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차 외교문서공개 문건 '방북보고서'에서 확인
1991년 김일성 만나 '도쿄~런던 고속도로' 제안
통일교-자민당 오랜 인연, 일본 의원들도 터널모임 참석
한일 해저터널 건설은 통일교회(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창시자 문선명 목사가 동서냉전 붕괴 직후인 1991년에 방북해 김일성 당시 북한주석에게 제안한 것이라는 사실이 정부가 6일 공개한 외교문서로 확인됐다. 문 목사는 당시 한일터널을 뚫어 일본 도쿄에서 서울-평양간 4차선 고속도로를 거쳐 영국 런던까지 자동차로 갈 수 있는 ‘세계평화 고속도로 건설계획’을 제안했다.
문선명 목사의 방북 보고서
동서냉전 붕괴 직후인 1992년까지 생산된 지 30년이 지난 외교문서를 공개한 이날 외교부의 제30차 외교문서공개 문건 중에는 1991년 11~12월에 국빈에 준하는 대우로 박보희 <세계일보> 당시 사장과 함께 북한을 방문한 문선명 목사가 방북 뒤 정부에 제출한 보고서가 들어 있다. 일본 <아사히신문>이 6일 이 보고서를 토대로 이런 사실을 자세히 보도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평안북도 정주 출신인 문 목사는 1991년 12월 6일 함경남도 마전에 있는 공관에서 김일성 당시 북한주석과 회담할 때 “일본 도쿄에서 런던까지 자동차로 달릴 수 있는 고속도로를 만드는 안”이라며 “이미 규슈에서 한일간 해저터널 건설 공사를 시험적으로 개시했다”고 밝혔다. 문 목사는 또 서울과 평양을 잇는 4차선 고속도로를 건설해 그것이 “통일로로 불리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보고서에는 김일성 주석이 그의 말을 듣고 박수를 쳤으나 “말을 하진 않았다”고 돼 있으며, “(김일성이 그 제안에 대해) 너무 좋아했다는 인상을 풍겼다”는 소감도 담겨 있다.
규슈에서 건설시작한 한일 해저터널
문 목사가 말한 규슈의 한일 해저터널 공사는 실제로 상당부분 진척이 돼 한국에도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소개된 적이 있다. 일본 우파세력과 국내 일부 보수세력이 지지해 온 한일 해저터널 건설은 그 동안 그것이 일본에게만 유리한 것이라는 국내의 반발과 함께 찬반이 엇갈리는등 몇 차례 논란거리가 된 적이 있으나, 그것을 문선명 목사와 통일교가 주도해 온 사실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문 목사가 제안한 한일 해저터널 구상에는 계획 추진을 위한 모임에 일본 국회의원들도 참가한 사실이 확인됐다. 그러나 사이토 데츠오 일본 국토교통상은 지난해 8월 기자회견에서 “(문 목사의) 구상을 검토한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통일교와 일본 집권 자민당
하지만 이는 참의원선거를 앞둔 지난해 7월 8일 나라 시에서 자파 후보 지원유세에 나섰다가 통일교에 원한을 품은 40대 남성의 사제 총에 피격당해 숨진 아베 신조 전 총리 피살사건이 정치문제화된 상황 속에서 통일교와의 관계를 추궁당하는 과정에서 나온 발언이어서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의문이 남는다.
아베 전 총리 피살 뒤 진행된 조사에서 어머니가 집안 재산의 상당부분을 통일교에 헌납하는 바람에 어려워진 가정생활로 고생했다는 기억을 지닌 범인이 통일교에 원한을 품게 됐고, 아베 전 총리가 통일교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직접적인 범행동기였다는 사실 등이 드러났다.
또 통일교와 일본 집권 자민당과의 관계는 아베 전 총리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 당시부터 깊이 얽혀 있었고, 자민당 국회의원 상당수가 선거과정에서 통일교의 지원을 받아 당선됐으며, 자민당 지방조직의 상당수가 지부장 등 간부가 통일교 신자이고 그들이 조직과 회계를 담당하고 있는 사실이 드러나는 등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사실 또한 드러났다.
1920년에 북한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난 문선명 목사는 한국전쟁 때 월남한 뒤 1954년에 통일교를 창시하고, 1958년부터 일본에서 포교를 시작해 1964년에 종교조직으로 인증받았다. 1968년에는 ‘반공주의’를 내건 ‘국제승공연합’이라는 정치단체를 조직해 일본 자민당과의 협력관계를 강화했다.
통일교와 북한 노동당
그러다가 동서냉전이 끝난 1991년 말에 북한을 방문한 이후 교단 관련기업이 북한에서 사업을 벌이는 등 북한과의 관계를 강화했다.
동서냉전 종결 뒤인 1991년 당시 북한은 일본을 비롯한 국제사회와의 관계 강화를 모색하는 한편으로 핵 개발 의혹으로 거센 비난을 받고 있었다.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문 목사는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에서 “핵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도 어렵다”면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받아들일 의사가 있는지 물었다. 이에 대해 김 주석은 “있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굴욕적인 압력에 의한 강제사찰은 안 된다”고 대답했다. 실제로 IAEA는 1992년부터 사찰을 했으나 사찰결과와 북한이 신고한 내용이 맞지 않았고, 북한은 1993년에 핵 비확산조약(NPT)에서 탈퇴했다. 이로써 제1차 ‘북핵 위기’가 시작됐다.
그러나 <아사히>의 이런 시각은 지나치게 단순화돼 있다. 북한의 NPT 탈퇴에는 미국과의 알력과 상호불신, 그리고 미국의 한반도정책 및 동아시아전략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또 공개문서에는 김일성 주석이 문 목사에게 당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에 대해 “친하면 소개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기록돼 있다. 문 목사는 말없이 거기에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내용도 정부에 제출하는 방북 보고서에 적혀 있다는 특수한 사정을 감안하고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설사 그렇게 해 보겠다고 대답했더라도 사실대로 보고서에 적기 어려웠을 것이다.
통일교는 워싱턴에서 일간지 <워싱턴 타임스>를 발간하고 있고, 이 신문을 매개로 1980년대에 할리우드 배우 출신의 보수우파 정객인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깊숙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관측이 많다.
통일교단은 1998년에 북한과의 합작으로 ‘평화자동차’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2008년에 북한에서 650대의 자동차를 판매해 50만 달러의 수익을 냈으며, 연간 1500~1800대의 차를 북한에서 판매하고 있다고 <아사히>는 전했다. 이 신문이 2015년에 북한을 방문한 사람의 말을 인용해 보도한 바에 따르면, 평양 시내에는 평화자동차가 생산한 택시와 조선노동당 간부들의 차가 1천 대 정도 운행되고 있다. 이 자동차회사 권리 지분은 2012년에 문 목사가 사망한 뒤 북한 쪽에 모두 양도됐다.
한국중앙정보부(KCIA) 북한담당 분석가로 통일부장관을 지낸 강인덕씨는 “김씨(김일성)가 문씨를 위해 정주를 성지로 지정했다는 소문도 들었다. 문씨는 성지가 된 고향을 세계의 통일교 신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 목사 사망 뒤 당시 제1비서였던 김정은 조선노동당 총비서는 유족들에게 “민족의 화해와 단결, 나라의 통일과 세계평화를 위해 기울인 선생의 노력과 공적은 영원히 전해질 것”이라는 내용의 조전을 보냈다. 그런 우호관계는 지금까지 이어져 지난해 8월 13일 문 목사 사망 10주년을 앞두고 조선노동당 통일전선부 산하의 조선아시아태평양위원회가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는 내용의 추도문을 유족들에게 보냈는데 거기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문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모두가 잘 해 나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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