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 언론화’의 요청을 되새기는 날로 삼아야
7일은 언론인들에게 명절과도 같은 날, ‘신문의 날’이다. 매년 이날이 되면 이 기념일의 제정 취지처럼 신문의 사명과 책임, 언론의 자유와 언론인의 품위에 대해 돌아보는 행사들이 펼쳐진다.
그중의 하나인 표어 공모에선 ‘나를 움직인 진실 세상을 움직일 신문’이 대상으로 뽑혔다. 하루 전날인 6일 열린 기념식에선 대통령이 축사를 보내왔다. “자유민주주의는 인쇄 기술이 불러온 신문의 탄생과 보편화를 통해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었다.”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신문인들의 노력은 우리의 헌법 정신이자 번영의 토대인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원동력이다.” ‘진실’ ‘세상을 움직이다’ ‘헌법정신’ ‘민주주의의 원동력’ 등의 말에 담긴 신문과 언론에 대한 우리 사회의 높은 기대와 바람, 칭송과 찬사는 올해에도 어김없다.
그러나 이런 찬사와 예찬이 드러내는 것은 지독한 역설이다. 무언가의 존재가 오히려 그것의 부존재를 드러내는 역설이다. 뭔가를 주장하는 것이 오히려 그것의 결여를 드러내는 역설이다. 신문이 있으나 신문이 없고, 언론이 있으나 언론이 없는 참담한 현실이다.
대통령의 기념사는 그 말 자체로는 전적으로 온당하다. 그러나 그 말이 온당할수록 그것은 현실과 충돌한다. 그 말이 맞기 때문에 오히려 현실에서 그 말 자신이 짓밟히고 유린되며 조롱당하는 결과가 되고 있다.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대통령, 그런 대통령과 권력을 칭송하느라 바쁜 언론. 권력과 정부의 2중창과 동맹 속에서 신문은, 언론은 실종되고 있는 것을 더욱 분명히 확인하게 되는 신문의 날이다.
언론이 활발할수록 '언론'이 죽는 현실
검찰독재와 민주주의에 대한 무차별적 위협, 파국적 경제 위기, 전쟁 위험을 자초하는 대북 긴장 조장, 친일 굴종 외교참사 등 부도덕하고 무도 무능한 정부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로 인해 어느 때보다 언론의 역할이 중요해진 상황이다. 그러나 실제의 현실은 어느 때보다 언론의 역할이 보이지 않는다. 권력에 대한 노골적인 칭송과 찬양이 범람한다. 지금처럼 언론이 ‘활발’할 때가 없었지만, 지금처럼 언론이 죽어 있을 때가 없었다.
언론비상시국회의의 성명에 담긴 개탄이야말로 더욱 지금의 현실을 요약하고 있는, 신문의 날의 더욱 실질적인 기념사가 될 만하다.
“영원한 언론인으로서, 올해 신문의 날을 맞는 우리의 심정은 그 어느 때보다 참담하다.”
“더욱이 윤석열 정부의 작심한 길들이기로 언론 상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나빠졌다. 땅바닥이 끝인 줄 알았는데, 바닥마저 갈라져 땅속으로 한없이 추락하고 있다.”
신문의 날에 돌아보는 지금의 한국언론의 현실은 위의 성명처럼 이미 ‘바닥’이었던 것에서, 더 밑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한국의 유력 신문들이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의 비틀기와 오도를 넘어선 새로운 양상이다.
우리가 매일의 신문에서 보고 있는 것은 ‘사실’에 대한 것, 즉 어떤 사안에 대해 사실이냐 아니냐를 다투는 것을 넘어선 것이 돼가고 있다. 사실에 대한 다툼이 아니라 ‘상식’ 자체가 부인되고 있으며, 몰상식으로의 대체, 상식과 반상식 간의 역전이 이뤄지고 있다.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졌던 가치와 덕목과 규범들이 신문에 의해, 언론에 의해 무너지고 있다.
지극히 당연한 규범으로 확립돼 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던, 그러기에 우리 사회가 지탱돼 오고 그 기반 위에서 앞으로 나아가게 했던 상식과 보편이 허물어지려 하고 있다. 신문과 언론에 의해 무너지려 하고 있다.
미국 사회에서 언론의 기능에 대해 심층적으로 논의한 범사회적 기구 허친스 위원회는 1947년 그 결과를 ‘자유롭고 책임 있는 언론’이라는 결론으로 내놓으면서 좋은 저널리즘이 되기 위한 미디어의 역할의 첫 번째로 ‘그날 일들에 대한 진실되고 포괄적인 이해’를 제시했다. 지금 한국의 언론에서 시민들은 신문을 통해 포괄적인 이해, 총체적인 시야를 가질 수가 있는가.
구한말 조선 민중의 대변기관이었던 대한매일신보는 그 이름을 신문이 아닌 ‘신보(申報)’로써, 새로운 소식을 알리는 것과 함께 백성들이 뜻을 펼치는 수단으로서 자신의 소명을 내세웠다. 지금 한국의 신문들은 국민들의 뜻을 펼치는 마당이 아니라 자신들의 말로써 여론을 덮고 시민들의 말을 막고 있다.
신문지면에서 매일 펼쳐지는 문란(文亂)과 언란(言亂)
한국 언론의 후진성은 로이터 저널리즘연구소가 매년 조사하는 신뢰도 지수에서 46개 국 중 몇 년째의 확고한 최하위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아시아 지역에서 최상위권이었던 언론자유지수에서도 올해에는 다시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시절의 급락으로 돌아갈 것으로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그러나 이 자유지수의 현실은 그것이 전적으로 떨어진 것만이 아니어서 더욱 파행적이다. 즉 어느 한편에는 자유의 위축, 억압이지만 다른 편에서는 무제한의 자유와 비호를 받는 양면의 현실이다. 집권 세력에 대해 쏟아내는 낯 뜨거운 보도들은 권력과 언론 간의 유착을 넘어 ‘권언(勸言)의 일체화’를 보여준다.
한국 최대 부수를 자랑하는 신문들의 지면이 매일같이 펼치고 있는 것은 문자의 난, 문란(文亂)과 말의 난, 언란(言亂)에 다름아니다. 검찰이라는 공권력에 의한 검란(檢亂)과 함께 말과 글의 권력에 의한 언란이 매일 한국 사회를 난도질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시민은 기자다”. 20여 년 전 어느 신생 인터넷 매체가 출범과 함께 선포한 말은 시민도 기자가 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이제 이 선언은 이렇게 바뀌어야 마땅하다. “시민이라야 기자다.” ‘시민이 돼야’ 비로소 기자가 될 수 있다. 시민이 되지 못하면 기자가 되지 못한다, 로 바뀌어야 마땅하다.
‘시민’의 소양과 덕목을 갖추지 못하고서는 기자가 될 수 없다. 어떤 전문적 기능과 지식, 경험이 있더라도 시민으로서의 교양과 규범을 결여해서는 기자로서의 결격 사유라고 해야 마땅하다. 지금 한국 언론이 보이고 있는 부실과 추락과 불신의 근본 원인이 거기에 있다. 미(未)시민, 비(非)시민들이 ‘언론인’ 집단을 이루고 있는 것에 많은 원인이 있다.
로이터 저널리즘 연구소의 조사가 드러낸 주요한 결과 중의 하나는 뉴스기피 현상이었다. 그것이 비단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지만 새로운 소식을 알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때 한국의 언론은 사람으로서의 본성까지 바꿔버리고 있다. 많은 시민들이 뉴스를 끊고 언론으로부터 도피하려 한다. 이들을 ‘양심적 언론거부자’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문과 언론이 언론사, 언론인들만의 것이 아니며 공공의 것이라고 할 때, 그것은 시민에게 언론의 주인됨으로서의 권리와 함께 그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부여하는 것이다.
신문의 날이 이른바 언론인들만의 명절이 될 순 없는 이유, 그래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언론의 언론화는 언론의 시민화에 의해 이뤄질 수 있듯이 시민의 시민화로써 또한 이룩될 수 있다. 언론(인) 자신에 의한 신문의 신문다움, 언론의 언론다움의 전망이 파탄에 이른 현실에서, 그러므로 신문의 날은 ‘시민의 언론화’의 요청을 확인하는 날로 삼을 것이 요청되는 것이다. 언론에 대한 거부가 아닌 주인으로서의 참여가 신문을 바꾸고 언론을 바꾼다는 것을 절실하게 확인하는 날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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