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국가들 "비 서구국에 강요된 서구의 규칙"
반중국·반러시아 윤석열도 "규범 기반 질서 수호"
러 우크라 침공과 미 이라크 침공은 같은가 다른가
"중국, 서구 단합이 많은 나라 소외시킨다고 믿어"
글로벌 사우스, 미국 주도 자유주의 질서에 시큰둥
"이른바 '규칙 기반 질서'(Rules-Based Order)란 말의 톤을 낮추라."
뉴욕 소재 비영리단체인 아시아 소사이어티(Asia Society)가 지난 1일 공개한 '미국의 대중 정책에서 동남아를 우선으로 삼아야'란 제목의 보고서에서 동남아에서 영향력 확대를 위한 차원에서 조 바이든 미 행정부에 동남아인 전문가들이 권고한 15개 사항 중 하나다.
그렇게 권고한 배경에 대해 아시아 소사이어티는 "동남아인들은 '규칙 기반 질서'란 미국의 주장에서 위선을 보고 서구의 규칙을 비서구 국가들에 강요하는 것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실제로 바이든 행정부는 '규칙 기반 질서'란 말을 애용한다. 특히 작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기회 있을 때마다 '규칙 기반 질서'의 수호를 역설하고 있다.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와 유럽은 물론 한국과 일본 등 동맹국들도 '규칙 기반 질서' 수호 대열에 동참했다. 때론 '규범 기반 질서'(Norms-Based Order)라는 말이 혼용되기도 한다.
동남아 "규칙 기반 질서는 위선…서구 규칙 강요"
파이낸셜타임스(FT)는 '더 래크맨 리뷰'(4월 20일 자)에서 '규칙 기반 질서'에 대한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의 발언을 소개했다.
블링컨의 견해에 따르면, '규칙 기반 질서'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은 뒤 국가 간 관계를 관리하고 충돌을 예방하며, 모든 국가 국민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세계가 함께 구축한 법규와 협정, 원칙, 제도의 시스템이다. 정초가 된 문건에는 자결권, 주권, 분쟁의 평화적 해결 개념을 담은 유엔 헌장과 세계인권선언이 포함된다.
미국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이런 규칙 기반 질서에 대한 공격으로 이해한다. 독일 싱크탱크인 유럽외교위원회(ECFR)의 마크 레오너드 위원장(포린 어페어즈 6월 20일 자 기고문)에 따르면, 워싱턴에서는 러시아의 침공 행위는 규칙 기반 질서에 대한 도전이며, 응전을 통해 더 강화해야 한다는 게 지배적 관점이다.
그러나 베이징에선 다르다. 러·우 충돌로 세계는 '무질서'의 시대로 진입했고 그런 만큼 각국은 스스로 이를 견뎌낼 수 있도록 대처해야 한다는 게 지배적 관점이라는 것이다. 레오너드가 보기에 많은 나라, 특히 글로벌 사우스((아시아와 아프리카, 중동, 중남미의 개도국)는 중국의 관점을 공유하고 있다.
러 우크라 침공과 미 이라크 침공은 같은가 다른가
규칙 기반 질서를 수호하자는 서구의 주장은 글로벌 사우스에서 잘 먹히지 않는다. 그들 대부분은 규칙 제정에 발언권이 없어 정당하지 않다고 본다.
그리고 서구가 규범을 선택적으로 적용하고 자기 이익을 위해 자주 규범을 바꾸거나,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처럼 때론 무시한다고 믿는다.
그 밑에는 거짓 명분을 만들어 이라크를 침공하고 베트남전을 수행한 미국과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느냐, 우크라이나 전쟁도 특별하지 않은 '또 하나의 전쟁'일 뿐 아니냐고 항변하는 비서구권의 인식이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서구 바깥의 많은 나라에선 규칙 기반 질서에 대한 담론은 오래전부터 '서구의 힘'이란 치부를 가리는 수단으로 여겼다. 국제문제를 다루는데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법이 아닌 원초적 힘인 게 사실인데도 미국 등 서구가 '위선'을 떨고 있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러시아의 우크라 침공과 미국의 이라크 침공, 베트남전 수행이 다르다는 반론도 있다. 존 아이켄베리 프린스턴대 석좌교수는 FT의 '더 래크맨 리뷰'에서 러시아의 우크라 침공에 대해 "전후 유엔과 냉전 후 시기에 유럽과 세계의 안정적 평화를 위한 조건에 관한 '규칙'을 가장 공공연하고 폭력적으로 공격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 세 가지 핵심 규칙으로 △ 힘을 사용해 영토 경계를 바꾸지 않는다(힘에 의한 현상 변경) △ 전쟁 수단으로 민간인을 상대로 폭력을 쓰지 않는다 △ 핵무기 사용을 위협하지 않는다 등을 거론하고 러시아가 이를 모두 위반했다면서 "이것이 규칙 기반 질서에 대한 진정한 위기"라고 덧붙였다.
반중국, 반러시아 윤석열도 "규범 기반 질서 수호"
반중국, 반러시아 전선에서 행동대장을 자임하는 윤석열 대통령도 규칙(또는 규범) 기반 질서수호란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윤 대통령은 지난 5월 21일 히로시마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확대 세션 연설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국제 규범과 법치를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이라며 "규범에 기반한 국제질서가 회복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앞서 3월 29일 바이든 대통령과 공동 주최한 제2차 민주주의 화상 정상회의에서 윤 대통령은 세션 모두 발언을 통해 중국과 러시아를 사실상 겨냥한 뒤 "규범 기반 국제질서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권위주의 세력들의 진영화에 더해 반지성주의로 대표되는 가짜 민주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고개를 들고 있다"고 비난했다.
미국이 주장하는 규칙 기반 질서는 바꿔 말하면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적 국제질서'(US-led Liberal International Order)라고 할 수 있다. 미국과 동맹국인 나토와 한국, 일본, 그리고 유럽과 선진국 그룹인 G7과 같은 서구 진영 중심의 가치와 이익, 힘이 반영돼 있다.
규칙 기반 질서에 대해 블링컨 국무장관은 "서구의 생각이 아니라 세계의 공유된 열망이 반영된 것"이라고 그 보편성을 주장했지만, 동남아 등 글로벌 사우스에선 여전히 시큰둥하다.
아시아 소사이어티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5월 싱가포르 비공개 토론회에 참석했던 한 동남아 전문가는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에 대해 "자유주의적이지도, 국제적이지도, 하나의 질서도 아니다"라고 혹평했다.
"중국, 서구 단합이 많은 나라 소외시킨다고 믿어"
레오너드 위원장은 "미국은 냉전 블록을 구축해 소련을 제압한 전략을 되풀이하고자 세계를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로 나누고 동맹국들을 동원하고 있는 반면, 중국은 자결권과 다자 연대가 이념 충돌을 이기는 시대로 세계가 진입하고 있다고 보고 그런 전망에 걸맞은 정책들을 추구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레오너드는 지금 시기는 세 가지 점에서 냉전 시대와 다르다고 봤다. 첫째는 오늘날 이념들이 훨씬 더 약화됐고, 둘째 워싱턴과 베이징의 세계 지배 정도가 1945년 이후 미·소에 비해 많이 축소됐으며, 셋째로 오늘날의 세계는 극도로 상호의존적이 됐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그는 "중국 지도자들은 파편화된 세계에 대비함으로써 대담한 전략적 베팅을 하고 있다"면서 "중국공산당은 서구가 해체돼서가 아니라 서구의 단합이 많은 다른 나라를 소외시키기 때문에 세계가 '서구 이후의 질서'(a post-Western order)로 이행하고 있다고 믿는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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