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들어 국정원·경찰 압수수색·구속수사 줄줄이
작년 5월 김규현 국정원장 취임 뒤 조직개편
윤 대통령, 올 2월 직접 찾아가 직원들과 만찬·격려
최근엔 대놓고 "대공수사권 폐지는 잘못"
시민단체 "보안법 폐지하고 공안기관 해체하라"
윤 정부 들어 간첩 사건과 공안 사건이 줄을 잇고 있다. 국민의힘과 윤석열 정부의 인사들은 기다렸다는 듯 지난 세기의 해묵은 색깔론을 펼치며 망언을 쏟아내고, 조선일보 등 보수매체들은 목 터져라 응원 중이다. 국정원의 대공수사권 복원을 위한 공안몰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공안 사건이 부쩍 늘어난 것은 올해부터다. 지난 1월 17일 서울시는 촛불중고생시민연대가 시의 보조금을 받아 출판한 ‘중고생운동사’ 내용 가운데 “국가보안법 위반(고무찬양죄) 소지가 있다”며 경찰에 수사 의뢰했다. 서울경찰청 안보수사대는 학생들을 국보법 혐의로 입건해 수사하고 있다.
다음날인 18일에는 국정원이 ‘간첩단 수사’를 명분으로 민주노총에 대한 대대적인 압수·수색을 진행했다. 국정원은 이날 경찰과 함께 정동 민주노총 사무실을 비롯해 서울 영등포구 보건의료노조 사무실, 제주도 제주평화쉼터의 대표 차량 등도 압수수색했다.
지난달 1일에는 서울중앙지법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경남진보연합 조직위원장 A 씨 등 4명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북한으로부터 지령을 받고 국내에서 반정부 활동을 한 혐의’였다. 서울중앙지검은 15일 관계자 4명을 국가보안법 위반과 범죄단체 활동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언론은 ‘창원 간첩단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연일 관련 보도를 쏟아내고 있는 중이다.
지난달 23일에는 국가정보원과 경찰 100여 명이 경남 창원의 민주노총 경남지역본부 내 금속노조 경남지부 사무실과 지난해 대우조선 파업을 주도한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압수수색했다.
국가보안법이란 지난 세기의 녹슨 칼이 새삼스럽게 휘둘러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윤 정부 출범 이후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 보수언론이 보인 행태를 보면 국가정보원 대공수사권 복원을 위한 터닦기라는 의혹이 인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5월 국가정보원장으로 김규현 전 국가안보실 1차장을 임명했다. 김규현 원장은 취임 후 국정원의 방첩능력 강화를 위해 인력·조직 개편 작업에 박차를 가하는 등 간첩 수사 준비에 공을 들였다.
국정원의 이런 움직임은 한편으론 뜻밖이었다.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은 국정원법 개정으로 내년 1월 1일 경찰로 이관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을 폐지하는 국정원법 개정안은 문재인 정부 시절이던 2020년 12월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통과했다. 과거 국정원의 사건 조작, 정치 개입, 인권 침해 등의 폐해를 바로잡자는 취지였다. 이에 따라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은 3년 유예기간이 끝나는 내년 1월 1일부터 경찰로 이관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국정원은 금년들어 예상을 뒤엎고 간첩 사건과 공안 사건을 연일 터뜨렸다. 이런 와중에 중앙일보가 지난 1월 <몰아치는 간첩수사, 이유 있었다…신설 방첩센터가 주도>라는 단독 기사를 내보냈다. 기사에는 국정원이 지난해 하반기 설치한 대북방첩센터 얘기가 나온다.
새해 벽두부터 간첩 사건 수사가 숨가쁘게 진행되고 있다. 제주와 창원·전주 등 지방 조직 관계자의 거주지와 사무실 등에 이어 민주노총을 압수수색하는 등 규모와 속도 면에서 이전과 다른 모양새다. 이번 수사는 국가정보원 비서실장 직속 조직인 ‘방첩센터’가 주도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 김석규 전 국정원 방첩국장은 최근 국정원 동료들에게 보낸 글에서 “적화 야욕을 거두지 않는 북한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침투 간첩을 상대하는 국가 최고 정보기관의 역할을 약화시킨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며 “종북 주사파 정권이 정보전쟁의 전사들을 무장해제 시킨 것을 원상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중앙일보 2023.1.20.
비슷한 주장은 또 있었다. 얼마 뒤 전옥현 전 국정원 1차장은 한 보수 언론에 <국정원 대공수사권을 복원해야 할 이유>라는 글을 기고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월 24일 국가정보원을 방문했다. 오후에 직원들과 만찬 간담회도 가졌다. 북한의 안보위협이 ‘일상화’되는 시점에서 국정원의 역량 제고가 절실함을 대통령 스스로 절감했다는 징표일 것이다. 민주노총 등을 겨냥한 국정원의 ‘간첩단’ 수사가 본격화되고, 대공수사권의 이관을 앞둔 상황에서 국가안보 최고 지휘자가 보인 당연한 행보라 할 수 있다.(…)
북한은 특히 문재인 집권기를 대남혁명을 위한 혁명 고조기로 만들려고 작심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현재 간첩단 수사가 진행되면서 북한 지령대로 반정부, 반미활동을 해온 시민단체와 노조가 속속 확인되고 있다.(…) 윤 대통령은 특단의 조치를 취해서라도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을 복원해야 한다. (…) 북한 공작기관 입장에서는 민노총이 지하 간첩망으로 포섭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대상이다. - 주간조선 2748호, 2023.3.4
“윤 대통령은 특단의 조치를 취해서라도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을 복원해야 한다”는 말에 주목하자. 윤 대통령에게 요구하는 ‘특단의 조치’는 대공수사권을 이관하지 말아달라는 얘기다.
윤석열 대통령은 ‘특단의 조치’를 취할 것으로 보인다. 윤 대통령은 지난 1월 26일 국민의힘 지도부와의 오찬 자리에서 “(대공수사는) 해외 수사와 연결돼 있기 때문에 국내 경찰이 수사를 전담하는 부분에 대해 살펴봐야 하는 여지가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지난 13일의 발언은 더 구체적이었다. 윤 대통령은 이날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 등 신임 지도부와 가진 만찬 자리에서 “국정원 대공수사권 폐지는 잘못됐으며, 대공수사는 하루이틀 해서 되는 게 아니라 5년, 10년 해야 한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국민의힘 지도부는 윤 대통령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했다. 이들은 만찬 다음날인 14일 일제히 종북 간첩단과의 전면전을 주장하고 나섰다. 민주노총 때리기와 국정원 대공수사의 정당성도 주장했다.
김기현 대표는 페이스북에 “민노총이 노동운동을 빙자한 종북 간첩단이 암약하는 근거지였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 우리 당의 모든 당력을 모아 종북 간첩단과의 전쟁을 선포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주호영 원내대표도 원내대책회의 자리에서 “북한은 방첩당국의 수사조차 염두에 두고 관련 수사가 있으면 공안탄압으로 몰아가라는 지령까지 내렸다고 한다”며 “방첩 수사당국은 북한 지령문에 적힌 반정부구호가 국내 일부 시민단체들의 투쟁구호로 사용된 유통 경로 등을 더 철저히 수사해서 국내에 있는 종북 세력 척결에 소홀함이 없으면 좋겠다”고 주장했다.
이런 흐름을 보면 대공수사권은 국정원이 계속 틀어쥘 것이 분명해 보인다. 변수가 없는 한 경찰도 순응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면 윤석열 정부에서 간첩은 계속 나올 것이고, 공안정국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국정원의 종북몰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쓰는 언론에 대한 성토도 터져 나왔다. ‘창원 간첩단 사건’과 관련, 변호인단과 ‘정권위기 국면전환용 공안탄압 저지 및 국가보안법 폐지 경남대책위(경남대책위)’는 지난 13일 “재판도 시작하기 전에 유죄는 당연시되며 종북몰이 여론재판으로 이들에게 향후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는 아예 기소도 전에 유린당하고 말았다”며 “무죄추정의 원칙도, 국보법 사건의 피의자로서 진술거부권과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도 무참히 짓밟혀 버렸다”고 비판했다.
시민사회는 이런 상황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 시민사회 원로 259명은 지난 8일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가정보원의 ‘간첩단 사건’ 수사에 대해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공안기관을 해체하라”고 규탄했다.
원로들은 기자회견문을 통해 “윤석열 정권과 공안기관이 합심하여 간첩단 조작에 여념이 없다. 지난 11월부터 민주노총, 전농, 진보당에서 우리 사회를 위해 활동해오고 있는 진보민중진영 활동가들을 대상으로 압수수색과 구속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조중동을 중심으로 하는 수구 적폐 언론들은 정권의 나팔수처럼 공안기관이 흘려주는 정보를 그대로 받아 적으며 피의사실과 허위사실 유포에 열을 올리고 있다. 재판 한번 진행되지 않았지만 간첩단의 낙인이 구속자들에게 찍히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내놓은 입장문에는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문규현·문정현·함세웅 신부, 이부영 전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김세균 서울대 명예교수, 김형태 변호사 등 각계 원로들이 이름을 올렸다.
다음날인 9일에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참여연대, 한국진보연대, 환경운동연합, 416연대, 한국YMCA전국연맹 등이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 아름드리홀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국내 정보수집 금지, 대공수사권 이전 등 국정원 개혁을 되돌리기 위한 국정원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특히 “국가보안법과 국정원을 내세운 공안 통치를 본격화하고 있다”며 “독재정권 시대,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시절 수없이 많았던 조작사건, 대선 개입, 민간인 사찰 등 민주주의 파괴의 어두웠던 과거로 다시 회귀하고 있다”고 규탄했다.
그런가하면 금속노조 경남지부는 지난달 28일 국민의힘 경남도당 앞에서 결의대회를 열고 윤석열 정부를 비판했다. 안석태 금속노조 경남지부장은 “국가정보원은 금속노조가 조선소 하청 노동자 파업을 지원하고 지지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고 한다”며 “윤석열 정부는 총선 집권을 위해 공안정국을 만들고 있다”고 성토했다.
연도별 '간첩 사건'과 '공안 사건'
1958 : 간첩누명 쓰고 사형당한 조봉암 사건. 2011년 대법원 무죄 확정. 24억 배상 판결.
1961 : 조용수 민족일보 사건. 북한을 찬양·고무한 죄로 8명 구속. 조용수 등 2명 사형. 무죄 판결.
1964 : 1차 인혁당 사건. 중앙정보부의 간첩 날조. 28억 배상 판결.
1967 : 이수근의 처조카 배 모 씨 간첩 사건. 21년 복역. 68억 배상 판결.
1967 : 납북 어민 서창덕 사건. 41년 만에 간첩 누명 벗어. 10억 배상 판결.
1968 : 태영호 간첩 사건. 무죄 판결.
1969 : 동백림 사건. 43년만에 무죄 판결.
1973 : 간첩 누명 쓰고 조사중 의문사한 최종길 서울대 교수 사건. 18억 배상판결.
1974 :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 180여 명이 국가를 전복시키고 공산정권 수립을 추진했다는 혐의로 구속·기소된 사건. 이철 등 12명 재심서 무죄 판결.
1974 : 문인간첩단 조작 피해자 37년 만에 무죄 판결.
1975 : 김용준 간첩사건. 무죄 판결
1975 : 형제 간첩 조작 사건. 유족에 20억 배상 판결.
1975 : 2차 인혁당 사건. 8명 사형. 무죄 판결.
1977 :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조작 사건. 무죄 판결.
1979 :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 무죄 판결.
1979 : 납북귀환어부 간첩사건. 무죄 판결.
1980 :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무죄 판결.
1980 : 일가족 네 명 간첩 사건 조작.
1980 : 신귀영 일가 간첩사건. 무죄 판결.
1980 : 재일교포 간첩 이종수 사건. 재심에서 무죄 판결
1980 : 간첩 김기삼 사건. 29년 만에 무죄 판결.
1981 : 부림사건.
1981 : 재일교포 간첩 이헌치 사건. 무죄 판결.
1981 : 아람회 사건. 무죄 판결.
1981 : 석달윤 등 간첩사건. 무죄 판결.
1982 : 오송회 사건. 26년 만에 무죄 판결.
1983 : 간첩 최양준 사건. 28년만에 무죄 확정.
1983 : 납북 이상철 사건. ‘간첩조작 국가 사과’ 권고 판결.
1985 : 증거 조작 ‘모자 간첩’ 사건. 피해자에 20억 배상 판결.
1985 : 이장형 간첩사건. 무죄 판결.
1986 : 정상금 간첩사건. 무죄 판결.
1986 : 간첩 누명 고문 사망자. 26년 만에 배상 판결.
1986 : 강희철 간첩 사건. 재심에서 무죄 판결.
1986 : 김양기 간첩 사건. 23년 만에 무죄 판결.
1986 : 납북 어부 간첩 사건. 26년 만에 무죄 판결.
1987 : 수지김 간첩 사건. 무죄 판결.
2013 : 서울시 공무원 남매 간첩 사건. 무죄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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