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 서거 14주기] 외교·안보·국방 분야 구술사료 첫 공개 ②
전작권 환수 논의, 보수세력 '정치적' 반발 아쉬워해
취임초부터 한미정상회담 고려…미 '군사적 옵션'에 반대
자주국방은 시대적 화두…"국방개혁 함께 가야" 강조
'국방 문민화' 확고한 인식에도 역대 국방장관들 소홀히 해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시민언론 민들레>는 노무현 대통령 서거 14주기를 맞아 지난 2011년 노무현 재단 사료편찬특별위원회가 작성한 ‘노무현 대통령 외교·안보 분야 구술 녹취문’을 입수해 처음 공개합니다. 두 차례로 나눠 보도될 기사 ①편에서는 노 대통령의 안보철학, 주한미군 철수, 이라크 파병 관련 구술, ②편에서는 전시작전권 환수, 한미정상회담, 국방개혁, 국방문민화와 관련된 구술기록이 담겨 있습니다. 이번에 공개한 외교·안보 분야 구술사료 편찬에는 노무현 당선자 외교안보 정책자문, 노무현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 전략기획실장과 문재인 정부 국방부 차관을 지낸 노무현 청와대의 서주석 안보수석이 구술자로 참여했습니다.(편집자 주)
북핵 위기가 고조되고 체제 불안정에 따른 북한 지배구조 급변사태가 예상되었던 당시 노 대통령은 대북 정책에서도 남북한의 공생과 공동번영을 통해 한반도 평화를 관리해 나가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특히 일부 보수세력이 주장하는 ‘북한 흡수통일’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통일 준비를 추진토록 했다.
"우리는 평화번영으로 가는 건데 위기상황과 관련해서 우리가 북한체제 붕괴라는 위기를 조장하고 감당도 못하면서 그런 위기를 악화시켜가지고 우리가 북한을 흡수한다, 이것은 쉽지 않은 일이고 실제로 우리한테 엄청난 부담이 되는 것이다. 북한체제가 붕괴할 경우 탈북자가 얼마나 많이 생길 것이며 그 피난민들이 우리가 수용할 능력이 있느냐, 북한 체제 붕괴해서 급속통일이 된다고 할 경우 한국경제가 그것을 부담할 수 있느냐, 한국 국민이 그럴 의지와 능력이 있느냐, 따지셨다. 북한체제가 불안정한 상황으로 가게 되면 오히려 우리가 북한을 우호적으로 지원하고 변화를 유도함으로써 우리와 가까운 정권을 만들게 하는 게 급선무다, 그래서 우호적인 정부를 만들어서 그 정부와 우리가 사실상의 통일 상태로 상당기간 진행해 나가면서 10년, 20년 과도기를 거쳐 장기적으로 통일하는 게 맞다. 흡수통일이다, 기회다, 라고 말하는 것은 맞지 않다, 라고 설명하셨다."
전작권 환수에 실무자 판단 존중..예비역 장성 집단반발 가장 아쉽게 생각
노무현 대통령은 재임 기간 중 전시작전권 환수를 추진했다. 노 대통령은 미국 측과 협상을 앞두고 ‘국익’이라는 큰 방향만을 제시할 뿐 실무적 결정은 실무자들에게 맡기는 편이었다. 그러나 군 내부와 보수진영의 ‘정치적’ 반발을 몹시 아쉽게 생각했다.
"2003년 6월 티타임 미팅 때 노 대통령님께서 정말 격앙된 모습도 보이셨다. 대통령님의 논리와 주장이 워낙 분명하시기 때문에. (…) 그 때도 큰 방향은 잡고 계시면서 토론을 통해 의견을 유도했다. 주도적으로 잘 처리하시면서도 최종적, 실무적 결정들은 실무부서에서 하라, 나는 큰 방향을 정해주지만 예를 들어 전작권 환수 연도를 2010년으로 국방부에서 보고하니까 오케이, 나중에 또 합참에서 2012년으로 보고하니까 오케이, 실무적으로 판단해서 맞다면 그게 옳다, 이런 식의 큰 방향을 정해주시면서 했던 기억이 난다."
"대통령님이 보수 쪽(예비역 장성들)에서 반발을 하면서 국내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고 쉽게 공론을 모아가지 못했던 부분을 제일 아쉽게 생각했다. 보수쪽에서 그렇게 반대했던 이유는 결국 친미를 강조하고 자주국방도 반대함으로써 참여정부의 진보적 노선에 대해 대척점에 서기 위한 정치적으로 계산된 일이었다."
‘반미주의자’로 오해받았지만 취임 초부터 한미정상회담 의지 밝혀
노무현 대통령은 보수 진영으로부터 ‘반미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노 대통령이 스스로 ‘미국을 한 번도 간 적 없다’고 말했고, 다른 전임 대통령이 취임 직후 미국을 방문했던 것과는 달리 한미정상회담에 소극적인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과는 달리 노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한미정상회담을 고려했다고 한다. 북핵사태가 심각한 한반도 안보문제로 대두되자 미국을 직접 설득해 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노무현 대통령께서는 북핵문제가 악화되고 외교안보 상황이 엄중하기 때문에 한미정상회담부터 시작해서 관련 국가의 회담을 조기에 하는 것이 낫다, 이렇게 생각하시고 취임 초부터 한미정상회담 말씀이 있었다. (…) 결국 저는 한미정상회담 준비라는 게, 2003년 4월 이후에 자칫 금방 올 수도 있었던 위기를 예방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근데 미국은 공동성명 초안에서 여전히 북핵 관련해서 모든 옵션이 테이블에 있다라는 표현을 계속 유지하기를 원했다. 대통령님께서는 그 표현은 군사적 해결을 암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들어가면 안된다, 그런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계셨다. (…) 초반에 미국의 군사적 옵션이라는 것을 사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미국을 설득하는데 상당히 애를 많이 썼다."
‘자주국방·국방개혁 계획표 한번 제대로 짜봐라’ 지시
당시 미국의 군사전략 재편과 맞물려 한국의 자주국방은 시대적 화두였다. 노 대통령은 임기 초부터 국방개혁을 통한 자주국방 의지를 강조해왔고 이를 추진하기 위한 준비를 지시했다. 그러나 군 내부의 이해 부족과 저항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동맹조정이라는 미국의 요구 또 국민적인 필요성에 따라 이게 진행된 일이지만 그것과 그것에 기반해서 우리가 해야되는 자주국방의 역할 또 국방을 원위치를 시키면서 합리화해나가는 국방계획을 같이 가야한다는 건의를 드렸고, (노 대통령이) ‘좋다, 이렇게 한번 해보자’ 이런 말씀을 하셨다.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국방부에 가셔서 자주국방에 대한 말씀을 하셨다. 자주국방을 우리가 준비해나가야 되고 그런 것들을 해서 국방개혁을 해야된다, 자주국방과 국방개혁의 계획표를 제대로 한번 짜봐라, 이런 지시를 하셨다."
"(노 대통령은) 국방개혁을 통해 구조를 바꾸고 또 운영을 효율화하는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군비확충, 군비증강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분명히 하셨던 것 같다. 자주라는 부분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하고 계셨고, 자주국방을 달성함으로써 한반도와 동북아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 그런 최소한의 힘으로서의 국방력 확충, 이런 걸 염두에 두신 국방이었다."
서주석 전 안보수석은 당시 국방개혁과 관련해 대통령에게 육군 편중에서 벗어나 이른바 ‘군의 균형발전’이라는 아이디어를 제안했고, 노 대통령이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3군(육해공군) 균형발전을 포함한, 군 간에도 균형이 되어야 하고 군내에서 출신 간에도 균형이 되어야 하고 지역색 관련해서도 군 인사는 철저하게 균형있게 하지 않으면 군조직의 특성상 항상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래서 세가지, 자주국방, 국방개혁, 균형발전을 염두에 두시는 국방개혁을 하시길 원한다고 보고드렸더니 오케이하셨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국방개혁 의지는 군 내부의 생각과 달랐다. 당시 국방부 장관이 ‘국방개혁은 의식개혁과 군사력 강화’라고 이해하고 점진적으로 추진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당시 국방부장관은) 국방개혁은 의식개혁이라는 식으로 인식하고 계셨다. 의식개혁, 군이 제자리를 서기 위해서 이런 저런 제도적 정비를 해나가면서 의식을 바꿔나가면 군이 개혁을 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셨고, 자주국방은 결국은 미국이 하던 일을 우리들이 해야되니까 ‘군사력을 획기적으로 증대하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계셨다. 한미동맹 조정과 관련해서도 미국의 요구이긴 하지만 국민들이 걱정하는 부분이 있으니 천천히 가자, 완전히 다른 그림을 생각하고 있었다."
국방 문민화 중요..마지막 국방부 장관에 민간인 기용 원해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지지부진 했다가 문재인 정부 들어 다시 추진된 이른바 국방 문민화는 이미 20여년전 노무현 대통령의 국방개혁 과제 중 하나였다. 국방 문민화는 군과 국방부의 주요 보직에 군출신이 아닌 민간인을 채용하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 당시 국방부 대변인과 차관 등에 민간인을 기용한 바 있다.
노 대통령은 ‘임기 초부터 국방 문민화가 중요하다는 확고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는 게 서 전 안보수석의 구술기록이다.
"(대통령은) 군방 문민화가 정말 중요하다는 인식을 확고히 갖고 계셨다. 000장관은 사병출신으로 단기사관이 되어 장교가 되고 대장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인데, 문민화 계획을 갖고 있다는 걸 듣고 나서 마음에 들어 장관을 시켰다고 그러셨다. 마지막 국방부 장관은 민간인을 시키고 싶다고 얘기했다. 그런데 첫 국방장관이 문민화를 안했고, 개혁도 안됐고, 마지막 장관인 000 장관이 되면서 문민화에서 퇴보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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