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 전 유신독재에 몸으로 저항한 청년

주진오 역사학자·상명대 명예교수
주진오 역사학자·상명대 명예교수

[홍성엽 군과 윤정민 양이 여러 어른과 친지를 모시고 혼례를 올리게 됨을 알려 드립니다. 1979년 11월 24일 오후 5:30 YWCA 1층 강당]이라는 청첩장을 들고 많은 사람들이 모였어요. 신랑의 어머니가 화촉을 밝혔고 이어서 잘 생긴 신랑이 늠름하게 입장했지만, 신부 입장은 없었습니다. 결혼식을 위장해서 모인 반정부 집회였으니까요.

한 달 전인 10월 26일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탄에 사망한 후에도,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다음날 계엄을 선포하고 민주화에 역행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특히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려고 했어요. 계엄령에 의해 집회가 불가능했고 성명서 정도로는 충격을 줄 수 없어, 이런 아이디어를 냈던 것입니다.

‘통대 대통령선거 중단, 거국 민주내각 구성’ 외친 위장 결혼식

결혼식장은 순식간에 '대통령 보궐선거 저지대회‘로 바뀌어 취지문이 낭독되었습니다. 함께 배포된 ‘통대 저지를 위한 국민선언’에서는 민주회복으로의 전진이냐, 유신독재로의 퇴행이냐를 판가름 짓는 민족사의 대분수령이 될,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대통령선거를 저지하는 것은 전 국민의 의무라고 선언했어요.

 

YWCA 위장결혼식에 하객을 가장해 모인 민주인사들. 앞 줄 맨 오른쪽이 함석헌 선생
YWCA 위장결혼식에 하객을 가장해 모인 민주인사들. 앞 줄 맨 오른쪽이 함석헌 선생

또한 새로운 민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각계각층의 대표들이 주도하는 거국 민주내각을 구성할 것을 요구하는 성명서가 살포되었습니다. 김정택 기독교청년협의회 회장이 ‘통대선출 반대’, ‘거국내각 구성’ 등의 구호를 선창하는 순간, 계엄군과 경찰이 들이닥쳐 실내는 아수라장이 되었어요. 결국 140명이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습니다.

대회장을 가까스로 빠져나온 일부 참석자들은 명동의 코스모스백화점 앞으로 모여 가두시위를 벌였어요. 그러나 뒤쫒아 온 계엄군에 의해 일부가 연행되고 남은 사람들은 해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랑’ 홍성엽은 피신했다가 며칠 후 체포되었어요. 그를 담당했던 정보과 형사가 우연히 안국동에서 합승하려던 택시에 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참석자들에 대한 가혹한 고문과 탄압

당시 구속자들이 당했던 고문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가혹했다는데요. 백기완은 극심한 기억상실증과 정신착란증으로 폐인이 되다시피 했으며, 병보석으로 석방됐을 때 그의 체중은 40kg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홍성엽은 최후진술에서 "폭행당한 내용을 전부 말하는 것은, 군의 체면을 위해 그만두기로 하겠다"고 할 정도로 신사였어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통령선거를 위한 집회 공고
통일주체국민회의 대통령선거를 위한 집회 공고

결국 1979년 12월 6일 실시한 제10대 대통령 선거가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렸습니다. 전체 대의원 2560명 중 2549명이 참석한 가운데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단독으로 입후보해 찬성 2465표 무효 84표로 선출되었어요. 그리고 6일 후에 전두환 일당은 12.12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하고 최규하를 허수아비로 만들었습니다.

백기완·이우회·최열·양관수 등 14명이 실형을 받았고, 윤보선 전 대통령과 함석헌·김병걸 등은 불구속 기소되었어요. 홍성엽은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대전교도소 생활을 하다가, 1년 3개월 만에 1981년 3.1절 특사로 출감했습니다. 하지만 출옥 후에도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고, 민청련, 민주통일국민회의 등에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조용하고 진중했던 청년 홍성엽의 선택

1953년 1월 6일 가회동에서 출생한 홍성엽은 혜화국민학교, 보성중학교를 거쳐 1972년에 보성고를 졸업했습니다. 1년간 재수를 한 끝에 1973년에 연세대 사학과에 입학했어요. 처음에는 고전음악동우회 활동을 하다가, 한국문제연구회 후신 동곳회에 가입했어요. 당시 그를 기억하는 분들은, 늘 진중하고 예의 바른 청년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1974년 4월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이 '만든' 민청학련 사건을 규탄하는 벽보를 학내에 붙인 일로 구속되어, 군법회의에서 5년 형을 선고받고 징역생활을 하다가 1975년 2월 15일 저녁에 서울구치소에서 석방되었습니다. "구치소의 두꺼운 담벽을 나서니 자유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 새삼 실감이 난다. 앞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그동안의 생각을 정리하겠다"고 말한 것이 신문에 실렸어요.

 

1975년 2월 15일 석방되는 홍성엽.
1975년 2월 15일 석방되는 홍성엽.

다음날까지 전국 12개 교도소에서 모두 125명이 감옥 문을 나섰습니다. 그 중에는 지학순 주교, 박형규 목사, 김지하 시인, 김동길·김찬국 교수 등도 포함되어 있었어요. 당시 연세대학교는 석방된 교수의 복직과 학생 17명의 복교 방침을 밝혔습니다. 교수를 휴직시키거나 학생들을 제적시킨 일이 없기 때문에 복교·복직은 당연한 것이라는 이유였어요.

그런데 문교부가 불가 방침을 통보하며, 관계법령에 의해 엄중조치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교육법과 사립학교법에 따라 시정 및 변경명령, 총장의 임명승인 취소 나아가 학교폐쇄까지 내세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세대학교는 복교 원서를 접수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휴교령이 내려지고 박대선 총장이 사퇴하였으며 복교는 허가되지 않았어요.

제적, 야학 강사, 15년 만의 졸업, 천도교 귀의, 백혈병

결국 홍성엽은 그해 9월 1일에 제적되었습니다. 박정희는 단지 학내에 대자보를 붙였다는 이유로 젊은 학생들을 학교에서 내몰았어요. 그는 학원과 야학에서 강사 생활을 하면서 ’민청협‘ 운영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들은 박정희의 사망으로 민주화의 길이 열렸다고 생각했으나, 신군부가 이를 막자, 위장 결혼식의 신랑 역할을 자원했던 것이지요.

두 번째 감옥살이에서 풀려난 그는 1983년 9월에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의 초대 총무를 맡았습니다. 1986년 3월에 연세대 사학과 2학년으로 복학했어요. 그리고 1973년 입학한지 15년 만인 1988년 8월에서야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유신미아’가 되어 1987년 7월 10일에서야 사면복권되었고 이 무렵 운동권 생활을 청산했어요.

 

건강했을 때의 홍성엽
건강했을 때의 홍성엽

1989년 2월부터 동학에 관심을 가지고 천도교에 입문하여 수련생활을 시작했습니다. 1991년에는 천도교 종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자료실에서 근무했는데, 1992년 6월부터는 수련에만 정진하여 도은이라는 법호를 받았어요. 2016년에 전통문화연구회가 출판했던 『경전으로 본 세계종교-천도교편』는, 그가 쓴 원고를 윤석산 교수가 손을 보아 낸 것입니다.

그가 백혈병 진단을 받은 것은 1997년 11월이었어요. 골수이식 수술도 받고 바하마 제도의 나소(Nassau)까지 가서 치료 받았으나, 결국 2005년 10월 5일 52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동아일보> 1991년 11월 30일에 실린 인터뷰에서 '앞으로는 진짜 결혼도 하고 평범하게 살면서 새 세계의 비전을 갖고 싶다'던 꿈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세상 떠난 후 뒤늦게 받은 무죄·훈장·보상금

홍성엽은 민주화 투사로서보다 '고결한 삶'으로 더욱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착하고 순수하며, 과묵하고 자기절제가 강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자신이 나서야 할 순간에는 누구보다 용감하게 고난의 길을 선택했던 사람이었습니다. 2013년에는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에 대해 재심이 이루어져, 무죄가 선고되었어요.

2020년 5월 홍성엽의 형은 'YWCA 위장결혼식' 사건에 대한 재심을 청구했고, 2021년 11월 무죄를 확정받았습니다. 그에 앞서 6월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이 수여되었고 2022년 5월 11일 약 1억 6000만 원의 형사보상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나왔어요. 이로써 그의 삶과 투쟁은 법적으로 정리되었고, 명예회복을 모두 마친 셈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홍성엽이 세상을 떠난 후에 이루어진 일이지요. 그러나 그는 '민주주의와 결혼한 영원한 신랑'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2006년에 그의 동지들이 사후에 발견된 1977년부터 2005년까지의 일기와 동학에 대한 글을 모아서 학민사를 통해 유고집을 발간했어요. 그는 책 제목처럼 『맑은 영혼』으로 살다 떠났습니다.

 

홍성엽 유고집
홍성엽 유고집

홍성엽‘도 ’산 자를 살린 죽은 자‘의 경우 아닐까?

지난해 12월 3일 발생한 친위 쿠데타를 야당과 시민들이 기적적으로 막아냈지요. 그날도 평범하지만 민주주의의 신념에 가득찬 청년들이 계엄군의 차량과 총구를 막아섰어요. 만약에 누구 하나라도 오판을 했다면, 엄청난 비극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계엄이 성공했다면 이 땅의 민주주의는 압살되었을 것입니다.

대학은 문을 닫고 수없이 많은 민주개혁인사들이 체포되어 어디선가 잔혹한 고문을 받고 죽음을 당했을 것입니다. 많은 청년들이 ’위장 결혼식‘ 같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서 계엄 당국에 저항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무수하게 많은 홍성엽이 등장해서 고통에 찬 인생으로 내몰렸을 것입니다. 또다른 박종철과 이한열도 나타났겠지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지금의 민주주의를 누리는 데에는 과거에 홍성엽 같이 어찌 보면 평범했던 젊은이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그는 맑은 영혼을 가졌던, 민주주의와 결혼했던 영원한 신랑으로 남았어요. 정권이 바뀌었어도, 여전히 내란 세력이 곳곳에서 준동하는 광경을 지켜보며 더욱 그리워지는 이름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경우도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렸다‘는 말에 해당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물론 운동권의 경력을 바탕으로 정치적으로 성공했거나 변절의 길로 들어선 사람도 있었지만, 홍성엽처럼 묵묵하게 다른 사람이 안 하려는 일에 나서서 자신을 희생시킨 경우도 많았지요. 그들의 고통과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살아있는 자들의 의무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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