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채호기가 풀어낸 '회화적 설치'의 비밀

이상남(1953~ )은 여느 화가와 많이 다르다. 붓 대신 오구(烏口)와 컴퍼스를 쓰고, 그려 넣기보다 갈아내 없애는데 무게를 둔다. 자신이 만든 아이콘을 조합하고 때로 그것끼리 충돌시킴으로써 무언가를 표현한다. 어떤 작가라고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만날 때면 빵모자에 청바지, 운동화 차림에 배낭을 메고 오는데, 테이크아웃 커피 잔을 들면 여축 없는 뉴요커다. 실제로 그는 뉴욕에 작업실을 두고 대부분 그곳에서 작업을 하고, 국내 전시나 작업이 있을 때 한국에 온다.

 

페로탱갤러리 '마음의 형태' 전. 
페로탱갤러리 '마음의 형태' 전. 작가 제공

 

'그리되, 그리지 않은 것 같은' 표지.
'그리되, 그리지 않은 것 같은' 표지.

그가 개인전 ‘마음의 형태’(페로탱 갤러리, 2024. 1. 25~3. 16)에 즈음해 한국에 머물고 있다. 전시에 맞춰 <그리되, 그리지 않는 것 같은 - 시인 채호기가 감응해온 화가 이상남의 작품세계>(난다 펴냄)라는 책도 나왔다. 작가가 건재하다는 사실이 반갑거니와 그동안 작품이 어떻게 변하였는지 궁금하고, 나는 한마디로 규정하지 못하는 작가를 시인은 어떻게 바라보는지 호기심이 일어 서둘러 전시를 보고 책을 읽었다. 그를 만나기는 2009년 LIG손해보험 연수원, 근황을 듣기는 2013년 주일 한국대사관 벽화작업 때이니 10여 년이 지난 터다.

우선 페로탱 갤러리 전시. 2개 층에 걸쳐 13개 작품을 선보이는데, 주종은 컬러 ‘정신의 형태’ 연작이다. 10년 전 흑백 위주의 작품을 주로 하고, 컬러를 모색하던 시기의 작품에 머물렀던 내 눈에 ‘정신의 형태’ 연작은 순간 낯설었지만 이내 익숙하게 자리 잡았다. 오랜 기간에 걸쳐 수집된 아이콘들의 조합에 역시 오랜 기간에 걸쳐 수집하고 숙성시킨 색들이 덧입혀졌다. 흑백 전작들이 대비가 완강하여 당길 힘보다 밀어내는 힘이 강한 자성적 경향을 보였다면 컬러 작품들은 힘의 작용이 반대방향이어서 정신의 향연 느낌이 물씬하다. 사람에 따라서는 흑백의 까탈스러움에 색깔의 힘이 더해졌다고 볼 수도 있겠다. 중성적인 바탕 색에 비슷한 채도의 색깔을 엮어내는 방식이 참 ‘이상남스럽다’.

책은 기대치에 값한다. 그동안 한국작가에 관한 텍스트 기반의 책들, 예컨대 장욱진, 전혁림, 서용선, 임옥상 등이 나온 바 있지만 애호가의 주변적 접근에 그쳤다. 색과 형태를 갖고 논 결과물에 본격 접근하여 이를 다시 말로 풀어내기란 미디어를 달리하여 번역하는 작업과 같아서 수긍할 만한 설명과 해석에 이르기는 쉽지 않다. 그런 탓에 유명짜한 평자들이 어쩌구저쩌구 해도 작가는 애매한 표정으로 일관하기 일쑤다.

필자 채호기는 시인. 단어(혹은 음상)를 기본단위로 하여 시를 직조하는 직업군인데, 형태와 색을 기본단위로 화면을 축조하는 화가와 작업방식이 유사하다. 특히 색과 형을 아이콘으로 특화하여 기본단위로 삼는 화가에 대하여 이야기해주는 화자로서 시인보다 적합한 이가 있겠는가. 화자는 화가를 만나지 못했을 뿐 전시를 빼놓지 않고 보았다니 더할 나위 없다.

책은 전반부 ‘시인 채호기가 본 이상남의 작품 세계’와 후반부 ‘채호기가 묻고 이상남이 답하다’로 구성됐다. 전반은 일종의 도전기. 이상남의 작품이 많은 것을 내포하지만 쉽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라 작가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작품을 해부해보고 싶은 욕망을 자극하기에 채호기의 도전은 대리만족을 얻을 기회다.

채호기의 시도는 시인보다는 팬심의 시각이 두드러진다. 기존에 나온 작가에 관한 글에서 추려낸 키워드를 중심으로 분석, 정리했다. 화가를 처음 대하는 독자한테 적절한 내용이다. 한 발짝 나아간 측면이 있기는 한데, 시인은 자신이 없었던지 후반 인터뷰에서 자신의 관점이 적절한지를 조심스럽게 확인한다. 어쩌면 화가의 작품이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일 테다.

후반부 인터뷰가 훨씬 눈길이 간다. 미안스러워 묻지 못한 질문이 포함돼 있어 작가의 이력과 생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특히 그의 작품이 가진 특징 중 하나인 장소 특정적임의 소종래를 알게 해 준다.

그는 LIG손해보험 본사 및 연수원, 주일 한국대사관, 경기도미술관, 폴란드 포즈난공항 등에 벽화작업을 했다. 워낙 규모가 커 ‘설치적 회화’라고 하는데, 다른 화가들의 작업 방식과 다른 점은 자신이 작품을 설치할 장소의 선택에 더 간여하거나, 아예 설계단계에 간여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이 자타공인 건축물 특정적, 다시 말해 건축물 친화적이라는 얘기다.

이상남의 작업은 설계도 그리기와 흡사하다. 붓 대신 오구와 컴퍼스, 자를 쓴다고 했는데, 작가가 만들어 쓰는 것들은 중세시대부터 건축장인들이 주로 쓰던 것들이라고 한다. 이것들은 중세회화에서 수의 질서와 기하학적 비례 규범으로 조화롭고 완전한 우주질서를 창조하는 하느님의 모습을 묘사할 때 등장한다.

 

블루서클 NO.4,  1993, 캔버스에 아크릴릭, 122 Ⅹ 91.9. 작가 제공
블루서클 NO.4,  1993, 캔버스에 아크릴릭, 122 Ⅹ 91.9. 작가 제공

작품의 기본단위인 아이콘은 일종의 기호다. 이는 건물 설계도에서 문, 창호, 벽, 배선, 조명, 기계 설계도에서 볼트, 너트, 축, 바퀴, 크랭크, 도르레, 전자제품 설계에서 반도체, 저항, 콘덴서 등과 흡사하다. 실제 작가가 실생활에서 꾸준한 스케치를 통해 도형화한 아이콘이 천여 개에 이른다고 한다. 작품에 사용된 게 절반. 끊임없이 만들고 비우고 옮겨가는 게 그의 작업이다.

작가는 아이콘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한 아이콘은 무한하게 변형될 수 있는 매력이 있다. 이 아이콘들이 내 작품의 재산이고, 이것들로 무한하게 전개해나갈 수 있다. 그래서 내 그림은 누구의 것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하는 것은 나의 텍스트가 되는 셈이다. 다만 편집이라는 작업이 분명히 있다. 나는 시각적 요소들(아이콘들)을 부딪치게 하는 자이다. 그것들이 부딪치면서 예상치 못한 스토리가 전개되고 아이디어들이 증폭 증식된다.”

중세시대에서 연원한 도구와 현대에서 뽑아올린 아이콘이 화면에서 조우하여 여행을 하는 모양새다. 면 위에 얇은 물감층의 그림을 여러 겹 그리고, 갈아내는 일을 반복하는 그의 작업은 돌에서 형상을 찾아내는 조각과도 흡사하다. 공간과 시간이 일치하는 순간에 이르는 과정을 작가는 ‘긴 여행(롱 저니)’이라고 한다. 관객이 작품과 대화하면서 작가가 구현한 바를 좇아가는 또 하나의 여행이 생긴다.

설계도의 구체 결과물인 건축물과, 설계도와 유사한 작가의 작업이 친화적임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고객, 관객 모두 느낌적 느낌이 일치하는 것.

이상남은 어려서 아버지가 하는 철물점에 놀러가 거기 물건들을 만지며 노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거기 물건들이란 건물의 골조가 되는 목재와 못, 너트, 볼트, 거멀못 등 기본재료들이다. 이층에는 한국 실험연극의 선구자 방태수 선생이 세운 에저또 소극장이 있어 아버지의 철물점에서 무대재료를 구입해 갔다.

대학생 때 개념미술의 세례를 받아 붓을 버리며 두각을 드러냈던 그가 뉴욕에서 다시 그리는 행위를 시작할 때 그가 붓 아닌 오구, 컴퍼스, 자를 선택하였다. 미술세계의 중심인 뉴욕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들과 닮아서도 안 되고 기존의 것을 가져오더라도 새롭게 해석할 수 있어야 하기에 그랬을 터이다. 기본단위를 아이콘으로 삼은 것도 설계도구의 선택과 같은 맥락이다.

 

정신의 형태(M25-1), 2017, 패널에 아크릴릭, 203.6 Ⅹ 162.6. 작가 제공
정신의 형태(M25-1), 2017, 패널에 아크릴릭, 203.6 Ⅹ 162.6. 작가 제공
정신의 형태(H29), 2022, 패널에 아크릴릭, 183.6 Ⅹ 152.8. 작가 제공
정신의 형태(H29), 2022, 패널에 아크릴릭, 183.6 Ⅹ 152.8. 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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