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 ‘한반도 제2 전선’?
한국, ‘비공식’ →'조건부 공식' 지원 전환
러 "적대행위 간주" 표명 속 아직은 절제 된 표현
윤 대통령 방미 때 지원 공식화 하면 얘기 달라져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지난 18일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와 그에 대한 나라 안팎의 반응을 통해 몇 가지 중요한 논점들이 좀 더 분명한 내용을 갖게 됐다.
대통령은 그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한국의 무기 지원(공급)과 관련한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만약 민간인에 대한 대규모 공격이라든지, 국제사회에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대량학살이라든지, 전쟁법을 중대하게 위반하는 사안이 발생할 때는 인도 지원이나 재정 지원에 머물러 이것만을 고집하기 어려울 수 있다"
무겁고 강력하지만 절제된 러시아 반응
이 말은 대규모 민간인 공격이나 대량학살, 중대한 전쟁법 위반 사안이 발생할 경우 전쟁 당사국일지라도 (살상)무기를 지원할 수 있다는 말로 해석될 수 있다. 윤 대통령은 ‘무기를 제공하겠다’고 명시적으로 밝히진 않았으나 <로이터 통신>의 19일 기사는 이 말을 한국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바꾸겠다고 한 최초의 신호(signalling a shift in his stance against arming Ukraine for the first time)라고 해석했다.
그날 이 통신이 전한 드미트리 페스코프 러시아대통령실 대변인도 그렇게 받아들였다.
페스코프 대변인은 “불행하게도 서울은 이번 사태에서 시종 상당히 비우호적인 자세를 취해 왔다”면서 “그들은 더 많은 나라들을 직접 이 분쟁에 끌어들이려 애쓸 것이다. 하지만 당연히, 무기 제공을 시작하는 것은 간접적으로 이 분쟁에 대한 특정한 단계의 개입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측근으로 대통령을 지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은 텔레그램에 이런 말을 올렸다. “러시아의 최신무기들을 그들의 가장 가까운 이웃들, 북한의 우리 파트너들에게 제공한다면 이 나라(한국)의 국민들이 뭐라고 할지 궁금하다.”
주한 러시아대사관도 이날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한국은 키이우 정권의 군사 후원 그룹에 참여하고 살상무기를 제공하는 결정이 낳을 즉각적인 부정적 영향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라며 "이런 행동이 지난 30년간 양국 이익을 위해 건설적으로 발전해온 러시아와 한국의 관계를 분명히 망칠 것"이라고 밝혔다.
러시아 외무부는 이와 관련해 “우크라이나에 대한 어떠한 무기 제공도 반 러시아 적대 행위로 간주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러시아 <스푸트니크 통신>이 20일 전했다. 이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직접 지원은 물론, 미국과 폴란드 등을 통한 우회 지원 방식 또한 자국에 대한 적대행위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페스코프와 메드베데프, 그리고 외무부 논평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쪽 반응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그 표현이 굉장히 절제돼 있다는 것이다. 이는 러시아가 한국과의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 가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강하게 풍긴다. ‘제공하면’ ‘간주하겠다’는 외무부 논평도 그렇다.
이처럼 <로이터>의 보도와 러시아 반응을 통해, 윤석열 정부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에 대한 입장을 기존의 ‘절대 불가’에서 ‘조건부 지원’으로 방침을 ‘공식적으로’ 바꾸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비공식적’ 지원에서 조건부 ‘공식적’ 지원으로
그러나 이는 공식 입장의 변경일 뿐, 한국정부는 지난해 155㎜ 포탄 10만 발 미국 지원 등에서 보듯 우회 지원 방식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비공식적인 무기 지원 방침을 정하고 이미 이를 실행해 왔을 수 있다. <뉴욕타임스>의 4월 6일 보도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미국 국방부 최고기밀 문서들 중의 한국 국가안보실 도청 내용에 나오는 155㎜ 포탄 33만 발의 폴란드 경유 우회 지원방안에 관한 논의를 보더라도 무기 지원 방침은 윤석열 정부 출범 뒤 일찍부터 정해져 있었고, 이를 이미 실행해 왔다는 의심을 갖게 한다.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것은 그 ‘비공식적’ 지원을 조건부이긴 하지만 ‘공식적’ 지원으로 바꾼 것이다. <뉴욕타임스>와 <로이터> 보도와 그에 대한 반응 등 지금까지의 여러 상황 변화들이 그런 가정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더 드러난 김성한·이문희 돌연 사임 배경
그리고 이런 가정은 김성한 전 국가안보실장과 이문희 전 국가안보실 외교비서관의 돌연한 사퇴문제를 다시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국가안보실의 최고위 관리 두 사람이 거의 같은 시기(김성한 실장은 3월 29일, 이문희 비서관의 사퇴 확인은 27일)에 뚜렷한 이유도 없이 자리에서 물러난 것을 두고 많은 억측들이 있었지만 아직까지 명쾌한 설명은 없다. 대통령의 미국방문을 준비한 핵심 관리들이 그 미국방문을 코앞에 둔 시기에 별다른 이유 없이 갑작스레 그만둔 것을 두고 미국 방문 때의 ‘블랙핑크’ 백악관 공연설과 관련한 보고라인상의 문제라는 등의 추측들이 있었으나 설득력이 없었다.
이 두 사람이 갑작스레 사임한 시기는, 4월 6일 <뉴욕타임스>의 보도로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문제와 관련한 한국 국가안보실의 이 두 고위관리의 논의 내용을 도청한 미국 국방부의 최고기밀문서들이 SNS 매체 등에 유출된 사실과 그 내용들이 대중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기 직전이다. 도청 내용 중에서 문제가 된 155㎜ 포탄 33만 발의 우크라이나 지원 문제를 둘러싼 두 사람의 논의가 진행된 시기는 2월이었고, 그 무렵부터 게임 관련 앱 <디스코드>의 서버 ‘터그 셰이커 센트럴’, <와우마오> 등에 유출된 문제의 기밀정보들이 대거 올려져 대중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3월에 들어서면 이미 걷잡을 수 없이 확산돼 <뉴욕타임스> 일반 유력 매체들에서도 이를 감지하고 있었다.
문제는 국가안보실의 두 고위관리가 논의한 내용이었다. 거기에는 한국산 155㎜ 포탄 33만 발을 우크라이나에 지원하는 문제, 이를 폴란드 수출 형식의 우회적인 방식으로 공급하기 위한 여러 구체적 방안, 그것이 전쟁 당사국엔 살상무기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정부 정책(공식방침) 및 헌법정신에 위배된다는 것, 미국의 지원압박에 맞추려고 정부 정책을 바꿀 경우 대통령의 미국 국빈방문을 위한 정치적 거래로 ‘오해’받을 것이라는 얘기들이 포함돼 있었다.
이런 최고기밀정보들이 폭로될 경우 윤석열 정부가 지게 될 정치적 부담은 엄청날 것이고, 자칫 미국 국빈방문마저 무산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유출된 기밀정보들이 폭로돼 대중적으로 확산되고 해당국들에서 정치문제화될 가능성이 점점 커지던 시기인 3월 말에 그들이 사임한 것은, 그런 폭로로 닥쳐올지 모를 정권의 위기를 그들 차원에서 차단하기 위한 고육책이 아니었을까.
‘전제조건’은 무기 지원 정당화하기 위한 장치
그리고 대규모 민간인 공격이나 대량학살, 중대한 전쟁법 위반 사안이 발생할 경우라는 조건이 충족되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할 수 있음을 사실상 공식확인한 윤 대통령의 발언은, 이제까지 이미 실행돼 온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을 사실상 정당화하고, 정부 방침과 헌법 위배에 따른 정치적 책임을 면하기 위한 정교하게 고안된 레토릭일 수 있다.
‘대규모 민간인 공격이나 대량학살, 중대한 전쟁법 위반 사안이 발생할 경우’라는 전제조건이 이미 저질러 놓은 일의 사후 정당화를 위한 장치일 수 있다는 점은 다음과 같은 보도를 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윤 대통령이 말한 이른바 '전제조건'들은 이미 국제사회, 특히 서방에서는 사실상 공인된 거나 다름없다. '대규모'라는 말이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러시아군의 민간 시설 공격은 일상화된 지 오래고, 대량 학살은 부차와 돈바스 등 여러 지역에서 확인됐으며, 전쟁법 위반은 국제형사재판소가 전쟁범죄 혐의로 푸틴 대통령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은 사실상 우리 정부의 결정만 남은 셈이라고 할 수 있다.(SBS, 20일, ‘특파원이 전하는 월드리포트’)
이것은 한국정부에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을 압박한 미국의 논리이기도 하다.
한반도와 그 주변에 제2전선 만들기
미국방문 때 몇 가지 보상을 안기면서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한국의 직간접적인 무기 지원을 압박해 양국이 사실상 이를 공식화할 경우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아질 것이다.
러시아 외무부가 공언했듯이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대규모 무기 지원을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실행에 옮길 경우 전쟁의 또다른 당사자인 러시아는 한국을 교전상대로 지목하고 상응한 보복을 가할 수 있다. 메드베데프가 얘기한 대로 그것이 북한에 대한 러시아의 최신무기 공급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북한의 포탄 등 재래식 무기들의 러시아 지원, 나아가 한반도 주변의 국지전적인 전쟁 도발, 즉 우크라이나 전쟁의 ‘제2전선’ 조성으로까지 이어질 경우 그 최대 피해자는 한국이 될 것이다. 전쟁위기나 전쟁발발은 한국경제를 얼어붙게 만들 것이며, 파괴적인 인적 물적 손실 속에 한국사회의 분열은 극단화하고 극우 파시스트 세력들이 권력을 장악하게 될 가능성을 높인다.
1968년 1월 김신조 등 북한 124군 대원 30명의 청와대 습격사건(1.21사태)과 그해 11월 경북 울진의 대규모 무장공비 침투사건은 당시 치열해지던 베트남전쟁에서 북베트남군을 지원하기 위해 북한이 만든 제2전선이었다는 분석들이 있었다. 반세기도 더 전의 동서냉전 시대의 악몽과 같은 상황이 그때처럼 타국에서 벌어지는 전쟁 때문에 지금 다시 한반도에서 재연될지도 모른다. 러시아는 베트남전쟁 때처럼 우크라이나에 대한 서방의 지원을 교란, 분산하기 위해 유라시아 극동지역에 제2전선을 조성하고, 북한으로부터 재래식 무기를 조달받고자 하는 유혹에 끌리지 않을까.
한반도와 그 주변에서 국지전적 상황이 벌어질 경우 그 최대 수혜자는 한국전쟁 때처럼 일본이 될 것이다. 대만에 대한 중국의 침공 가능성도 더 커질 것이다. 미국 역시 중국과 러시아의 봉쇄, 배제와 도태와 동맹국들의 결속이라는 인도태평양전략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무기 지원 요구는 정당한가?
내전상태(휴전)의 분단국가가 자국과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없는 지구 반대편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대규모 무기를 지원하는 것은 중대한 논란거리다. <로이터>가 지적했듯이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을 꺼리는 것은 러시아와 한국의 교역이나 투자 규모가 상당하고 한국 기업들이 많은 수익을 얻고 있는데다가, 북한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 등 안보군사적인 면에서의 러시아 비중이 작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무기 지원은 그런 러시아가 아니라 교전상대인 우크라이나에 대한 것이다. 어느쪽이든 한국이 한쪽 편을 들면서 무기까지 지원하고 나설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유럽의 특수한 사정에서 배태된 전쟁이며 유럽이 책임져야 할 전쟁이다.
전쟁범죄와 인도적 문제라는 보편가치 훼손에 대응하는 ‘정의의 전쟁’ 차원의 무기 지원 논리를 앞세울 수는 있다. 1950~53년 한국전쟁 때 한국도 16개 국으로부터 국제적 지원을 받지 않았느냐, 이제 그것을 갚을 때가 됐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꼭 무기지원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한국전쟁 지원국가 16개국도 모두 군대와 무기를 보낸 건 아니다. 한국은 지금 우크라이나에 상당한 인도적 경제적 지원을 하고 있다.
냉전 피해 분단국을 신냉전 최전선으로
무엇보다 동서냉전 시대의 공산(사회)주의와 반공주의 진영간 대결의 대리전이었던 한국전쟁 때의 지원 논리를, 냉전이 무너진 지 30년도 더 지난 21세기에, 먼 타국의 전쟁에 그것도 그 냉전의 최대 희생자로 아직도 그 때문에 국토와 민족이 분단돼 내전상태인 한반도의 남쪽 절반의 나라에 적용하는 것이 정당한가. 그때의 전쟁도 지금의 전쟁도 그 한쪽 주도세력은 미국이고, 자국이 큰 책임이 있는 분단의 피해국 한국에게 지구 반대편의 나라 전쟁에 무기를 보내라고 압박하고 있는 것도 미국이다. 한국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미국의 신냉전 전략상의 필요 때문에. 이미 전쟁상태인 휴전을 빨리 끝내야 할 나라에 자신들과는 별 상관없는 남의 나라 전쟁에까지 무기를 보내고 개입하라는 게 옳은가. 게다가 그 무기 지원이 확전으로 이어질지도 모르는데.
관련기사
개의 댓글
댓글 정렬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