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길섶 첫 장편소설 '엄마가 말할게' 펴내
딸을 잃은 엄마의 삼보일배 70여일 여정
희생자는 말이 없고 정부가 덮은 그 골목
엄마와 그 일행의 입을 빌어 전하는 진실
참사 1주기를 맞아 이태원 참사를 배경으로 하는 장편소설 〈엄마가 말할게〉(섶나무)가 나왔다. 그날 친구를 만나러 이태원에 갔다가 뜻하지 않게 죽음을 당한 외동딸을 둔 엄마가 딸의 49재를 마치고 전북 부안 줄포 자신의 집에서 딸이 숨져간 서울 이태원 골목까지 삼보일배를 하며 나아가는 70여 일 동안의 여정을 그렸다.
졸지에 딸을 여읜 엄마로서 그 슬픔을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거니와 참사를 서둘러 덮으려는 정부, 핼러윈 사고라고 폄훼하는 극우 언론의 행태를 이해하기 어려운 터. 차를 타면 서너 시간에 닿을 거리를 엄동설한 70여 일의 시간으로 치환한 것은 작가의 불가피한 선택일 것이다. 그러니까 소설은 유가족이 자식이 묻힌 가슴을 안고 진실을 덮은 허위를 헤집어 왜곡을 바루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찾아가는 성장 스토리에 해당한다.
작가 고길섶은 문화비평가이자 지역 활동가. <우리시대의 언어게임> <문화비평과 미시정치> <어느 성소수자의 사유> <부안 끝나지 않은 노래> <스물한 통의 역사진정서> 등의 책을 썼다. <엄마가 말할게>는 작가의 첫 장편소설인데, 우리문화의 구석진 곳에 눈길을 주어온 지은이의 문제의식이 소설 형식으로 발화한 셈이다. 전작들이 직설이라면 이번 저작은 등장인물의 입을 빈 간접화법이랄까.
1주기를 맞아, 진실을 극구 감추려는 국가에 맞서 민간 자원자들이 생존자와 유가족의 파편적 증언을 모아 <우리 지금 이태원이야>(창비)를 펴낸 점을 감안하면 작품으로 형상화하기엔 때 이른 감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작가가 소설을 쓴 것은 뒤틀린 현실을 살아내는 대한민국 지식인으로서 벽 보고 중얼거리기라도 해야 하는 당위가 앞섰기 때문이라고 본다.
삼보일배 일행은 딸 율희를 잃은 서영, 죽은 남편의 절친인 혁진, 보급차 운전자 동탁, 고양이 찰스.
여정이라고 했거니와 초반에는 혁진의 입을 빌어 전하는 1947년 해고와 테러에 대항하여 3000여 면민이 봉기한 줄포, 동학농민혁명군과 한국전 빨치산이 거쳐간 고부, 일본인 농장주 구마모토가 조선인의 고혈을 빨아간 숙구지 등의 사연을 전한다.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이태원 참사의 전후 사정이 이와 다르지 않음을 암시한다.
북상하는 일행이 금강에 이를 즈음 비로소 이태원을 말하는데, 서영을 통해 유가족의 속마음을 전한다.
“대형참사로 죽어간 희생자들에 대해 사회적으로 희생자들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은 의례화 되어 있다면, 그 누구라도 그 희생자가 혹시나 자기 자신이 되었을 때도, 죽어가는 그 몇 초의 극한 상황에서 인생의 숱한 장면들이 광속도로 스쳐 가면서도 살아있는 사람들이 자기를 기억해주겠구나, 하고 그나마 위안을 삼을 거예요. 죽음조차 억울한데 자신의 이름마저 사라져버린다면 그처럼 황망한 것이 있을까요?”
민들레 이야기가 이채롭다. 서영이 “새로 생긴 시민언론이라고 하던데, 거기서 희생자 명단을 공개했잖아요.”라며 운을 떼자 혁진은 “그런데 웃기는 게요, 희생자 명단을 공개했다고 경찰이 압수수색을 했어요. 공무상 비밀누설,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정권이죠.”라고 맞장구친다.
금강변에서 서영은 백일몽을 꾼다. 얼굴도 발도 없이 우우우~웅! 소리를 내며 물 위를 떠다니는 기이한 형체들. “오, 맙소사! 너희들은 몸뚱아리만 있는 혼체로구나. 왜 여기에 떠돌고 있느냐” “우리가 죽었을 때 인간들이 우리를 죄인으로 낙인찍었기 때문에 저승사자들은 우리를 명부로 데려가지 않고 곧바로 지옥(염부주)으로 데리고 가버렸다. 이미 이름과 얼굴이 없어져 염라왕의 심판을 받을 수도 없었다. 염부주는 타지도 소멸되지도 않고 오로지 삶아지는 고통만이 존재하는 지옥이다.”
작가는 혼체들의 이름을 회복하는 방법으로 혼체들이 자신의 행장과 심정을 서영에게 들려주는 방식을 취한다.
구청 문화센터에서 알바를 하고 자격증 공부를 하던 취준생. “머리는 엉클어지고 얼굴엔 온통 깨알 같은 피멍투성이의 내 모습을 보고 엄마는 얼마나 오열했을까.” 두 탕을 뛰며 생계를 꾸리는 아빠를 대신해 친척 결혼식을 가야 했던 17살 고2. “바쁜 엄마를 대신해 돌봤던 두 살짜리 막내는 커서 나를 기억할까.” 영화배급사 창업을 꿈꾸며 자격증,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던 소녀. “살살 다니며 코로나 조심해, 라는 엄마한테 걱정하지마 허망하게 안 죽어, 라고 했었는데, 허망하게 죽어버렸네.” 연인과 이태원을 찾았다가 함께 죽은 예비신랑.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공부 마치고 한국에 정착하려고 바쁘게 살았다”는 카자흐스탄 유학생, 아내와 초등학교 다니는 두 아들을 남겨둔 마흔여덟 아빠. 만우절 과를 바꿔 수업을 듣고 과 모임을 바꿔 나가기도 했다는 쌍둥이 형제 등등. 어쩌겠는가. 죽은 자는 말이 없기에 꿈을 빌어 그 목소리를 전하는 수밖에.
삼보일배 일행에 고양이 찰스를 포함시킨 까닭은 무엇일까? 초반에 품은 의문은 일행이 아산호 쌀조개섬에 이르러 풀린다. 소설의 클라이막스에 해당하는데, 동물들이 등장해 인간들을 꾸짖는 신소설 <금수회의록>의 형식을 빌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국정을 농락해온 ‘굥총’의 탄핵심판을 다루기 때문이다. 인간세계에서는 불확실한 미래에 해당하는데 동물의 입을 빌어 작가가 든 탄핵소추안은 3개로 요약된다. ①집무실을 이전 리모델링하며 비선출인 배우자가 주도하고, 역술인이 개입하여 혈세를 낭비한 사실. ②법무부 장관을 움직여 자신의 권력 구축에 방해되는 정치인과 기자들에 대해 수사권을 남용하여 협박하거나 기소하도록 요청한 사실. ③배우자가 외교무대에까지 진출하여 굥의 위치를 차지하는 한편 방정맞은 언행으로 국격을 훼손한 사실. 주권자위원의 표결에 앞서 전문가들이 ‘굥총’의 잘못된 국정운영을 시시콜콜 성토한다. 대체로 속칭 ‘굥 대통령’이 보여온 행태와 흡사하다. 소설 속 동물세계에서 벌어진 탄핵 장면은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서영은 딸의 친구로부터 딸이 넘어져 밟혀서가 아니라 서 있는 상태로 죽었다는 말과 함께 딸이 남긴 최후의 문자 ‘사랑 이후에 가는 곳도 사랑이다’라는 내용을 전달 받는다. 서영은 그 말에 담긴 뜻을 알았을까?
“율희야 미안해, 엄마가 말할게.” 소설의 표제이기도 한 이 말은 서영이 70여 일의 장정 끄트머리에서 깨달은 어머니의 다짐이자 작가가 350쪽 소설을 통해 내내 실천한 대한민국 지식인의 행동이기도 하다. 어쩌면 고양이 찰스가 목격한 동물세계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아 참. 일행 중 동탁은 이름과 함께 그 역할이 독특한데 독자들이 찾아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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