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디언' 1주기 사흘 앞두고 서울발 기사
“우리 아이들이 범죄자 취급을 받았다”
희생자들을 마약 복용 거래자로 의심
집권당 대표, 진상규명 활동 “북한 지령” 매도
“우리가 바라는 건 그 순간의 진실”
“'우리 아이들이 범죄자 취급을 받았다': 서울의 치명적인 군중 압사사고(crush) 이후 1년, 부모들은 정의를 추구한다”
“159명 목숨을 앗아간 서울 압사사고(crush)를 '인재'로 명명한 경찰 조사, 1년이 지났지만 피해자 가족들은 공식적인 사과를 받은 적 없고, 독립적인 조사도 없었으며, 책임도 지지 않았다”
<가디언> 1주기 사흘 앞두고 서울발 기사 게재
서울에 거주하는 프리랜스 저널리스트이자 ‘우리가 보려고 하지 않는 한국’의 저자 라파엘 라시드Raphael Rashid가 ‘이태원 참사’ 1주기를 사흘 앞둔 26일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 기고한 글의 제목과 도입부다.
“최민석의 방에는 시간이 멈춰 있다. 책상에는 사진과 기념품이 흩어져 있다. 지갑 속에는 건강하고 행복하라는 어머니의 말이 적혀 있다. 작은 주머니 안에는 옥빛 사리로 변한 그의 유골이 들어 있다. 19세 때 군 복무를 마치고 간호사가 되겠다는 꿈을 품었다. 그의 의과대학 조끼는 아직도 벽에 걸려 있다. 어머니 김희정씨는 말했다. '나는 그 아이를 추모관으로 보낼 준비가 돼 있지 않다’ ‘우리(부모)는 아직 숨쉬고 살아 있지만 죽은 거나 다름없다’ ”
희생자들을 마약 복용 거래자로 의심
2022년 10월 29일 팬데믹 관련 규제가 풀린 뒤 처음으로 열린 서울 이태원 핼러윈 축제는 졸지에 외국인 26명을 포함한 159명이 좁은 통로에서 서로 짓눌려 질식사하는 참변으로 변했다. 희생자들 대부분이 최민석 또래의 젊은이들이었다.
그 뒤 1년, 유족들은 당국이 희생자들을 마약 복용자로 몰아 자신들의 책임을 전가하려 한다고 비판해 왔다. 라파엘 라시드가 만나 본 유족들은 “관리들이 그들의 탄원을 무시했으며, 책임을 규명하기 위한 독립적인 조사를 실시하지도 못했다”고 비판했다.
경찰은 군중 통제 등 사고예방 조치를 제대로 취하지 않았고 대응도 늦었던 이태원 참사를 ‘인재’로 규정하는 보고서를 냈으나 지금까지 형사처벌을 받은 관리들은 단 한 명도 없다고 <가디언>에 실린 그의 글은 지적했다. “유족들은 아직 공식적인 사과를 받지 못했고, 윤석열 대통령 등 고위 인사들과의 면담을 요청했으나 묵묵부답이다.”
여당 대표, 진상규명 활동 “북한 지령” 매도
지난달 여당인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는 촛불시위와 추도식, 책임추궁 등을 통해 이태원 참사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활동을 “북한의 지령”에 따른 것이라고 매도했다.
또 한 사람의 희생자 이주영(28)의 아버지 이정민씨는 모든 게 “수수께끼에 싸여 있다”면서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우리 아이들이 어떻게, 왜 죽었는지, 그것뿐”이라고 말했다. 유족들은 자신들을 외면한 당국에 대해 “우리를 만나지 않고 어떻게 진상규명을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당국에 대한 뿌리깊은 의심과 진실 추구가 싸움의 동력
9월로 예정된 결혼을 앞두고 웨딩드레스 상담을 마치고 이태원을 지나가다 군중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 변을 당한 딸의 약혼자로부터 전화를 받고 현장으로 달려간 이정민씨는 “완전한 혼란상태(카오스)”였다고 말했다. “교통과 군중 통제가 전혀 없었다. 긴급차량 통행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수많은 사망자와 생존자들이 즉각적인 응급 처치를 받아야 하는 위급한 상황에서 당국은 그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독립적인 수사를 위한 법안 통과 캠페인을 벌여 온 이씨는 유족모임 대표를 맡고 있다. 그는 유족들이 지난 1년 동안 정부를 상대로 끈질기게 싸워 온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당국에 대한) 뿌리깊은 의심과 진실 추구”라고 했다.
마약혐의 조사, 치안자원 낭비하고 책임 전가한 ‘언론쇼’
이씨는 사고 당일 오전 취재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태원에서 진행된 마약단속 활동을 두고 사고방지를 위한 중요한 자원을 엉뚱한 데 쏟아부은 ‘언론쇼’였다고 비판했다. 그는 그날 이른 저녁부터 군중 과밀화가 눈에 띄게 진행됐지만 경찰의 관심은 군중 통제보다는 온통 마약 단속에만 쏠려 있었다고 지적했다.
“압사사건이 있은 지 며칠 뒤 경찰은 마약 검사를 위해 현장에서 물품을 수거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과는 모두 음성으로 나왔다. 일부 가족들은 마약 흔적을 확인하기 위한 부검을 허락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는 당국이 책임을 전가하려 한다는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또 압사사고가 일어날 위험이 있다는 것을 사전에 인지한 경찰 내부 보고서가 폐기됐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연루된 것으로 의심되는 경찰관 중 한 명이 (보고서) 은폐 혐의로 정직을 당한 뒤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인다. 다른 두 명의 전직 경찰관도 재판을 받고 있으나 지난 6월 보석으로 석방됐다.”
“죽은 아들 금융기록까지 조사”
김희정 씨는 아들(최민석) 사망 뒤 당국이 조사를 위해 아들의 금융기록에 접근했으며, 그것은 그때까지도 당국이 아들의 마약 거래 증거를 찾으려 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지난 4월 경찰은 유족들에게 희생당한 그들의 자녀들이 “부자연스런 죽음과 관련한 범죄(the crime of “unnatural death”) 혐의로 기소되진 않을 것이라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희생자 범죄좌 취급은 “국가폭력”
“우리 아이들이 왜 범죄자 취급을 받는 거지요?”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국가가 인정해야 한다며, 김 씨는 당국의 그런 식의 대처가 “터무니 없는 국가폭력행위” 같은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안타깝고 무한한 책임을 느낀다”고 했지만, 아직까지 공식사과한 적이 없다. 경찰은 지난 1월에 사고 당시 군중 통제 등 예방조치가 부족했고 당국의 대응 또한 늦었다는 점 등을 들어 ‘인재’로 규정하며 수사를 마무리했다. 사고 4시간 전에 압사 사고 발생 가능성을 경고한 12통의 전화가 걸려 왔음에도 경찰은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주요 사망원인은 압박 질식과 산소 결핍으로 인한 뇌 부종으로 판명이 났다.
여당, 진상규명 위한 법안 “정치화” 이유로 보이콧
그럼에도 행정안전을 책임진 관리 누구도 공식적인 사과조차 한 적이 없다. 재판을 받은 사람은 소수에 지나지 않으며, 형사처벌을 받은 사람도 없다. 검찰 수사는 더디게 진행되고 있고, 고위 관리들은 비판과 비난을 비켜갔다. 지난 7월 헌법재판소는 이상민 장관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기각했다.
국회는 최근에야 야당 주도로 독립적인 조사를 통해 압사사고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법안을 신속 처리하는 안건을 통과시켰으나 집권당인 국민의힘은 그런 입법이 재난을 “정치화한다”는 이유로 투표를 보이콧했다.
“우리가 바라는 건 그 순간의 진실”
이정민 씨는 수사 기간 내내 유족들은 외면당했다면서. “문제가 없다면 우리를 만나서 이해하게 만들었어야 한다. 그런데 마치 뭔가를 숨기는 것처럼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올해 핼러윈을 앞두고 당국은 안전 조치 및 군중 통제를 대폭 강화하겠다고 약속하면서 군중제어 시스템 구축 등의 조치를 취하면서,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되는 홍대가 있는 서울 마포구에 핼러윈 축제 금지 현수막을 내걸었다. 주요 소매업체들도 올해 핼러윈 프러모션을 축소했다고 <가디언>은 썼다. 축제를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게 아니라, 축제 자체를 취소하거나 축소하는 것으로 사고를 막겠다는 것이다.
이정민 씨는 “우리는 그날, 그 순간의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기를 원한다”고 거듭 말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로워지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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