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때 제도 재시행 강요…문제점 해결 못해

졸속·재탕 도입에 공공기관 임직원들 난감

사무처 직원 검열 주도 가능…행정만능주의 발상

홍태림(미술비평가, 문화연대 집행위원)
홍태림 미술비평가, 문화연대 집행위원

근래 유인촌 문체부 장관은 문화·예술 지원 방향을 대폭 개편할 것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러나 그의 호언들은 중앙정부의 문화·예술 공공기관 심의에 무작정 책임심의제를 재도입하겠다는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간 유인촌 장관은 “모든 지원 사업의 심사는 자천이나 타천으로 뽑힌 현장 전문가들이란 사람들이 와서 심사하는데, 결국 손이 안으로 굽는 심사가 된다” “심사 담당 직원들은 전문가가 했으니 우린 모른다는 식이어서 한번 심사 끝나면 책임질 사람이 없다” “책임 심의 시스템을 통해 지원 이후에도 사후 컨설팅까지 돕는 등 직원들이 심사를 책임지고 가져가게 할 것” “책임심사위원이 있다면 어떤 청탁도 듣지 않을 것이다, 본인이 그 책임을 평생 갖고 가야 하기 때문” “심의제를 바꾸는 것이 그런 걸(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차단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책임심의제 재도입에 유독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유인촌 장관의 이런 문제의식들은 일단 타당하지도 않을 뿐더러 성급한 책임심의제 재도입은 결코 그가 언급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만능열쇠가 될 수도 없다.

책임심의제가 재탕인 이유는 유인촌 씨가 이명박 정부 문체부 장관을 지내며 이 제도를 추진한 바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2010년에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예술위)는 ‘예술지원 전문심의관제’ 도입의 배경으로 3가지를 제시한 바 있다.

첫째는 심의위원 선정에 대한 이해관계 및 편파성 논란 지속, 둘째는 일회적 심의제에 따른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지원과 육성의 한계, 셋째는 소수 심의위원 중심의 심의 탈피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도입된 전문심의관 제도는 문화·예술 현장과 직접적 이해관계가 없는 예술위 사무처 직원이 심사에 참여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에 따라서 이 제도는 사업별로 외부인사 4인과 10년 이상 근무 경력을 가진 사무처 직원 1인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이처럼 최근 유인촌 장관이 유독 강조하는 책임심의제는 무려 14년 전에 그가 가졌던 근시안적 문제의식과 그에 따라 도입되었던 제도와 맥락상 큰 차이가 없다.

 

모두예술극장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책임심의제 도입을 설명하는 유인촌 문체부 장관. 연합뉴스
모두예술극장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책임심의제 도입을 설명하는 유인촌 문체부 장관. 연합뉴스

유인촌 장관 재탕 강요로 난감해진 문체부 공공기관들

MB정부 시기의 인식에 갇힌 유인촌 장관이 책임심의제를 ‘묻지마식 재탕’을 강요하면서 문체부 공공기관들은 난감한 상황이다. 작년 10월, 11월 예술위 전체회의 속기록을 살펴보면 내부 규정을 개정해서 사무처 직원이 심의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동시에 이러한 책임심의제를 2024년에 2개 사업(청년예술가지원사업, 창작주체지원사업 연극분야)에 우선 시범 적용한 후 2025년에 전면 적용할 것이라는 논의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두 속기록에서 이러한 책임심의제 도입과 관련한 구체적 논의가 담겼을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 연속 비공개된 것으로 보아 유인촌 장관이 강요하는 이 제도에 대하여 논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인이 과거 예술위에 몸담으며 직원들이 사무처 단위에서 청와대, 국정원, 문체부를 타고 내려온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이하 블랙리스트)를 심의에 개입하여 실행했던 경험에 대한 트라우마가 상당함을 목도했던 것을 떠올려보면 이러한 논쟁이 당연히 있었을 수밖에 없다.

유인촌 장관이 거시적 문제인식 없이 책임심의제를 강요함에 따른 논란은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의 2024년 1월 정기회의 속기록에서 더 명확히 드러난다. 여기서 김동현 위원은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 사건 이후 사무처 직원이 심사에 참여하는 장벽을 높이는 방향을 이어왔는데 책임심의제도는 이런 맥락과 상충할 여지가 있으며, 이 제도의 기반 마련을 위한 논의도 없이 장관이 하라고 하니 급하게 따르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또한 김현수 사업본부장은 현재 영진위의 사업 심의위원의 전문성 기준을 높게 잡고 있는데 영화 제작과 관련성이 없는 사무처 직원들이 당장 이런 전문성을 갖추기 어렵다는 점과 공공기관의 직무순환 제도와도 충돌이 있다는 우려를 제시했다. 그리고 김선아 위원은 사무처 직원들이 기관 내 심의에 참여하는 것이 영진위의 정체성과 맞는지 의문이며 더불어 영진위 위원들이 모든 심의에 참여하도록 하는 장관 지시사항이 영진위의 기존 의사결정 구조 및 이해충돌방지법과 충돌함을 지적하기도 했다.

신념으로 가장한 무지의 위험성

앞서 언급한 두 기관의 반응을 살펴보아도 유인촌 장관이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책임심의제를 졸속 재도입하는 것이 얼마나 타당성이 없는지 거듭 확인할 수 있다. 사실 현장 전문가들과 달리 문체부 공공기관 직원들은 어떤 청탁도 받지 않기 때문에 심사의 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다는 주장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임은 물론이고 문화·예술에 대한 무지로부터 비롯된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이 주장은 공정성을 지키며 심의를 수행하는 대다수의 전문가들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이자 문화·예술이라는 특수한 영역을 행정의 언어로 재단할 수 있다는 권위주의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지원 사업에 대한 사후 컨설팅을 공공기관 직원이 맡는다는 발상 역시 행정 만능주의가 아닐 수 없다. 문화·예술 현장에 진짜 필요한 것은 이러한 행정의 남용이 아니라 각종 사업 심의와 관련된 전문가들이 중장기 차원으로 깊이 있는 담론을 끌어내는 동시에 사회적 차원으로 확산시킬 수 있는 비평의 강화와 맞물린 장기적인 심의제도 개선이다. 또한 공공기관 직원들이 완벽한 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다는 주장이 맞다면 청탁금지법은 왜 있어야 하는 것이며 블랙리스트라는 국가폭력은 왜 자행되었는가.

특히 블랙리스트 차단을 위해 책임심의제를 재도입한다는 유인촌 장관의 주장은 우려의 차원을 넘어서 황당하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박근혜 정부에서의 블랙리스트가 공공기관 직원들이 각종 심의에 다양한 강도로 국가폭력에 부역하면서 실행되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박근형 교수의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에 대한 청와대, 국정원 차원의 검열을 강력히 실행한 것이 이 작품이 선정된 심의에 참여한 예술위 사무처의 간부급 직원들이었으며 이러한 검열을 막고 공론화한 것이 외부 심의위원이었음을 떠올려 볼 수 있겠다.

 

‘그래! 문화행동’ 주관으로 열린 22대 총선 문화예술 현장 대토론회. '블랙리스트 이후' 사진 제공.
‘그래! 문화행동’ 주관으로 열린 22대 총선 문화예술 현장 대토론회. '블랙리스트 이후' 사진 제공.

정책 당사자와의 분권과 협치를 향하여

이처럼 유인촌 장관이 책임심의제를 졸속 재탕하며 야기한 혼란은 그의 게으름과 무능을 대변한다. 이런 인물을 다시 문체부 장관으로 기용한 윤석열 대통령도 문제지만, 문체부 장관의 황당한 요구를 공론화하는 문체부 공공기관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더 문제라고 생각한다.

21세기에 접어든 지 20년이 넘었지만, 대한민국의 문화·예술 정책 체계는 권위적 관료 중심의 하향식 의사결정 구조 속에서 정책의 당사자들이 분할통치되며 대상화되는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현장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풀어나가기 위하여 현장과 결합된 소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예술정책 입안 및 집행을 병행할 수 있어 실질적 분권과 협치가 작동하는 현장권력형 국가기구인 국가예술위원회의 출범이나 공공기관에 대한 시민의 제도적 참여와 견제를 골자로 한 예술인 감사 옴브즈만 위원회 의무 설치 등에 대한 논의가 지속되는 것이기도 하다.

최근 ‘그래! 문화행동’의 주최로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문화예술 현장 대토론회가 열린 바 있다. 여기에서 문화·예술계가 제안하는 6대 과제 중 1번은 정당별 문화예술위원회 상설위원회화, 문화정책미래포럼 설치 등을 통한 현장과 국회 간의 정책 협력 거버넌스 구축이다. 장기적으로 권위적 관료 중심의 문화·예술 정책 구조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국회에서 이러한 거버넌스가 구축되는 것도 너무나 중요하다. 부디 22대 국회는 이러한 문화·예술 현장의 의지와 발을 맞추어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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