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풍선이 불러낸 반전 노래 '99개 풍선'의 세계
서독 밴드 네나의 1983년 세계적 히트작 재조명
풍선을 공격 무기로 오인한 냉전 히스테리 확산돼
인류 절멸 부를 핵전쟁 위기를 반전의 상상력으로
베를린 장벽이 붕괴(1989년)하기 7년 전인 1982년, 동서로 분리돼 있던 베를린 서쪽 지구에서 롤링 스톤즈의 야외 콘서트가 열렸다. 공연 도중에 온갖 색깔의 풍선을 날려 보냈는데,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독일(서독) 밴드 네나(Nena)의 기타리스트 카를로 카르게스에게 지평선 너머로 날아가는 풍선은 마치 미확인비행물체(UFO) 같았다. 그때 그는 풍선을 베를린 장벽 너머 동쪽의 소련 관할지구(동베를린)로 날려 보내는 상상을 했다. 아직 동서냉전이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해서 다음해인 1983년에 태어난 곡이 일세를 풍미한 반전(反戰)가요 ‘99개의 풍선’(99 Luftballons)이었다. 카르게스가 가사를 쓰고 보컬리스트 네나가 불러 비영어권 노래로 캐시 박스 차트 1위, 빌보드 핫100 2위를 차지하는 등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했다. 가사가 영어로 번역된 ‘99개의 빨간 풍선’도 그 내용은 다르지 않았으나 독일어 원문을 직역하기보다는 훨씬 더 시적인 분위기를 살려 영국과 캐나다, 아일랜드 등에서 음악 차트 1위를 차지했다.
가사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장난감 가게에서 산 99개의 풍선을 새벽에 하늘로 날려 보냈다. 그 풍선들이 군사기지의 컴퓨터 감시장치에 걸려 들었다. “어딘가에서 무엇이 날아 왔다! UFO다.”
공포 속에 비상벨이 울리고 장군은 적색경보를 발령했다. 급히 전투기들을 띄워 확인하고 식별해서 보고하라. 대통령은 비상전화를 걸어 지시했다. 모두가 영웅이 되고 커크 대장(SF 드라마 ‘스타 트렉’에 나오는 캡틴 커크)이 됐다.
최첨단 전투기 파일럿은 그게 그냥 풍선이라는 걸 알았으나 한바탕 맹렬한 무력시위를 벌였다. 국경을 사이에 두고 있던 나라들 고관들이 이를 보고 환호했다. 전쟁이다, 때가 왔다. 그리하여 여름 하늘은 대격돌이 벌어졌다.
99년간의 전쟁 끝에, 모든 게 끝났다. 일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나. 그냥 99개의 풍선일 뿐이었는데.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폐허는 한때 도시가 있던 자리다. 나는 세계가 여기에 있었다는 증거를 찾고 싶었다. 여기에 빨간 풍선이 하나 있다. 당신을 생각하며 나는 그것을 날려 보낸다.
독일 밴드 네나의 곡 '99 Luftballons' 공연 영상
최근 중국이 날려 보낸 고고도 풍선으로 야기된 일련의 소동을 떠올리게 한다. 미국은 보란 듯 최첨단 전투기 F-22 ‘랩터’를 발진시켜 공대공 미사일을 쏘아 떨어뜨렸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흰 궤적을 남기며 떨어지는 잔해의 모습이 전 세계에 중계됐다. 미국은 그 뒤로도 정체불명의 고고도 풍선을 3개나 더 격추했다.
네나가 40년 전에 노래로 그려냈던 상상의 세계가 지금 현실에서 벌어지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냉전은 끝났지만 미국과 중국이 패권을 다투는 새로운 냉전(신냉전)이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1년 가까이 계속되고 있다. 40년 전의 동서 두 진영은 그때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는 양대 진영으로 갈려 핵무기 사용 카드까지 꺼내든 채 싸우고 있다.
전에는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했던 중국의 풍선이 갑자기 공포의 UFO가 됐고, 최첨단 전쟁무기가 동원됐다. 관측기구다, 아니 첩보기구다 라는 논쟁 속에 아직도 정체가 확인되지 않은 풍선들. 그냥 고장 나 길을 잘못 든 기상관측 기구일수도 있고, 상대를 정탐하는 첩보기구일 수도 있다.
디지털 인터넷 시대에 아직도 정체를 알 수 없는 풍선들을 놓고 상대방을 향한 증오와 공포가 번져가고 있다. ‘99개의 풍선’이 노래했던 냉전의 세계는 다행히 절멸의 전쟁 없이 그 7년 뒤에 베를린 장벽 붕괴와 함께 사라졌지만, 다시 새로운 냉전이 시작되고 있다. 그때 그 냉전의 원인이자 결과였던 황폐한 정신세계 역시 되살아나는 듯하다.
‘99개의 풍선’ 탄생 40주년이었던 지난 달 보컬리스트 네나는 평화의 메신저로서 SNS를 통해 감사의 뜻을 전했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패전국 독일의 동서 분단선은 30여 년 전에 사라졌으나, 그 전쟁의 피해자였던 한반도는 여전히 분단돼 있다. 핵무장 논란 속에 동족 말살의 협박까지 횡행하고 있다.
냉전의 장벽 너머 동베를린으로 풍선을 날려 보내는 상상을 했던 카를로 카르게스처럼 우리도 100개의 풍선을 휴전선 너머 북쪽으로 날려 보내면 어떨까. 선전 삐라가 든 풍선이 아니라 그냥 알록달록한 풍선, 평화의 풍선을. 100개가 아니라 1만 개쯤.
관련기사
개의 댓글
댓글 정렬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