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강 외교부장 이어 왕이 정치국원과 대면 논의
빨라지는 양국 움직임…바이든 대선 전략 연동
미국 대기업 CEO들 방중 러시, 경제적 이해도
우크라이나 전쟁에 중국 입장 매우 중대한 요소
“중국을 잃는 것이 정말로 미국의 이익이 될까. 중국을 러시아 쪽으로 밀어내는 것이 정말로 미국의 이익이 될까. 미국은 이성적으로 신중하고 역사의 검증을 견뎌낼 수 있는 중국 전략을 짜야 한다.”
중국의 미국문제 전문연구자 션딩리 푸단대학 국제문제연구원 교수가 한 말이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의 중국방문 이틀째인 19일 일본 <아사히신문>에 실린 그의 인터뷰 기사에 들어 있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미국이 바라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서의) 철수를 금방 실현시키기는 어렵겠지만, 곤란한 과제일수록 중국과 미국이 함께 대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쌍방 협의를 통해서 새로운 공통인식을 찾아야 한다.”
친강 외교부장에 이어 왕이 정치국원과 회담
블링컨 장관은 자신의 첫 중국 방문인 이번 방중 일정에서 첫날인 18일 친강 중국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과 약 5시간 반에 걸쳐 회담한 뒤 다시 약 2시간에 걸쳐 만찬을 함께 했다. 둘쨋날인 19일엔 중국공산당 외교부문 최고위직 관리인 왕이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과도 회담했다. 왕이는 지난 달 오스트리아 빈에서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과 8시간이나 회담한 적이 있다. 이렇게 최고위직들의 긴 대화가 거듭되는 것은 양자 간에 뭔가 진전이 이뤄지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블링컨의 이번 방중에서 양국이 다룬 문제들과 관련한 공식 발표는 아직 없지만 친강 부장이 얘기했듯이 “양국이 국교를 정상화한 이래 가장 저조한” 지금의 양국관계에서 우발적 군사 충돌 등이 야기할 수 있는 위기 관리 문제, 대만 문제, 미국이 겨냥해 온 중국의 전략물자 ‘공급망’ 배제와 첨단반도체 공급 차단 문제, 그리고 우크라이나 전쟁 문제 등이 주요 안건으로 다뤄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번의 블링컨 방중을 비롯해서 최근의 양국 접근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선도하고 있는 것은 미국 쪽이다. 지난해 11월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G20 정상회담 때 조 바이든-시진핑 첫 정상회담이 성사된 이후 두 나라의 접근 움직임이 빨라졌고, 블링컨은 원래 2월 초에 중국을 방문하기로 합의가 돼 있었다. 그의 중국 방문 바로 전에 터진 중국 고공 기구(풍선)의 미국 ‘영공 침범’ 소동으로 그 방문은 일단 무산됐지만, 거기에는 미국 내의 거센 반중 여론이 영향을 끼쳤다. 특히 공화당이 하원 다수당이 된 의회 쪽의 반발이 컸다. 공화당이 바이든 정부의 대중국 정책을 비판할 때 늘 빠지지 않은 것은 “중국에 약한 자세를 보인다”는 것이다.
내년 11월 대선을 앞두고 있는 바이든 정부로서는 풍선 소동으로 한층 더 기세등등해진 의회쪽 반중 정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미국 거대기업 CEO들의 잇따른 중국행
이번에도 블링컨이 서둘러 중국 방문을 지금 시기로 잡은 것을 두고,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중국과의 교류나 협상을 ‘중국에 약한 자세’를 보이는 것이라고 보는 반중정서 또는 세력의 공세를 강화시켜 줄 가능성이 높고, 그것이 바이든의 재선 전략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에 대선 캠페인이 본격화하기 전에 서둘렀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었다.
또 한 가지는 미국의 경제적 이해가 걸린 미국 기업 총수들의 중국 방문이 올해 들어 줄을 잇고 있다는 것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3월에 애플의 CEO 팀 쿡, 그리고 거대 제약회사 파이저(화이자)의 CEO 앨버트 불라가 중국에 갔다. 4월에는 포드 자동차의 제임스 팔리가 중국을 찾았다. 5월에는 전기자동차 테슬러의 일론 머스크, 거대 금융회사 JP모건 체이스의 제이미 다이먼, 제너럴 모터스의 메리 배라, 커피 체인 스타벅스의 럭스만 나라시만 등 미국 거대기업들의 CEO가 중국에 갔고, 이번 달에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 빌 게이츠까지 가서 시진핑 주석을 만났다.
민주당 바이든 정부가 디커플링(탈동조화, 분리)까지 겨냥한 중국 압박 정책의 수위를 재조정하게 된 것은 유럽 쪽의 대중국 디커플링 반대 움직임 외에 자국 대기업들의 이런 움직임도 고려한 결과일 것이다. 한국과 같은 약자들에게나 통할 기업들의 이익 추구 통제에 거대 다국적 기업들이 고분고분할 리 없다. 바이든 정부로서는 내년 대선을 위해서라도 그들의 이해에 무관심하거나 불편한 관계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
대면 논의 핵심 의제의 하나는 우크라 전쟁
그러나 가장 관심을 끄는 것 중의 하나는 션딩리 교수도 지적했듯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양국 최고위 관리들의 대면 논의다.
션 교수는 앞서 한 이야기에 이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크라이나에서 주권국가의 국경이 힘에 의해 변경됐다. 이 문제에 대해 미국과 중국은 공통의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인가. 미국은 (러시아 쪽으로 기운) 중국에 불만이 있겠지만, (중국을 억누르려는) 미국의 자세가 중국을 그렇게 만든 면이 있다. 예전에 소련이 중국에 압력을 가한 것이 (중국을) 미국에게 접근하게 만들었던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중국에게 불만을 품지만 말고 왜 중국이 러시아 쪽으로 기울게 됐는지 자성해야 한다.”
예전에 소련이 중국에 압력을 가했다는 것은 1956년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의 스탈린 비판 이후 벌어지기 시작한 소련과 중국의 갈등이 1969년 우수리강 무력 충돌까지 이어진 ‘중소 분쟁’을 염두에 두고 한 이야기다. 바로 그 뒤에 미국과 중국의 ‘핑퐁외교’가 시작됐고, 중국은 소련 대신 미국과 손을 잡고 소련을 고립시켰다. 션 교수 얘기는 미중 분쟁이 이번에는 중국을 러시아에 기울어지게 만들었다는 주장이자, 미국의 고립 가능성을 가볍게 보지 말라는 경고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려면
지난 3월 시진핑은 모스크바를 방문해 푸틴과 회담할 때 12개 항목의 우크라이나 평화안을 제시한 적이 있다. 주권존중과 현상변경 불가 원칙을 지지하면서 러시아에 대한 일방적인 제재와 고립에 반대하는 내용이었는데, 미국 등 서방은 탐탁치 않게 여겼다.
이달 들어 서방의 지원이 더욱 강화된 가운데 우크라이나가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고 있지만, 지난 몇 개월 동안 깊은 참호를 파면서 방어진지를 정비한 러시아의 대응도 만많찮은 것으로 알려고 있다. 그런 가운데 전상자들이 크게 늘고 카호우카 댐 파괴 등으로 인한 전쟁 피해도 더욱 커지고 있다. 장기 참호전을 펴면서 우크라이나 산업시설을 파괴해 장기전 기반을 무너뜨리려는 전략을 구사하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우크라이나와 서방에 유리한 쪽으로 끝내려는 미국의 계산이 쉽게 먹혀들어가진 않을 것이라는 전망들이 나오고 있다. 미국에 불리한 국면이 펼쳐지면 바이든의 재선 가도에도 빨간 불이 켜질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국면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면 지금의 요소 투입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유럽과 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원은 지금까지 전쟁 수행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 왔으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서방의 지원에는 한계가 보이고 국민들이 느끼는 전쟁 피로도 짙어지고 있다는 보도들이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어떤 입장을 갖느냐는 것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래에 매우 중대한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휴전과 휴전 뒤의 러시아 푸틴 체제의 장래 문제도 중국이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블링컨도 얘기했듯이 오직 중국만이 그럴 힘을 갖고 있다.
중국은 자국을 사악한 상대로 규정하고 자국의 움직임을 '심각한 전략적 도전'으로 간주하는 미국의 '잘못된' 중국인식과 정책을 바꾸려 할 것이다. 협상이 이뤄지려면 양자가 서로 줄 것은 주고 필요한 것을 얻는 윈윈의 길을 찾아야 한다.
방문 첫 날의 블링컨-친강 회담에서 미중분쟁 문제가 집중 거론됐다면, 둘쨋날 블링컨-왕이 회담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어떻게 끝낼 것인지를 중심에 놓고 국제질서 전반에 대한 얘기가 오가지 않았을까. 션딩리 교수의 얘기도 그것을 염두에 뒀을 것이다.
블링컨의 방중으로 당장 큰 변화는 없겠지만, 이것이 오는 9월 인도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와 11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APEC) 정상회의 때 미중 정상회담으로 이어진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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