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 서거 14주기] '평범한 보통사람' 재조명한 기념관
9개 전시실에 부림사건부터 서거까지 파란만장
희망돼지 저금통, 육성연설, 시민들 포스트잇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12일 점심시간쯤 KTX 진영역에서 내려 택시를 잡아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묻혀 있는 봉하마을은 ‘오지 중의 오지’라는 말을 들었던 터였다. 그래서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거친 경험을 기대했지만 잘 닦여진 제한속도 30km의 아스팔트 도로를 주위의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하며 달릴 수 있었다. 한 10~20분쯤 지났을 때 먼 곳에 바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기사에서 봤던 ‘부엉이 바위’가 떠올랐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바위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이 서려 있는 바로 그 ‘부엉이 바위’라고 했다.
바위를 향해 달리던 택시가 갑자기 멈춰 섰다. 부엉이바위를 동북쪽 45도 각도로 응시할 수 있는 그곳에 ‘깨어 있는 시민 문화체험 전시관’이 있었다. 대통령 기념사업은 행정안전부 소관 사업이기 때문에 김해시 예산으로 지어진 이 건물을 ‘노무현 기념관’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했다. 공식 명칭은 달랐지만 그곳 사람들 모두 그곳을 ‘노무현 기념관’이라고 불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 전 머물던 ‘대통령의 집’ 바로 맞은 편이었다. 지난해 9월 개관한 노무현 기념관은 2개 층으로 구성돼 있었다. 입구에서 외관을 보면 2층 건물로 보이지 않고 단층의 작은 건물 몇 개가 늘어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주변 자연과 어우러져 능선처럼 보이게 해 최대한 인공물처럼 여겨지지 않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입구 왼편에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징탑이 우뚝 솟아 있었다.
전시관은 노무현재단이 연구 용역을 통해 김해시에 기부채납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전시 텍스트는 황지우 시인, 윤정섭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백승권 작가 3명의 협업으로 만들어졌다. 지난해 차성수 봉하사업단장이 뒤늦게 합류해 준비 작업 조율을 맡았다. 입구로 들어가 1층으로 내려가니 매표소가 있었다. 성인 2000원, 청소년 및 군인 1500원, 어린이 1000원을 내고 입장권을 사서 전시관에 들어갈 수 있었다.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을 제외하면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관람할 수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국민의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대통령이다. 여론조사꽃이 지난 3월 31일~4월 1일 양일간 실시한 전화면접조사에서 ‘역대 대통령 중 가장 호감이 가는 대통령을 꼽으라(주관식)’는 질문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34.5%로 압도적 1위를 기록했다. 박정희(19.1%), 김대중(10.7%), 문재인(9.9%) 전 대통령이 뒤를 이었다.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p이며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대한민국 국민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대통령의 일생을 본다는 자체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었다. 제1전시실 ‘재(灰)의 역사’에 들어서자 검은색 바탕에 흰색 글씨들이 눈에 들어왔다. 노 전 대통령이 태어났던 1946년 9월 1일을 전후한 일제 강점기부터 남한 단독 정부 수립까지 한국 근현대사가 상징적 단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복도에는 노 전 대통령의 일대기 연표가 길게 진열돼 있었다. 출생부터 사법시험 합격, 국회의원 당선, 대통령 당선까지 한눈에 볼 수 있게 전시돼 있었다. 오른편이 노 전 대통령의 연표라면 왼쪽에는 비슷한 시기 세계사와 한국 역사 연표가 정리되어 있어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노 전 대통령의 일생을 개관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평범한 보통사람 노무현
제2전시실 ‘낮은 땅에서 올라오는 땅’에서는 노 전 대통령의 성장기를 조망할 수 있다. 노 전 대통령의 누이가 결혼할 때 찍은 가족사진이 눈에 띄었다. 한때 언론 지상을 장식했던 형 노건평 씨와 노 전 대통령이 교복으로 추정되는 옷을 입고 수줍은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학생 시절 생활기록부를 보면서 마을에서 뛰어놀던 개구쟁이 노무현의 모습을 상상해 봤다. 1930년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신안군 하의도 앞바다에서 수영하면서 놀았다면 1950년대 노 전 대통령은 이곳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뛰어놀았을 것이다. 대한민국 민주 진영의 역사는 그렇게 쓰여 가고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의 성장기를 그린 2전시실의 또 다른 특징은 다른 인물 기념관에서 흔히 나타나는 영웅서사가 없다는 점이다. 보통 알에서 태어났다는 등의 고대적 영웅서사는 없다 하더라도 어릴 때부터 남달랐다거나 영특한 소년(또는 소녀)이었다는 묘사가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의 모습은 여느 촌구석의 개구쟁이와 전혀 다를 것이 없는 ‘평범함’ 그 자체로 묘사되어 있다. ‘보통 사람’의 정치를 구현한 노 전 대통령의 철학이 여기서도 반영된 것으로 보였다.
제3전시실 ‘아스팔트 위의 불꽃’에서는 1980년대 부림사건을 변호하고 1987년 6월 항쟁 당시 부산에서 싸우던 노 전 대통령의 투쟁기가 그려져 있다. 서슬 퍼런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 시절, 권력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앞장서서 싸우던 인간 노무현의 고뇌를 느껴볼 수 있다. 어디선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육성으로 부른 ‘어머니’라는 노래가 들려왔다.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와/ 너와 내가 부둥켜안을 때/ 모순덩어리 억압과 착취/ 저 붉은 태양에 녹아버리네”
2002년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와 후보단일화 경선을 앞두고 문화예술인 간담회에서 노래를 청하자 노무현 후보가 직접 부른 노래였다. 중도층을 의식한 ‘선거공학자’ 보좌진들이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를 부르라고 했을 때 노무현은 이를 마다하고 기꺼이 이 노래를 불렀다. 가치와 노선으로 정면 승부를 추구했던 ‘노무현 정신’이 담긴 이 노래를 듣자 코끝이 찡해졌다. 윤석열 검사독재정부 시대를 사는 오늘의 우리에게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순간이었다.
'어머니' 부르는 노무현 전 대통령. 2023.5.12. 유튜브 채널 sixpd
육성으로 듣는 노무현 연설
제4전시실 ‘육성의 방’에서는 노 전 대통령의 연설을 영상 없이 오디오로만 감상할 수 있다. 약간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노 전 대통령의 철학을 음미하기에 제격인 공간이다. “이의 있습니다”를 외친 ‘3당 합당 반대 연설’, “이런 아내를 버려야 하느냐?”고 일갈한 대선 후보 인천 경선 연설, 노무현 후보를 흔들던 새천년민주당 세력에 맞서 시민들의 자발적 정당으로 출범한 개혁당 대선 후보 수락 연설 등 조용히 눈을 감고 듣고 있으면 그 시대의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흘러간다.
제5전시실 ‘바보 노무현, 그리고 노사모’에 들어가면 한가운데 희망돼지 저금통이 수북이 쌓여 있다. 희망돼지 저금통은 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의 노무현 밀어내기 활동, 김민석 의원의 탈당 등으로 노무현 후보가 흔들릴 때마다 지지자들이 만 원씩 십시일반으로 후원한 ‘소액 다수 후원 모델’의 시초였다. 벽면에는 대통령 출마 선언부터 대통령 당선 때까지 노 전 대통령의 활동사진 수백 장이 전시돼 있다. 노풍의 진원지가 됐던 광주 경선, 부산 서면 유세에서 ‘부산갈매기’를 부르던 노무현 후보 등 2002년 대선 과정을 한 편의 드라마처럼 감상할 수 있다.
제6전시실에는 노 전 대통령이 대한민국 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던 순간을 형상화한, 미디어아트로 표현된 ‘우람한 나무’를 볼 수 있다.
제7전시실은 참여정부의 업적과 언론 보도 중심으로 꾸며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 재임 시절 온갖 악담을 퍼부으며 저주의 독설을 날렸던 제도권 언론의 보도를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 사회 전체적으로 투명성이 강화되고 연평균 경제성장률 5%를 달성하는 등 대한민국을 진일보시킨 노무현 참여정부의 업적도 체계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
제8전시실 ‘대통령의 귀향’에서는 “대통령님 나와주세요”를 외치면 손을 흔들고 나와 반갑게 맞이하던 시민 노무현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주민들과 오리쌀을 생산하기 위한 친환경농법을 시작했고 민주주의와 진보의 미래를 위해 토론을 이어갔던 그 시절이 묘사돼 있다. 노 전 대통령이 생전 거주했던 대통령의 집이 바로 맞은 편이어서 마치 그의 생전으로 돌아간 느낌마저 들었다.
마지막 제9전시실 ‘천둥 속에서’는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주제로 꾸며졌다.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하기 전 시민들에게 했던 당부의 말과 다짐을 재확인하는 공간이다. 9전시실을 지나 바깥으로 나가는 통로에는 시민들이 남긴 포스트잇이 빼곡히 한 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과거의 일로 화석화하기보다는 바로 오늘의 모순을 혁파하는 동력으로 삼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마땅한 자세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노무현의 ‘사람다운 세상’을 가로막았던 질곡과 장벽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아닌지, 그것을 혁파해내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제 실천으로 연결하는 것은 남아 있는 시민들의 몫이 됐다.
부울경 NGO 지원에 나설 것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 위치한 노무현 기념관은 앞으로 민주 진영의 부산, 울산, 경남 지역 거점으로서 역할을 담당할 예정이다. 차성수 전시관장은 “노 전 대통령께서 하시려고 한 것은 지역주의와 기회주의를 넘어선 국민통합, 이를 통한 신뢰의 공동체 기반을 만드는 일이었다”면서 “돈과 권력에 따라 움직이는 기회주의와 지역주의를 해소하는 것이 기념관의 정신이자 목표”라고 말했다.
기념관은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바라던바다’라는 시민 지원 프로그램을 시작한다. 차 관장은 “바라던 바라는 의미와 노 전 대통령이 말한 바다로 흘러가는 ‘바라던 바다’라는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면서 “마을 자치 프로그램부터 부산, 울산, 경남 지역 NGO 지원 등을 통해 부울경 시민사회 활성화에 기여하겠다”고 말했다.
현재 기념관 2층은 서거 14주기를 맞는 오는 23일 개장을 목표로 ‘노무현의 독서’라는 기획전시 준비에 한창이다. 노 전 대통령의 봉하 자택의 소장하던 서재의 책들을 복원하는 프로젝트다. 노 전 대통령이 갖고 있던 책과 동일한 서적을 보유한 시민들이 기증해서 서재를 꾸민다는 계획이다. 차 관장은 “노 전 대통령이 서거 전에 집필하신 ‘진보의 미래’라는 책이 중심이 될 것”이라면서 “많은 분들이 읽고 노 전 대통령이 제시한 숙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노무현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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