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10월 15일 ‘성동 원두’에 경성운동장 개장

성곽 헐어내고 훈련도감 매립한 뒤 운동장 건설

경성운동장이 낳은 스포츠 스타의 효시는 이영민

해방 후 서울운동장 이름으로 스포츠 메카 역할

85년 잠실종합운동장에 ‘서울’ 뺏기고 ‘동대문’ 얻어

2008년 철거 뒤 성화대와 조명탑만 상징물로 남아

DDP는 서울의 새 랜드마크로 외국인 관광객 북적

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공식 야구 경기가 열린 날은 1906년 2월 11일이다.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가 창설한 황성기독교청년회(서울YMCA 전신) 야구단과 덕어(德語·독일어)학교 팀이 조선시대 군인들의 연병장이자 무과 시험장이던 을지로5가 훈련원(訓鍊院) 터에서 격돌한 것이다.

동아일보가 초창기 야구 경기 광경을 묘사한 1930년 4월 2일자 ‘조선 야구사’ 첫 회 기사에 따르면 “운동복은 무명 고의적삼에 짚세기를 들메해서 신었고, 외야수는 글러브도 없이 맨손으로 볼을 받았으며, 배트는 한 개를 가지고 자기편도 상대편도 돌려가면서 쳤다”고 한다.

1986년 대한체육회가 발간한 ‘한국 축구 백년사’는 관중을 모아놓고 공개적으로 벌인 최초의 축구 경기도 1906년 6월 10일 훈련원 터에서 열렸다고 기록해 놓았다. 외교문서 번역관 현양운이 서울의 유지 30여 명을 모아 창립한 대한체육구락부와 황성기독교청년회 축구단이 맞붙어 1대 1 무승부로 끝났다.

 

1906년 3월 15일 훈련원 터에서 열린 황성기독교청년회와 관립한성고(경기고 전신)의 야구 경기 장면. 선수들이 무명 고의적삼을 입고 짚신을 신었다. (서울역사박물관)
1906년 3월 15일 훈련원 터에서 열린 황성기독교청년회와 관립한성고(경기고 전신)의 야구 경기 장면. 선수들이 무명 고의적삼을 입고 짚신을 신었다. (서울역사박물관)

식민통치 성과 과시하려 고시엔 버금가는 종합운동장 건립

그로부터 19년 뒤인 1925년 일제는 근대 스포츠의 발상지인 훈련원 터 옆에 동양 최대 규모인 일본 고시엔(甲子園) 대운동장에 버금가는 조선 최초의 종합운동장을 건립했다. 5월 24일 공사를 시작해 10월 15일 개장했으니 올해로 개장 100주년을 맞았다.

이는 식민지 백성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3S(Sports·Screen·Sex) 정책의 일환이자 일제 식민통치의 성과를 과시하려는 수단이었다. 착공 당시 임시로 ‘훈련원공원운동장’이라고 부르다가 황태자 히로히토(裕仁)의 결혼을 기념한다는 뜻으로 ‘동궁전하 어성혼기념 경성운동장(東宮殿下 御成婚紀念 京城運動場)’이란 긴 이름을 붙였고, 줄여서 경성운동장이라고 했다. 시민들은 ‘한양 도성(漢陽 都城) 동쪽의 벌판 언저리’란 뜻의 ‘성동 원두(城東 原頭)’란 별칭으로 즐겨 불렀다.

그 자리에는 수도 방어와 국왕 경호 등을 담당한 훈련도감(訓鍊都監)의 분영(分營) 하도감(下都監)이 있었고 한양도성이 이어졌다. 일제는 성곽을 헐어내고 남소문동천(南小門洞川) 물줄기를 성 밖으로 흘려보내던 이간수문(二間水門)과 하도감 유구(遺構) 등을 매립한 뒤 터를 다져 운동장을 건설했다.

총면적은 7만 5000㎡(약 2만 3000평)에 수용 인원은 2만 5900명이었다. 이 가운데 500m 트랙을 갖춘 육상경기장 겸 축구장이 9000여 평으로 가장 컸다. 야구장은 6000여 평으로 홈플레이트에서 펜스까지의 거리는 중앙이 111m, 좌우가 108m였다. 스코어와 볼카운트를 표시하는 전광판까지 설치했다. 이밖에도 정구장, 수영장, 승마장 등이 차례로 들어섰다.

 

1925년 5월 30일자 경성일보에 실린 경성운동장 평면도. 위쪽이 육상경기장 겸 축구장, 아래 왼쪽이 야구장, 가운데는 정구장, 맨 오른쪽이 수영장 예정지다.
1925년 5월 30일자 경성일보에 실린 경성운동장 평면도. 위쪽이 육상경기장 겸 축구장, 아래 왼쪽이 야구장, 가운데는 정구장, 맨 오른쪽이 수영장 예정지다.

조선인들 올림픽 출전 꿈 이루려 마지못해 조선신궁 대회 출전

경성운동장 준공식 날 남산 서쪽 중턱에서는 조선신궁(朝鮮神宮) 진좌제(鎭座祭)가 열렸다. 일본 건국 신화의 주인공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와 메이지(明治) 천황의 신령을 모시는 의식이었다. 이를 기념해 경성운동장에서는 일제가 1919년 조선 거주 일본인을 중심으로 결성한 조선체육협회 주최로 3일간 조선신궁 경기대회가 열렸다. 일본 도쿄에서 열리는 메이지신궁 경기대회의 조선 지역 예선도 겸했다.

조선인들은 일본의 신을 내세운 대회에 출전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으나 올림픽 등 국제대회에 출전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의 영웅 손기정도 1934년 조선신궁 경기대회 육상 5000m에서 우승한 데 이어 이듬해 메이지신궁 경기대회 마라톤에서 1위를 차지해 올림픽 일본 국가대표로 선발될 수 있었다.

 

경성운동장에서 육상경기가 펼쳐지고 있다. 관중석 공사 중인 것으로 보아 촬영 시기는 1925년 10월 개장 전후로 추정된다. (서울역사박물관)
경성운동장에서 육상경기가 펼쳐지고 있다. 관중석 공사 중인 것으로 보아 촬영 시기는 1925년 10월 개장 전후로 추정된다. (서울역사박물관)

조선체육협회에 대항해 1920년 순수 조선인들이 결성한 조선체육회는 조선신궁대회와 같은 기간에 사립학교 운동장을 빌려 전조선대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여러 불편이 따르다 보니 조선체육회도 차츰 경성운동장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는 일제의 의도와 달리 경성운동장이 조선 민족의 자부심과 일체감을 드높이는 장소가 됐다.

일제 말기에는 학생과 일반인들의 군사 훈련장이자 관제 집회장으로 쓰였다. 1942년부터 대부분의 운동경기는 금지되는 대신 제식훈련이나 수류탄 투척대회 등이 치러지고 ‘징병제 실시 감사 결의대회’ 같은 관제 행사가 열렸다. 야구장과 축구장 이름도 각각 제1, 제2연성장(鍊成場)으로 바뀌었다.

경성운동장 빛낸 만능 스포츠맨 이영민과 프로복서 서정권

경성운동장이 낳은 스타의 효시는 만능 스포츠맨 이영민이었다. 대구 계성중에서 두각을 나타내자 서울 배재고보가 1923년 상당한 비용을 지불하고 편입시켰다. 국내 스포츠 사상 최초의 스카우트였다.

이영민은 그해 6월 경인역전(京仁驛傳) 경주대회와 1924년 전조선축구대회에서 배재고보의 우승을 이끈 데 이어 1925년 연희전문에 입학해 일본인 학생이 다수이던 경성의전(서울의대 전신) 야구팀과의 정기전에서 맹활약했다. 전조선경기대회에서도 1926년 400m 1위를 거머쥐고 2년 뒤 200m, 400m, 400m 계주, 800m 계주, 1600m 계주에서 5관왕을 차지했다.

 

경성야구장 개장 이래 최초의 홈런(本壘打·본루타) 소식을 보도한 동아일보 1928년 6월 10일자 3면. 오른쪽 사진은 홈런의 주인공인 연희전문 소속 이영민 선수.
경성야구장 개장 이래 최초의 홈런(本壘打·본루타) 소식을 보도한 동아일보 1928년 6월 10일자 3면. 오른쪽 사진은 홈런의 주인공인 연희전문 소속 이영민 선수.

1928년에는 경성의전을 상대로 경성운동장 개장 이래 첫 홈런을 기록했고, 서울과 평양 선발팀의 경평(京平) 축구대항전에서도 공격수로 이름을 날렸다. 1934년 11월 미국 아메리칸리그 올스타팀이 일본에서 친선경기를 벌일 때도 조선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일본 올스타팀에 뽑혔다. 대한야구협회 초대 이사장과 런던올림픽 축구대표팀 감독 등도 지냈다. 대한야구협회는 1958년부터 해마다 고교야구 종합타율 1위 선수에게 이영민 타격상을 수여한다.

1930년 전일본아마추어권투선수권대회를 석권하고 미국 프로 무대에 진출해 세계 플라이급 6위까지 오른 스타 복서 서정권도 1935년 10월 21일 경성운동장 특설링에서 스페인계 미국 선수 라슈 조를 4회 TKO로 눌러 6000여 관중을 열광시켰다.

막판 5분간 차범근 해트트릭으로 극적인 동점

경성운동장은 1945년 해방과 함께 서울운동장으로 개명했다. 그해 10월 태극기를 내걸고 ‘자유해방 경축 전국종합경기대회’를 치른 데 이어 12월에는 중단됐던 전국체전도 재개됐다. 임시정부 요인 환영식, 여운형·김구 장례식, 이준 열사 유해 봉안 국민장, 좌우익 단체들의 궐기대회 등도 이곳에서 거행됐다.

조명탑은 1966년과 1968년에 야구장과 축구장에 차례로 설치돼 시민들이 평일 퇴근 후에도 야간경기를 관람할 수 있게 됐다. 1963년 제5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재일동포 신용균의 호투와 한국운수(대한통운 전신) 소속 김응용의 홈런을 앞세운 한국이 일본을 연거푸 꺾고 최초로 우승한 덕이었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선수단을 장충동 공관으로 초청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박점도 감독과 김영조 코치가 조명탑 설치를 부탁하자 즉석에서 수락했다.

1971년에는 박대통령배 쟁탈 아시아축구대회가 창설됐다. 태국의 킹스컵, 말레이시아의 메르데카배를 겨냥한 대회로 약칭은 박스컵(Park’s Cup)이었다. 권위주의 정권의 상징과도 같은 이름이었으나 그 시절 당국자들과 축구협회 관계자들은 당연하게 여겼다.

 

1971년 5월 2일 제1회 박대통령배 아시아축구대회가 막을 올렸다. 한국과 태국 국가대표팀의 개막전에 앞서 박정희 대통령이 시축하고 있다. 바로 뒤에는 장덕진 축구협회장이다. (대한축구협회)
1971년 5월 2일 제1회 박대통령배 아시아축구대회가 막을 올렸다. 한국과 태국 국가대표팀의 개막전에 앞서 박정희 대통령이 시축하고 있다. 바로 뒤에는 장덕진 축구협회장이다. (대한축구협회)

1976년 제6회 대회에서 한국의 차범근이 말레이시아에 4대1로 뒤진 후반 38분부터 5분간 3골을 몰아쳐 극적으로 동점을 만든 것은 서울운동장 역대 최고의 명장면이었다. 박스컵은 1979년부터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로 바뀌었다가 1995년 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로 개명된 뒤 1999년 종료됐다.

고교야구 전성기 구가하고 프로야구·축구 개막전도 열려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이전 야구장에서는 고교야구가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 1960년 청룡기 서울시 예선에서 경동고 포수 백인천이 고교 선수로는 처음으로 홈런을 쳤고, 1972년 황금사자기 결승에서는 군산상고(군산상일고)가 부산고에 1대4로 뒤지다가 9회말 5대4로 전세를 뒤집어 ‘역전의 명수’란 별명을 얻었다.

1975년 전국우수고교초청경기대회에서 경남고 투수 최동원이 17이닝 연속 노히트 노런이라는 불멸의 기록을 세우는가 하면, 1981년 봉황대기 결승에서 선린상고(선린인터넷고) 박노준이 홈에 슬라이딩하다가 발목을 다쳐 병원에 실려가자 여학생 팬들이 병원으로 몰려가 울부짖기도 했다.

 

1996년 9월 15일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제50회 황금사자기 쟁탈 전국 고교야구대회 개막식. (서울시)
1996년 9월 15일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제50회 황금사자기 쟁탈 전국 고교야구대회 개막식. (서울시)

1982년 MBC 청룡(LG 트윈스 전신)과 삼성 라이온스의 프로야구 개막전과 이듬해 할렐루야 독수리와 유공 코끼리의 프로축구 개막전도 서울운동장에서 열려 본격 프로 스포츠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서울운동장 주변에는 각종 경기단체 사무실, 체육용품 판매점, 선수단을 위한 숙박업소 등이 밀집해 있었다. 실내경기의 본산 장충체육관과 국내 유일의 실내 아이스링크였던 동대문스케이트장도 가깝게 있어 이 일대는 한국 근대 체육의 요람이자 기록의 산실이고 모든 스포츠 애호가들의 성지였다.

88올림픽 계기로 잠실에 스포츠 메카 자리 내줘

그러나 60년간 국내 최고 시설과 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서울운동장도 어느덧 낡고 비좁아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정부는 1981년 서울이 88년 올림픽과 86년 아시안게임을 잇따라 유치하는 데 성공하자 잠실에 짓고 있던 종합운동장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1982년 7월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야구장과 1984년 9월 수용 인원 10만 명의 주경기장을 완공했다.

이에 따라 서울운동장은 축구 국가대표 대항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프로야구·프로축구 등 주요 경기를 잠실 서울종합운동장에 내주고 이름도 1985년 동대문운동장으로 바꿨다. 1985년 프로야구단 OB 베어스(두산 베어스)가 잠시 동대문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하기도 했지만 이내 프로는 잠실, 아마추어는 동대문에서 경기를 치르는 것으로 굳어졌다. 1989년 목동야구장이 개장하고 2001년 상암동에 축구전용 월드컵경기장이 들어서면서 동대문운동장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극심한 운영난 속에서 가늘게나마 목숨을 이어가던 동대문운동장은 2003년 사망 선고를 받는다. 건물이 낡았고 도심 교통의 흐름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서울시가 폐쇄 결정을 내린 것이다. 축구장이 2000년 10월 22일 수원 삼성과 성남 일화의 아디다스컵 결승전을 끝으로 먼저 문을 닫았다. 청계천 복원 공사로 갈 곳 잃은 주변 노점상 등을 모아 풍물시장으로 꾸몄다.

야구장의 마지막 경기는 2007년 11월 13일 추계 서울시 고교야구대회 배명고와 충암고의 대결이었다. 서울시는 그해 12월 13일부터 야구장 철거 작업에 들어갔다. 2008년 5월 14일에는 홍명보 국가대표 수석코치를 비롯한 축구인과 주민 대표 등을 초청한 가운데 ‘굿바이 동대문운동장’이란 제목으로 고별 행사를 열고 축구장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풍물시장으로 쓰이던 동대문운동장 축구장 겸 육상경기장이 2008년 5월 철거되고 있다. (서울시)
풍물시장으로 쓰이던 동대문운동장 축구장 겸 육상경기장이 2008년 5월 철거되고 있다. (서울시)

주변 상인들과 문화·체육단체 등은 생계 보장과 역사 보존 등을 내세워 거세게 반발했으나 서울시는 풍물시장의 신설동 이전과 대체 운동장 3개 건설을 약속하며 밀어붙였다. 대신에 주변 공간을 동대문역사문화공원으로 꾸미고 전국체전 때 쓰던 성화대와 조명탑 2개를 상징적으로 남겨놓았다. 동대문역사관과 동대문운동장기념관도 건립해 각종 유물과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DDP 건설 공사를 앞두고 실시한 발굴 조사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간수문. 문화재위원회 결정에 따라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뒤쪽으로 흔적만 남겨둔 동대문운동장 축구장 조명탑이 보인다. (서울시)
DDP 건설 공사를 앞두고 실시한 발굴 조사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간수문. 문화재위원회 결정에 따라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뒤쪽으로 흔적만 남겨둔 동대문운동장 축구장 조명탑이 보인다. (서울시)

훈련도감과 세계 최대 3차원 비정형 건축물 DDP 사이의 100년 역사

경기장 자리를 차지한 것은 대형 쇼핑몰 겸 전시장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였다. ‘디자인 서울’을 내세운 오세훈 서울시장이 역사와 문화와 디자인이 조화를 이룬 관광지 겸 랜드마크로 꾸미겠다는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국제 지명초청 공모 방식에 따라 해외 4팀, 국내 4팀의 설계도를 심사한 끝에 이라크 태생의 영국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출품한 ‘환유(換喩)의 풍경(Metonymic Landscape)’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하디드는 독일의 비트라소방서와 라이프치히 BMW 센트럴빌딩, 미국 신시내티 로젠탈 현대미술센터, 중국 광저우 오페라하우스 등을 설계했으며 건축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2004년 여성 최초로 받았다. “건축가가 아니라 조각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실용성이나 주변 경관과의 조화 등을 무시한 채 개성적 외관에만 매달린다는 비판도 받는다.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DDP. 지하 3층, 지상 4층, 최고 높이 29m, 연면적 8만6574㎡에 아트홀, 뮤지엄, 디자인랩, DDP마켓 등이 들어서 있다. (서울디자인재단)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DDP. 지하 3층, 지상 4층, 최고 높이 29m, 연면적 8만6574㎡에 아트홀, 뮤지엄, 디자인랩, DDP마켓 등이 들어서 있다. (서울디자인재단)

2014년 3월 21일 개관한 DDP 건물은 위에서 내려다보면 하이힐 모양이고 옆에서 볼 때는 외계인의 비행접시를 닮았다. 세계 최대의 3차원 비정형 건축물이다. 장중하고 유려한 비대칭 곡선미가 돋보이고 존재감이 뚜렷하다는 호평을 얻었다. 반면에 지나치게 건축비가 많이 든 데다 장소의 역사성을 무시했고 주변 건물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부정적 평가도 만만치 않다.

DDP는 지난해 1729만 명을 포함해 누적 방문객이 1억 명을 넘어섰고 올해는 2000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샤넬·디올·까르띠에 등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들이 쇼케이스를 펼쳤고 서울디자인워크와 서울패션위크도 해마다 개최돼 아시아의 디자인·패션 허브로 자리 잡았다. 외벽 222m를 미디어아트 캔버스로 활용한 ‘서울라이트(Seoulight) DDP’는 지난해 138만 명을 불러 모았다. 평소에도 독특한 외관을 구경하려는 외국 관광객이 북적인다.

 

지난 8월 28일부터 9월 7일까지 열린 ‘서울라이트 DDP 2025 가을’에서 관람객들이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8월 25일 세계 최장의 미디어 파사드 신기록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서울디자인재단)
지난 8월 28일부터 9월 7일까지 열린 ‘서울라이트 DDP 2025 가을’에서 관람객들이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8월 25일 세계 최장의 미디어 파사드 신기록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서울디자인재단)

밀어붙이기식 전시 행정의 산물로 눈총받던 DDP도 이제 새로운 역사를 쌓아가는 중이다. 지난 일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기억을 소환할 필요는 있다. 훈련도감에서 경성운동장·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을 거쳐 DDP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되짚어보며 역사적 교훈을 얻어야 한다. 그래야 먼 훗날 DDP의 철거를 논의할 때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고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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