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눠먹기식 R&D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 지시에

내년 R&D 예산 3조4천억 줄인 21조5천억 책정

기초연구 예산· 정부출연연구기관 예산 대폭 줄여

“모든 과학자를 특정 카르텔처럼 보는 것 지나쳐”

R&D 예산 삭감은 국가혁신역량 훼손하는 자해행위

윤석열 대통령 한마디에 내년 연구개발(R&D) 예산을 3조4000억 원이나 삭감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과기정통부)가 22일 확정한 ‘2024년도 국가연구개발사업 예산 배분·조정안’에 따르면 내년 R&D 예산은 올해보다 13.9% 줄어든 21조5000억 원으로 책정됐다. 국회 의결 전 정부 R&D 예산안이 삭감된 것은 2016년 이후 8년 만이다. 선진국들은 국가 R&D 예산을 좀처럼 줄이지 않는다. 첨단 기술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어 국가 혁신역량을 높여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2000년대 이후 R&D 예산을 꾸준히 늘려왔다.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22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정부 연구·개발(R&D) 제도 혁신방안과 '2024년 국가연구개발사업 예산 배분·조정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2023.8.22. 연합뉴스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22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정부 연구·개발(R&D) 제도 혁신방안과 '2024년 국가연구개발사업 예산 배분·조정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2023.8.22. 연합뉴스

이번에 정부가 R&D 예산을 이례적으로 삭감한 이유는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서 비롯됐다. 윤 대통령은 지난 6월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R&D는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과학계에 ‘R&D 카르텔’이 만연하다는 편견에서 나온 발언인데 명확한 실체는 언급하지 않았다. 더 많은 R&D 예산을 확보해야 할 과기정통부는 한술 더 떴다. “역대 정부는 예산을 늘리기 쉬운 길을 걸어왔다면 윤석열 정부는 낡은 R&D 관행과 비효율을 걷어내고 선도형 R&D로 나아가는 어려운 길을 선택했다”며 윤 대통령을 거들었다.

윤 대통령의 R&D 예산안 전면 재검토 지시에 정부는 108개 사업을 통폐합하는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기초연구 예산과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 예산이 된서리를 맞았다. 기초연구는 올해보다 6.2% 줄어든 2조4000억 원이 배정됐고 출연연 예산은 올해보다 10.8% 감소한 2조1000억 원이 책정됐다. 나눠주기식, 관행적 추진, 유사 중복 사업 등으로 지목된 기업지원 R&D 예산도 삭감됐다. 문재인 정부 때 증액됐던 감염병 대응과 소재·부품·장비 분야의 예산도 대폭 줄였다.

과학계는 황당하다는 반응이다. R&D 성과는 효율성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장기적으로 꾸준한 투자가 이루어져야 한다. 실패 경험이 쌓여야 혁신이 나올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기초연구와 출연연 예산을 삭감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정부 R&D 제도혁신 방안. 붉은 상자 내용이 R&D 예산삭감 내용. 
정부 R&D 제도혁신 방안. 붉은 상자 내용이 R&D 예산삭감 내용. 

윤 대통령은 R&D 예산의 갈라먹기식, 나눠먹기식 관행을 깨야 한다고 하지만 이는 과학계 탓만으로 돌릴 수 없다. 예산을 배분한 주체는 기획재정부와 과기정통부, 중소벤처기업부 등 정부 부처다. 대통령의 호통에 즉흥적으로 예산을 줄이기보다 구조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면밀하게 파악하는 게 먼저다. 원인을 정확하게 짚어야 올바른 처방이 나올 수 있다. 김복철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 이사장은 “국민 세금을 적재적소에 잘 배치해서 효과를 높여야 하겠지만 모든 과학자들이 특정 카르텔처럼 비추어지는 지금의 상황은 아쉬울 뿐”이라며 “예산이 비효율적으로 쓰이면 현장과 소통하면서 합리적으로 조정해야지 일괄적으로 깎으면 혼란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들은 첨단 기술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국가 R&D 투자를 늘리고 있다. 원천 기술을 확보하려면 무엇보다 기초연구가 중요하다. 다른 예산은 몰라도 기초연구를 위한 R&D 투자를 줄여서는 곤란하다. R&D 예산 사용의 효율성을 높이겠다며 R&D 예산 전체 규모를 줄이는 것은 국가 혁신역량을 훼손하는 자해행위와 같다.

일본의 수출규제가 풀리고 코로나19 팬데믹이 지났다고 감염병 대응과 소재·부품·장비 R&D 예산을 깎는 것도 문제다. 팬데믹에 대비한 백신 개발은 꾸준한 투자가 필요하다. 바이오 강국으로 가기 위해서도 팬데믹 대응 예산을 줄여선 안 된다. 소재와 부품, 장비도 기초연구가 쌓여야 일본과 독일 등 선진국을 추격할 수 있다. R&D 예산의 효율적 관리를 넘어 더 많은 도전적 과제에 투자를 아끼지 않아야 국가의 혁신역량을 높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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