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승 통신원 속보 ②] 인류애 손길 기다리는 시간
히타이트부터 앗시리아, 페르스 문명 등 명멸한 땅
잦은 강진, 1939년 에르진잔에선 3만3천여명 희생
내전 중인 시리아 북부 피해 상황은 드론으로 확인
튀르키예는 흔히 동서양 ‘문명의 교차로’라고 부른다. 만나는 것은 문명만이 아니다. 튀르키예 땅 밑에는 세 개의 큰 지각판들이 놓여 있다. 북아나톨리아, 동아나톨리아, 아랍 지각판이다. 동아나톨리아와 아랍 지각판은 평행하게 닿아 있고, 그 평행선이 터키 북부에 가로로 길게 뻗은 북아나톨리아 판의 끝과 세로로 맞닿아 있다.
지질학자들은 이 지각판들의 움직임이 세계에서 가장 활성화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현재 튀르키예는 고대 그리스 문명이 꽃피웠던 곳이지만 그리스 유적은 대부분 땅 위에 뒹구는 기둥들로 남아 있다. 수천여 년 동안 일어난 지진 때문에 원래 모습을 갖춘 건물은 남아 있지 않다. 지난 16세기부터 현재까지 7도 이상의 대지진만 여러 차례 일어났다.
지진과 함께한 튀르키예의 역사
1509년 10월 9일 7.2도의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대지진이 발생했다. 사망자가 4000명에서 1만 명에 달했다. 1653년에는 7.5도의 동이즈미르 지진, 1668년 8월 17일에는 아나톨리아 지진이 일어났다. 진도 8도였다. 20년 후인 1688년 7월에는 다시 이즈미르에서 7도의 지진이, 1881년 4월에는 에게해 지역의 사크즈 섬(그리스어 키오스 섬)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7.3도였다. 1894년 7월에는 7도의 지진이 이스탄불을 덮쳤고, 1912년 8월 7.3도의 지진이 마르마라해 서쪽 소도시 뮤레프테를 흔들었다. 에게해 변 도시 아이발륵 7도 지진(1919년 11월), 이란 국경 도시 하카리 7.6도 강진(1930. 5. 7)도 있었다.
튀르키예 역사상 최대의 지진은 1939년 일어났다. 진도 7.9도였고, 동아나톨리아, 아랍, 북아나톨리아 등 세 지각판이 맞닿은 에르진잔에서 일어났다. 사망자만 3만 2968 명에 달했다. 1999년 이스탄불 서쪽 마르마라 해에서 일어난 진도 7.4도의 지진은 북아나톨리아 판의 활성화가 원인이었다. 1만 7480명이 목숨을 잃었다. 가장 최근에는 2020년에 이즈미르에서 7.0도의 지진이 일어났다. 이 지진들은 모두 적게는 수백 명에서 수만 명까지의 목숨을 앗아갔다.2월 6일의 지진은 1939년 에르진잔 지진(진도 7.9도) 이후 최대 규모이다. 서로 맞닿은 두 지각판 중 동아나톨리아 지각판이 남서쪽으로, 아랍지각판이 북동쪽으로 움직이면서 일어났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국제 지질화산연구소장인 카를로 도글리오니( Carlo Doglioni)는 이탈리아 신문 ‘ Corriere della Sera’에 ‘아랍판과 동아나톨리아판이 90여초 간 3미터 이상 움직였다고 분석했다.
이번 지진이 일어났던 튀르키예 동남부는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이 수천여 년 동안 펼쳐졌던 무대였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키워낸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이 튀르키예를 가로지르는 세개의 지각판들 사이에서 발원하고, 이번에 무너진 도시들을 지나 아라반도로 흐른다. 히타이트, 앗시리아, 우라루트, 페르스 문명 등 전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다채로운 문화가 이곳에서 자라났고 꽃을 피웠다.
자연재해에 속절없이 명멸한 문명
인류 최초의 도시, 최초의 농경지, 최초의 종교사원이 위치한 곳도 이번 지진 지대였다. 유일신의 창시자 아브라함의 고향인 우르파, 기독교 최초의 교회가 위치한 안타키아, 찬란한 실크로드의 영화를 간직한 가지안텝 모두 지진대 위에 건설된 도시였다.
철기 문명의 주역으로 알려진 히타이트제국의 후반기 수도는 두 차례 강진이 발생했던 카흐라만마라쉬였다. 카흐라만은 터키어로 ‘영웅’을 뜻하는데, 1920년 프랑스군을 물리친 공으로 1974년 2월 7일 영웅도시의 명칭을 받았다. ‘영웅 마라쉬’는103년 전 외세를 용감하게 물리쳤지만, 2월 6일 지진 앞에서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이스켄데룬은 동아나톨리아 지각판의 가장 남쪽 지점에 위치한 도시로 지진 피해가 가장 컸던 지역에 속한다. 이스켄데룬은 기원전 333년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와의 전쟁에서 이긴 후,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지은 항구 도시였다. 지진이 일어난 첫날 이스켄데룬의 항구 콘테이너 하역장에서는 큰 화재가 일어났다. 소방당국이 생존자 구조에 집중하는 사이 화재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유독 물질과 검은 연기가 도시의 하늘을 뒤덮었다.
불길은 사흘 후에 간신히 잡혔지만, 다음날 또 다른 화재가 발생했다. 이와 동시에 지진으로 갈라진 틈 사이로 바닷물이 스며들었다. 시간이 갈수록 수위가 높아졌다. 지질학자는 물을 퍼낼 수도 없고, 증발하지도 않을 것이라 설명했다. 도시가 해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스켄데룬은 일부가 무너지고, 다른 한쪽에서는 화재가 발생하고, 또 다른 한쪽은 물속으로 가라앉는 비극의 현장으로 변모했다.
시리아 북부 10년 내전보다 더 큰 피해
터키와 국경을 접한 시리아 북부 지역의 피해는 추산조차 어렵다. 반군이 장악해 구조대원도, 원조팀도 쉽게 접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론은 지진 발생 4일째 약 3000여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고 전한다. 드론 촬영으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이번 지진이 지난 10여 년 내전보다 훨씬 더 큰 피해를 입혔다는 것이다.
튀르키예의 남동부와 시리아 북부 지역에서 지난 수천 년 동안 인류는 다채로운 문명을 건설했다. 수많은 지진이 그 문명을 앗아갔다. 다시 한번 비극의 역사가 되풀이되고 있다. 이번에도 인간이 쌓아 올린 문명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것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의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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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언론 <민들레> 이혜승 통신원은 튀르키예 에게해에 접한 도시 아이발륵에 거주하며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2011년 출판한 <두번째 터키>의 저자이다. Instagram/hesungli |
<튀르키예 구호물품·구호금 전달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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