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미국 주도 블록 "의무로 짜인 새장"에 비유
국가주권·자유 제약…"자주적 행동시 제거 대상"
"냉전 승리자들, 러시아의 선의를 복종으로 여겨"
푸틴 "우크라 전쟁, 새 국제질서 원칙에 관한 것"
"의무로 짜인 새장"(a cage of obligations).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미국과 서구 주도의 ' 블록(진영)'을 겨냥해 던진 말이다. 푸틴 대통령은 5일 러시아 남부 소치에서 열린 '발다이 국제 토론클럽' 본회의 연설에서 "블록은 개별국가의 권리를 제한하고 자기식으로 발전할 자유를 제약한다"며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유럽과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아시아 등에서 "접근이 제한된 블록들이 만들어지고 개방적이고 포용적 협력체계가 파괴되고 있다"며 "블록 기반 접근법은 어떤 면에서 그들(개별국가)의 주권 일부를 탈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연설문은 러시아 크렘린궁 누리집에 실려 있다.
연설에서 푸틴은 △ 소련 해체와 서구 패권주의 △ 나토의 러시아 문전 박대 △ 우크라이나 전쟁의 발발 경위와 성격 △ 서구 '규칙 기반 질서'의 허구성 △ 세계대전 가능성과 지속적 평화 달성 방법 △ 다양한 '문명국가들'로 구성된 인류공동체 등에 관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서방의 공적'인 푸틴은 서방을 겨냥해 맞불 놓기를 서슴지 않았다. 연설에서 그는 "세계를 '미국과 그들의 대결' 구도로 밀어 넣는 것은 20세기의 악습"이라며 "서구 엘리트는 군사적 행동과 확장 필요성을 정당화하고자 늘 적을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한때 자신이 나토 가입 의사를 타진한 적이 있었으나 문전 박대를 당했다는 게 푸틴의 주장이다.
"냉전 승리자들, 러시아의 선의를 복종으로 여겨"
중국과 인도, 아시아, 아랍, 무슬림 세계 등을 예로 든 푸틴은 서방 정치꾼들은 "서구 엘리트 그룹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는 이들을 적으로 묘사한다"며 "자기 이익에 따라 자주적으로 행동하면 누구나 서구 엘리트에 의해 즉시 제거해야 할 장애물로 간주된다"고 덧붙였다.
소련 해체와 냉전 종식 이후 서구의 패권적 태도에 대한 비판도 나왔다. 그에 따르면, 러시아는 20년 전 소련 해체 이후 고난의 시기를 벗어나고 있었고, "열정과 선의를 가지고 새롭고 더 공정한 세계를 구축하는 여정"을 시작했다.
그러나 "냉전의 승리자들"은 그런 선의를 새 국제질서에 대한 서방의 절대적 주도권을 '용인'하고 '복종'하겠다는 것으로 오해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푸틴은 "이른바 서구 파트너들의 오만이 하늘을 찔렀다"고 말했다.
푸틴의 주장에 따르면, "미국과 그 위성국들"은 군사, 정치, 경제, 문화, 심지어 도덕과 가치 분야에서조차 패권의 길을 착착 밟아왔다. 서구의 번영은 수 세기의 식민지 강탈, 근본적으로 전 지구에 대한 수탈 위에서 이룩됐다.
그는 "서구의 역사는 끝없는 팽창의 연대기"라며 "서구의 영향력은 자신을 지탱하고자 타국의 자연·기술·인간 자원을 가지고 끊임없이 더 많은 "연료"를 요구하는 어마어마한 군사적, 금융적 피라미드 사기"라고 비판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누가''언제' 일으켰는가 하는 대목에서도 푸틴은 2022년 2월 24일 '불법 침공한' 자신을 주범으로 지목한 서방 진영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출발점은 20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당시 친러 정책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 끝에 빅토르 야누코비치 정권이 축출된 이른바 '유로마이단 혁명'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는 "2014년 키예프(우크라에선 키이우)에서의 쿠데타, 반헌법적 유혈 쿠데타를 조직한 것은 우리가 아니었다. 다른 곳에서 일어났다면 반민주적인 것으로 용납되지 않았을 것이지만 키예프의 쿠데타는 용인됐다"라며 서방의 '공작' 가능성을 거론했다.
푸틴 "우크라 전쟁, 새 국제질서 원칙에 관한 것"
푸틴은 "진짜 진행되는 게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들은 9년간 돈바스에 총격을 가하고 탱크를 몰고 폭격을 가해왔다. 돈바스를 상대로 벌인 전쟁이, 진짜 전쟁이다. 누구도 돈바스에서 숨진 어린이를 세지 않았고, 다른 나라, 특히 서구에서 그 숨진 이들을 위해 아무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현 키예프 정권이 서구의 강력하고 직접적 지원을 받으며 개시한 이 전쟁은 9년 넘게 진행 중이었고, 러시아의 특수군사작전은 전쟁의 중단을 목표로 삼은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성격에 대해 푸틴은 "영토 분쟁이 아니다. 러시아는 육지로만 따지면 세계에서 가장 넓은 나라다. 우리는 추가 영토를 정복하는 데 관심이 없다"라며 "더 광범위하고 근본적이며 새로운 국제질서 원칙에 관한 것"리라고 덧붙였다.
그는 "선택되고, 순결하며 옳다고 여기는 자들이 의사결정 하는, 전횡이 지배하는 국제 시스템에서는 어떤 나라든 분수를 모르고 현실감각을 잃은 패권국이 단지 싫어한다는 이유로 공격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푸틴은 "어느 나라도 일방적으로 다른 나라를 압박해 자국의 주권과 진정한 이익, 인민의 전통이나 관습과 충돌하더라도 패권국이 원하는 대로 살거나 행동하도록 할 수 없어야 한다"며 "그렇지 못하면 바로 그 주권의 개념은 바로 부정되고 쓰레기통에 버려진다"고 지적했다.
"2등 파트너나 왕따, 미개인으로 보는 것 중단해야"
이른바 '규칙 기반 질서'(rule-based order)와 관련해 그는 미국과 서구의 패권을 달성하려고 내놓은 것으로 국제법을 대체하려 한다고 본다. 푸틴은 "미국은 이런 규칙을 자의적으로 만들고 남에게 어떻게 따를지를 가르친다"며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은 아주 무례하고 강압적인 방식으로 이뤄지고 표현되는 데 이것은 식민적 멘탈리티의 또다른 표현"이라고 봤다.
푸틴이 보기에 그런 무례하고 강압적 행태는 다양한 이념적, 도덕적 정당화를 통해 지난 수 세기에 걸쳐 '큰 전쟁'이 반복되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는 "오늘날 특히 위험하다"며 "인류는 전 지구를 쉽게 파괴할 수단을 지녔고, 믿지 못할 만큼 대규모 심리 조작이 진행되면서 현실감각의 상실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푸틴은 인류를 서로 대결하는 새로운 블록들로 해체하려는 방향이 아니라, 우열 없고 다양성과 자족성을 지닌 '문명국가들'이 상승 작용을 일으키는 세계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러시아는 △ 개방적이고 상호연결된 세계 △ 세계의 다양성 △ 최대한의 자기 대표성 △ 모두의 이익 존중에 기초한 보편적 안보와 지속적 평화 △ 모두를 위한 정의 △ 모든 나라의 다양한 잠재력을 위한 평등 등 새로운 세계체제를 뒷받침할 6가지 원칙을 제시하기도 했다.
푸틴은 "주안점은 국제관계를 블록 접근법과 식민시대와 냉전의 유산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라며 "오만과 거만을 제쳐두고 다른 나라를 2등 파트너나 왕따나 미개인으로 보는 것을 중단해야만 한다"고 덧붙였다.
국제형사재판소(ICC) 체포영장까지 발부됐을 정도로 국제사회에서 '공공의 적'으로 낙인이 찍힌 푸틴 대통령 나름의 항변이다.
관련기사
개의 댓글
댓글 정렬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