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자 이름 공개됐을 때 딸 이름 지워달라 요구
정부는 영정도 없이 분향소 차려 자기들끼리 추모
딸이 영원히 사는 방법은 이름이 계속 불리는 것
희생자 159명 이름 잊히지 않을 때 안전한 사회로
참사 책임 실무자들에 덮어씌우고 피해자를 비난
대한민국 안전 바로 세우는 첫 단추, 특별법 제정
10‧29 이태원 참사 희생자 진세은 아빠 진정호입니다. 저희 집은 아침에 세은 엄마가 가장 먼저 일어나 '김어준의 뉴스공장'을 크게 틀어 놓으면 세은이가 일어나 식탁에 앉아 밥을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제가 가서 식탁에 앉고 세은 엄마가 아침밥을 만들어 주면 같이 밥을 먹고 각자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이동형이 어떠니, 김용민이 욕을 했다느니, 팟캐스트에서 들은 내용을 이야기하며 정권 또는 언론사 이야기를 하면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그런 가족이었습니다.
세은이와 집회에 같이 가기도 했는데, 박근혜 탄핵 집회 때는 세은이와 5번 이상 참석했던 것 같습니다. 나름 정치에 관심이 많고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며 때때로 정치권 욕도 하고 비판도 하면서 평범한 삶을 살았고 그렇게 세은이 언니와 세은이가 시집갈 때까지 뒷바라지해주고 집사람과 여행을 다니며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태원 참사 속보를 보면서도 세은이가 전화를 안 받는 것은 집회 현장처럼 사람이 많으면 전화 연결이 안 되는 것이겠지 하며 나에게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참사의 당사자가 되었고 아이의 장례를 먼저 치른 아빠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 텔레비전도, 핸드폰 뉴스도 볼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민들레'라는 언론사에서 희생자 이름을 공개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보니 진세은 이름이 나와 있었습니다. 아이 이름이 이상한 곳에서 불릴 수도 있는데… 세월호 참사 때처럼 극우단체들이 혐오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도 있는데… 라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민들레라는 언론에 평소 내가 존경하던 유시민 작가가 참여하셨다는데… 기존 언론의 문제를 제기하는 대안 언론이라던데… 하는 생각에 망설임이 생겼습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내 딸 세은이만큼은 그렇게 이름이 알려지고 불려지는 것이 싫어 민들레에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이름 지워 달라고….
그때부터 뉴스를 찾아보기 시작했고 정부에서 분향소를 영정도 없이 차려서 자기들만의, 자기들을 위한 추모를 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세은이가 꿈에 억울하다며 울었다는 세은이 언니의 이야기를 들은 날은 억장이 무너지고 힘없는 저 자신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은 꿈인지 지나가는 생각인지 '아빠, 난 여기에서 같이 온 친구, 언니, 오빠들 그리고 동생들과 잘 지내고 있어.'라는 세은이의 목소리가 계속 들리는 듯했습니다. 짧게 예쁘게 살다간 세은이가 영원히 사는 방법은 세은이의 이름이 계속 불려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10년, 100년 뒤에도 누군가가 세은이의 이야기를 한다면, 세은이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민들레에 제가 지어준 딸의 소중한 이름, 세은이를 부르며 이 글을 보냅니다. 세은이의 이름이 알려지고 그 이름이 불리어질 때, 함께 간 159명의 이름이 잊혀지지 않을 때, 그 희생자들로 인해 대한민국이 안전한 사회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도록 앞으로의 삶을 살고자 합니다.
대한민국의 안전을 바로 세우려면 우선 이태원 참사를 자세하게 들여다봐야 합니다. 사전 대비의 문제점, 초동 대처가 늦어진 이유, 컨트롤 타워가 작동하지 않은 원인을 철저히 분석해야 이후 개선 대책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독립적인 조사기구를 만들어 진상 규명을 하고자 하는 '이태원 참사 특별법'은 국회에 가 있는데 국회의원들의 관심은 국회에 있지 않습니다. 공천권을 따내려고, 총선에서 이기려고 불철주야 바쁘신 듯합니다. 국민에게 안전을 보장하는 일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국회의 관심사가 나라를 바꿀 수 있고 국회의 법안 처리에 우리 국민의 안전이 달려 있습니다. 국회의원들이 더 이상 국민 탓, 언론 탓 하지 말고 국회가 할 일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어느새 공무원이 일을 안 할수록 자리를 보전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정부 관료들은 국민 안전을 강 건너 불 보듯 하고 있습니다. 이태원 참사에 이어 오송 지하차도 참사까지, 확실히 막을 수 있는 참사를 방치하고 국민에게 각자도생하라고 합니다. 공무원이든, 경찰이든, 지휘부의 명령 없이 그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참사의 책임을 현장 책임자에게만 덮어씌우는 것이 말이 되겠습니까?
경찰은 대통령만 지키고 있고, 공무원은 상부의 눈치만 보고 있는 상황에서 권력을 보호하기 위해 피해자들을 비난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바로잡는 첫 단추가 이태원 참사 특별법의 제정입니다. 경찰과 공무원이 사명을 가지고 일하는 나라, 그들이 국민의 신뢰와 지지를 받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우리 이태원 참사 유가족은 거리를 행진하고 국회 앞에서 노숙 농성을 하고 있습니다.
민들레를 구독하는 많은 시민께서 끝까지 함께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참사 희생자들의 이름이 불리워질 수 있도록. 감사합니다.
관련기사
- 이태원 참사 1주기, 국민들과 정의의 힘을 믿습니다
- 이태원 참사 유족 또 피눈물…극우 유튜버들 만행까지
- 다시 일어선 이태원 참사 유족들…"특별법, 마지막 보루"
- 참사 307일 만에…이태원 특별법, 국힘 방해 뚫고 '성큼'
- 이태원 참사 생존자·유가족이 증언하는 1년 전 '그날'
- "이태원 진실은 아직 그 좁은 골목에 갇혀 있어요"
- 윤석열 '셀프 예배쇼' 교인들도 분노…"교회가 만만한가"
- 이태원 참사 규명 독립 기구, 유엔도 권고…귀 막은 정부
- 이태원 참사 '악플 1등' 조선일보…'댓글 불판' 만든 수법
- 이태원 참사 혐오·차별 표현, 대체 왜 그대로 둘까?
- “10월 단풍처럼 떠나간 이여! 잊지 않고 함께 하리라!”
- 물타는 국힘…책임자 처벌 쏙 뺀 이태원 특별법 발의
- 해 넘긴 이태원 특별법…"국회는 유족 눈물 기억하라"
- 여당 불참 속 이태원 특별법 통과…대통령 거부권 우려
- "대통령님, 유가족을 10분만이라도 만나주십시오"
- 경찰, 민들레 '이태원 참사 명단 공개' 기어이 검찰 송치
- "민들레 '이태원 명단 공개' 검찰 송치는 정부의 책임 전가"
- '애완견' 전성시대와 '감시견' 민들레의 현실
개의 댓글
댓글 정렬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