡혀가서 감옥살이해야 하는 일은 거의 사라졌다. 물론 아직도 법적으로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국가보안법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차만 잘 지키면 시내 한복판에 다중이 모여서 정권 퇴진을 외칠 수도 있다. 1인 시위를 통해 자기 의사를 얼마든지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자들도 역설적이게도 그런 자유를 누리고 있는 현실이다.
한 나라가 제대로 된 자주국가인가를 알려면 식민지 시절에 매국 행위를 했던 자들이 합당한 처벌을 받았는지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는 진정한 자주 국가라고 보기 어렵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식민지 시대에 독립을 위해 자기를 희생해 가면서 싸웠던 이들이 제대로 대우를 받는지를 보아야 한다. 상벌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 나라가 진정한 자주 국가라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매국 행위를 한 친일파들이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다는 것은 이제 상식에 속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독립유공자들이 제대로 된 예우를 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제1공화국이 무너진 1960년 4월 혁명 때까지 광복 이후 무려 15년이 지났는데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사람은 14명에 불과했다. 그것도 초대 대통령 이승만, 초대 부통령 이시영을 제외하면 모두 외국인이었고, 12명 중 3명을 빼고 모두 미국인이었다.
식민지에서 해방이 된 나라에서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내국인이 거의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일단 친일파 재등용과 함께 미군정 3년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문제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독립운동을 철저하게 외교론에 입각해서만 보았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독립전쟁, 무장투쟁, 요인 암살, 폭탄 공격 등은 올바른 독립운동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독립운동 유공자를 제대로 예우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미 군정도 문제이고, 이승만도 문제이지만, 결국 그들에게 독립된 나라의 민의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책임이 우리에게도 있다. 4.19민주혁명 이후 독립유공자에 대한 예우는 많이 나아진 것도 사실이다. 독립유공자에 대한 예우가 개선되어 나간 것은 정권의 시혜라기보다는 당사자나 유족들의 끈질긴 투쟁, 국민들의 강력한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도 분단의 현실 속에서 독립유공자가 여전히 제대로 예우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특히 독립운동에 혁혁한 공이 있음에도 이념 문제 때문에 예우를 받지 못하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결국 반쪽짜리 예우인 것이다. 게다가 악질적인 친일 매국 행위를 한 자들이 버젓이 독립유공자 혹은 국가유공자로서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심지어 독립투사들과 나란히 잠들어 있다. 통탄해야 할 일이다. 이러고도 독립된 자주적인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넘어야 할 산이고, 해결해야 할 과제일 것이다.
민주화 여부도 마찬가지이다. 이 사회가 진정한 민주화가 되었는지를 보려면 독재에 부역했던 자들, 민주화운동 탄압에 앞장섰던 이들이 처벌을 받아야 한다. 친일 매국행위를 한 자들에 대한 처벌이 미약했듯이 독재권력에 부역한 자들에 대한 처벌은커녕 이 사회에서 부귀 영화를 누리는 자들 중 이런 자들이 대다수이다. 친일 매국행위를 한 자들이 역사를 왜곡하고 언제든 나라 팔아먹을 수 있듯 독재에 부역한 자들 역시 민주화를 뒤집을 수 있는 자들이다.
박종철 열사의 사망 원인에 대해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라는 궤변을 만들어 놓은 자가 버젓이 국가유공자가 되어 있다. 그가 그 뒤로도 많은 사건을 조작했음은 최근에 많이 알려진 일이다. 이런 사례를 들어 보면 지면이 모자라서 못할 정도이다. 군사반란에 가담한 자들이 국립현충원에 국가유공자입네 하고 안장되어 있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분노를 넘어 치가 떨리게 하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의 민주화는 대단히 취약하고 불안정한 것이다. 민주유공자에 대한 예우에서도 그렇다. 민주화를 위해 수많은 사람이 죽고, 행방불명되고, 다치고, 감옥에 가고, 학교와 직장에서 쫓겨나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건만 민주유공자로 예우를 받는 사람들은 4.19민주혁명 관련자와 5.18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들뿐이다. 걸핏하면 이런 사람들 때문에 민주화가 되었다고 하면서도 민주유공자에 대한 예우를 법으로 정하는 것은 한사코 반대한다.
이렇게 된 것은 독립유공자 예우에서 보듯 결국 힘이다. 4.19민주혁명과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서 특별법으로 민주유공자 인정이 된 것은 압도적인 힘이 정권을 압박해서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외의 수많은 민주화운동에 대해서 정권은 시혜 차원으로 ‘민주화운동 관련자’라는 해괴망칙한 명칭으로 생활지원금 조금 주는 것으로 마무리하려고 했다. 결국 민주화운동의 정당성을 위해 단결해서 투쟁하지 않으니 지금까지 온 것이다.
독립운동세력이, 그들을 지지하는 국민들의 힘이, 외세와 매국노들을 청산할 힘이 부족해서 독립유공자 예우를 어정쩡하게 하게 되었듯이, 민주화운동의 힘이 부족해서 독재세력을 청산하지 못하고 민주유공자 예우를 훼방놓는 자들에 의해 민주유공자법 제정이 가로막히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주유공자법은 현재의 민주화의 진정성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시금석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차피 민주유공자법 제정에 반대하는 자들은 있게 마련이다. 그들 스스로 독재세력의 후예임을 드러내고 있다. 문제는 민주유공자법을 제정하기 위해 나서야 하는 민주세력이다. 시급한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식의 자세로는 지금의 엄중한 민주주의 위기를 헤쳐나갈 수 없다. 지금의 시급하고 비상식적인 문제들은 모두 반민족독재수구세력과 민족민주세력의 일대결전 속에서 치러지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 대척점이 바로 민주유공자법 제정이다.
민주유공자들은 마땅히 예우받아야 한다. 그리하여 자라나는 세대들이 이 사회가 위기에 빠질 때 나서야 한다는 자세를 갖게 해야 한다. 이제 이 땅의 민주주의세력은 모든 힘을 결집하여 민주유공자법 제정을 촉구하는 투쟁에 나서야 한다. 그것은 대단히 취약하고 불안정한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튼튼한 반석 위에 올려 놓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신발끈을 단단히 매고 나서자. 민주유공자법 제정을 쟁취하기 위해!
성명서
지난 5월 29일 윤석열 대통령은 하루 전날인 28일 국회를 통과한 민주유공자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윤 정권 2년 만에 국회를 통과한 14건의 법률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한 사실도 놀랍거니와 예가 없는 국회통과 하루 만에 거부권을 행사하는 초헌법적인 행태를 보였다.
게다가 정부가 발표한 거부권을 행사한 여섯 가지 이유도 황당하기가 그지없다.
1.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피해 보상의 대상을 결정’하는 것과 ‘예우의 대상인 민주유공자를 결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2. 이 법률안에는 민주유공자를 결정하기 위한 명확하고 구체적인 기준이 없어 민주유공자 결정과 관련하여 극심한 사회적 혼란이 예상됩니다.
3. 이 법률안은 가장 본질적인 사항인 민주유공자 결정 기준을 법률상 명확한 위임 없이 국가보훈부장관이 수립ㆍ집행하도록 함으로써 정책 집행이 어렵고, 정권 또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예우의 대상인 민주유공자의 결정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4. 「국가보안법」 위반자도 민주유공자로 등록될 가능성이 있어 국가 안전과 국민 생존의 보장이라는 국가의 존립 목적을 형해화 할 우려가 있습니다.
5. 법률상 명확한 결정 기준 없이 결정된 민주유공자 및 그 유족 또는 가족이 대학입학 특별전형 대상에 포함됨에 따라 ‘공정’가치를 훼손하고 일반 국민의 상대적 박탈감을 초래할 우려가 있습니다.
6. 입법 과정에서 충분한 협의와 사회적 공감대 형성이 부족하였습니다.
이러한 ‘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안 재의요구서’의 내용은 2000년 민주화운동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에 의해 설치되어 활동했던 민보상위원회에서 결정한 민주화운동관련자를 민주유공자법의 대상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민보상위원회는 대통령⋅국회⋅대법원장이 3인씩 추천하는 위원으로 구성된 국가기구였고, 여기서 민주화운동으로 신청 접수된 사건을 치열한 논쟁을 거쳐 민주화운동으로 볼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하였다. 이 심리는 김대중⋅노무현 정부뿐 아니라 이명박 정부까지 이어졌고, 당시 신청사건의 절반이상이 불인정되었을 정도로 심의는 엄격히 진행되었다. 즉 20년 전 민보상위의 심의과정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될 사건의 범주에 대한 사회적 논쟁을 거친 것이다.
남은 문제는 이들 민주화운동관련자를 현재의 역사적 단계에서 어디까지 유공자로 할 것인가 이었는데, 이번 21대에 제출된 민주유공자법에서는 희생과 공헌의 정도가 크다고 판단되는 사망자⋅행불자⋅부상자로 한정한 것이다. 결국 대상자를 이렇게 한정함으로 해서 예우대상자는 민주화운동 인정자의 1/10에도 미치지 못하게 된 것이다
특히 4번의 경우도 한국에서의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과거 권위주의 정부는 국가보안법으로 민주화운동을 탄압한 사례가 적지 않았기 때문에 배제 조항을 완화했을 뿐이지 무조건 국가보안법 위반자도 국가유공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또 5번의 경우는 21대 법제정 과정을 전혀 모르고 하는 주장이다. 법제정 과정에서 여당이 대학입학특별전형을 문제 삼자 유가족들은 ‘우리는 명예회복을 바랄 뿐 특혜는 필요 없다’고, 발의한 법안에서 스스로 삭제한 내용인데도 이를 문제 삼은 것이다. 반대이유를 찾다 찾은 것이 이미 삭제한 내용을 다시 끄집어내어 주장하는 치졸한 주장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공감대 형성이 부족했다는 주장을 담은 6번은 더더욱 거론할 가치도 없다. 언제 한번 국민의 힘이 논의테이블에 제대로 앉아 본 적이 있는가? 유가협은 2021년 법안을 발의한 뒤 수십 차례 국민의힘 당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면서 대화를 요청했지만 단 한 번도 대화요청을 받아들인 적이 없다.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다는 주장은 우리가 아니라 국민의 힘이었다. 정부와 국민의 힘은 민주유공자법을 반대하는 이유를 국민들과 제대로 한번 주장한 적이 있는가?
문서에서 다행한 점은 그래도 ‘민주유공자들이 국가적 예우의 대상’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와 국민의 힘은 왜 국가적 예우의 대상인 민주유공자들을 예우하기 위한 노력을 한 가지도 하지 않았다. 막무가내 식으로 야당이 내놓은 법이라며 반대를 한 것 외에 무엇을 했는가 말이다.
우리는 새로 시작하는 22대 국회에서도 민주유공자법 제정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정부와 국민의힘은 반대만 말고 민주유공자법을 어떻게 제정할지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2024년 5월 31일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민주유공자법제정촉구추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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