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반공의 성지로 만들겠다” 자유센터 건립
타워호텔 층수는 6·25 참전 16개국과 한국 뜻해
현대사 급변으로 이어진 1974년 국립극장 총성
남산 외인아파트 철거 때도 살아남은 하얏트호텔
1961년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반공(反共)을 국시(國是)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 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를 혁명 공약 1호로 내세웠다. 대내적으로는 국민의 안보 불안감을 부추겨 국민적 단결을 강조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남로당 전력을 지닌 박정희의 좌익 혐의를 불식시켜 미국의 신뢰를 얻으려는 심산이었다.
초헌법적 통치기구인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한국·자유중국(대만)·필리핀·베트남·태국·홍콩·마카오·류큐(오키나와) 8개국이 1954년 결성한 아시아민족반공연맹(APACL:Asian Peoples Anti-Communist League) 제8차 정기총회가 연기되자 1962년 5월 10일부터 6일간 서울시청과 조선호텔 등에서 APACL 임시총회를 개최했다. 20개국으로 늘어난 회원국 대표들과 함께 16개국 옵서버, 4개 민간기구 관계자도 참석했다.
한국 대표단은 “한국을 아시아 반공의 성지(聖地)로 만들겠다”면서 반공 지도자 양성과 반공 이론 정립 등을 담당할 본부 설립 계획을 제안해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문구 수정 없이 명칭만 아시아반공센터에서 APACL 자유센터로 바꿨다.
1992년 이전엔 출국 전 자유센터에서 교육 받아야
박정희 정권은 관변단체인 한국반공연맹(한국자유총연맹 전신)을 건립 주체로 내세우고 장충단 권역의 동남쪽 대지를 무상으로 제공했다. 임시총회 폐막 후 4개월 만인 9월 15일 기공식을 치를 정도로 건립을 서둘렀다. 이듬해 광복절에 맞춰 개관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당시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87달러에 불과한 최빈국이어서 대규모 국가 건축 프로젝트를 수행할 자금이 없었다. APACL 회원국들도 대부분 재정 여력이 빠듯해 약속한 건립 기금 지원을 차일피일 미뤘다. 박 정권은 공무원과 회사원 봉급의 일부를 자발적 기부 형식으로 모금하고 영화관 관람료와 고궁 입장료 등에서 자유센터 건립 기금을 떼어내 당초 계획보다 1년 4개월 가까이 늦은 1964년 12월 3일 개관했다.
자유센터에는 APACL 사무국과 한국반공연맹이 입주했으며 온 국민의 반공교육장으로 활용됐다. 각급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정기적인 반공 교육을 실시했으며, 1992년 이전까지 외국으로 나가는 모든 국민이 이곳에서 소양 교육을 받아야 했다.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1989년 반공연맹도 자유총연맹으로 바뀌고 반공 교육도 시들해졌다. 그러나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뉴라이트 세력이 결집하자 반공의 기치가 다시 펄럭이기 시작했다. 2011년에는 자유센터 뒤편에 초대 대통령 좌대 포함 5m20㎝ 높이의 이승만 동상도 새롭게 건립됐다. 팔순 생일을 기념해 1956년 8월 조선신궁 터에 80m 높이로 세워졌다가 1960년 4·19혁명으로 철거된 이후 51년 만에 남산 자락에 이승만 동상이 다시 등장한 것이다.
지금은 자유센터에 자유총연맹 사무국 외에 웨딩홀, 택배회사, 식당 등이 들어서 있다. 2024년 3월 문화체육관광부는 남산 공연예술벨트 조성 방안의 일환으로 자유센터를 20년간 장기 임차해 국립공연예술창작센터(가칭)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자유총연맹과 업무협약도 체결했다. 내년까지 공연연습실, 스튜디오, 무대제작소 등을 꾸며 다양한 공연단체에 제공할 방침이다.
타워호텔이 북측 대표단 숙소로 낙점된 까닭
본관 격인 자유센터와 함께 숙소 건물인 국제자유회관은 골조만 올라간 상태에서 공사가 중단됐다. 정부는 고심 끝에 보상금 1억 원을 받고 국제자유회관 건물과 대지 3만여 평을 국제관광공사(현 한국관광공사)에 넘겼다. 관광공사는 공사를 마무리한 뒤 타워호텔이란 이름으로 1967년 7월 영업을 시작했다. 건물의 지상 층수는 17층으로 6·25 참전 16개국과 대한민국을 상징한 것이다.
타워호텔은 외국인을 겨냥한 숙소였으나 개관 당시에는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인이 그리 많지 않았다. 내국인들은 호텔 문화가 익숙지 않은 데다 도보로는 타워호텔을 드나들기 어려워 영업 부진을 면치 못했다. 1980년대 마이카 시대가 개막하자 투숙객과 이용객이 늘었고 1988년 특2급호텔로 승격했다.
접근성의 약점이 되레 장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1972년 9월 남북적십자회담이 서울에서 열리자 정부는 시민들과의 접촉을 차단하기 위해 북측 대표단을 타워호텔에 묵게 했다. 서울운동장(1985년 동대문운동장으로 개칭했다가 2003년 폐쇄)에서 축구 국가대표 경기가 열릴 때도 선수단의 숙소로 애용됐다. 경기장에서 가까우면서도 숙소 근처에 술집이 없어 선수들의 일탈을 막기가 용이했기 때문이다.
1972년 6월 10일 문을 연 옥외 수영장은 투숙객이 아니어도 이용할 수 있어 인기가 높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초대형 워터슬라이드가 설치돼 화제를 모았다. 비키니 수영복 차림의 연예인이 화보 촬영을 하던 단골 장소이기도 했다.
2007년에는 부동산개발업체 새한씨앤씨가 타워호텔을 1400억 원에 사들여 글로벌 리조트 업체인 ‘반얀트리 호텔앤리조트’와 20년간 운영계약을 맺었다. 반얀트리는 벵골 보리수를 뜻한다. 2008년 6월부터 2년간 리모델링 공사를 거쳐 ‘반얀트리 클럽앤스파 서울’이란 이름의 회원제 도심형 리조트 겸 5성급 호텔로 탈바꿈했다. 층수는 17층에서 19층으로 늘어난 반면 객실은 218개에서 50개로 줄었다.
성곽에서 헐어낸 돌더미를 건물 축대 쌓는 데 활용
자유센터와 타워호텔은 김수근(1931~1986)이 설계했다. 경기고와 서울대 건축학과를 거쳐 일본 도쿄예술대 건축학과와 도쿄대 대학원을 다녔다. 박춘명과 함께 국회의사당 현상 공모에 당선돼 1959년 귀국한 뒤 홍익대·건국대·국민대 교수로 재직하며 건축사무소 공간을 운영했다.
그는 스위스 태생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한 모더니즘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의 영향을 받아 건물 1층을 기둥만으로 지지하고 벽을 없앤 필로티 구조와 콘크리트 노출 공법을 즐겨 썼다. 자유센터는 콘크리트 노출 공법이 사용된 국내 최초의 건물이다. 입구 캐노피는 우리나라 전통 한옥 처마와 버선의 곡선을 살려 디자인했다.
경동교회, 불광동성당, 마산 양덕동성당, 샘터 사옥, 공간 사옥, 잠실 올림픽주경기장, KIST 본관, 한국일보 구 사옥, 경향신문 사옥, 벽산빌딩, 르네상스호텔, 국립청주박물관, 문예회관, 한계령휴게소, 서울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경찰청 청사 등 숱한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논란도 많았고 과오도 컸다. 자유센터는 르코르뷔지에가 설계한 인도 찬디가르시 펀자브주의회 건물을 표절했다는 의심을 받았고, 국립부여박물관(현 사비도성 가상체험관)은 왜색 시비를 낳았다. 세운상가에서 진양상가까지 이어지는 약 1㎞ 띠 모양의 주상복합 건물군은 ‘불도저 서울시장’ 김현옥이 온갖 반대와 저항을 억누르고 건설한 것으로 박정희식 개발독재의 상징물이 됐다. 박종철 군 고문치사 현장인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도 그가 설계했다.
한양도성 성곽을 허물어가며 자유센터와 타워호텔을 지은 것도 몰역사적이고 반문화적 행위였다. 심지어 성곽에서 헐어낸 돌더미를 건물 축대를 쌓는 데 활용하기도 했다. 당시 아무리 박정희 정권의 서슬이 시퍼렇고 사회 전반의 문화유산 인식이 희박했다 해도 건축 전문가로서는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이었다.
지금도 한양도성 순성(巡城)길은 반얀트리호텔 때문에 끊겨 있다. 신라호텔과 서울클럽(구 사파리클럽) 뒤편의 성곽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다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와 자유센터를 지나 서쪽으로 방향을 틀면 반얀트리호텔이 나온다. 성곽의 흔적은 호텔 본관 뒤쪽으로 이어지지만 한양도성 답사객들은 오른쪽으로 돌아가야 한다. 훼손된 문화유산을 복원하고 순성길도 제대로 이어줘야 하는데 국가유산청과 서울시 등 관계 당국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북한 평양대극장 의식해 국립극장 건립
반얀트리호텔 정문 맞은편에는 국립극장이 들어서 있다. 국립극장은 1950년 4월 29일 중앙국립극장이란 이름으로 출범해 부민관(府民館·서울시의회 의사당)을 공연장 겸 사무실로 잠시 쓰다가 전란을 피해 대구로 옮겨갔다. 1957년 환도했으나 부민관이 국회의사당으로 바뀌어 대신 명동의 시공관(時空館·명동예술극장)을 국립극장으로 꾸며 활용했다.
지금의 국립극장 건물은 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1967년 착공돼 1973년 8월 완공됐다. 대극장 객석 수 1494석에 회전무대, 좌우 이동무대 등 당시로서는 최첨단 시설을 갖췄다. 1960년 완공된 2500석 규모의 북한의 평양대극장을 다분히 의식한 경쟁심의 발로였다.
그러나 이곳 역시 타워호텔과 마찬가지로 관객의 접근성이 매우 나빴다. 그 뒤로 지하철 3호선과 7호선을 건설할 때도 이곳을 비켜갔다. 국립가무단과 국립교향악단은 각각 세종문화회관과 KBS로 이관됐다. 국립극단도 서계동 문화공간에 터를 잡았다가 최근 복귀를 결정했다. 그 사이 대극장과 소극장은 해오름극장과 달오름극장으로 이름을 바꿨고 리모델링을 통해 객석 수를 줄였다.
국립극장이 외신들의 톱뉴스를 장식한 사건도 있었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 대통령 부인 육영수가 재일동포 문세광의 저격을 받아 절명한 것이다. 합창단원으로 참석했던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2학년생 장봉화 양도 경호원이 쏜 총탄에 맞아 숨졌다.
육영수 사망을 계기로 우리나라 현대사는 요동을 쳤다. 프랑스 그르노블대 어학연수 과정을 밟고 있던 대통령 장녀 박근혜가 중도 귀국해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대신했다. 박정희는 심복들과 자주 술자리를 가졌고, 이른바 채홍사(採紅使)를 동원해 젊은 여성들과의 잠자리도 서슴지 않았다. 경호 실패의 책임을 지고 ‘피스톨 박’ 박종규가 경호실장에서 물러났고, 후임에는 훗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충돌한 차지철이 임명됐다. 5년 뒤 10·26 사태를 빚은 박정희의 엽색 행각과 심복 간의 갈등이 이때부터 싹튼 것이다.
국립극장을 설계한 이희태(1925~1981)는 순수 국내파로 종교 건축의 대가로 불린다. 흑석동 명수대성당, 혜화동성당, 절두산성당, 국립공주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 부산시립박물관, 성라자로마을 등이 대표작이다. 세종문화회관과 소공동 롯데호텔 등을 설계한 엄덕문(1919~2012)과 함께 엄앤드이 건축사무소를 운영하기도 했다.
1990년대 이후 한국 찾은 미국 대통령 모두 하얏트에 투숙
하얏트는 전 세계 79개국 1400여 개 호텔을 거느린 글로벌 호텔 그룹이다. 1957년 9월 27일 창업자 제이 프리츠커가 미국 LA국제공항 인근의 하얏트 하우스 모텔을 인수한 것이 시작이다. 토머스 프리츠커 이사회 의장 등 프리츠커 가문이 최대주주이다. 하얏트재단은 1979년부터 ‘건축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매년 시상할 정도로 건축미를 중시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한때 하얏트호텔의 주요 주주였다.
하얏트(Hyatt)는 고대 영어 단어 ‘hegh’(언덕, 높은 곳)와 ‘att’(정착)의 합성어로 ‘높은 곳에 위치한 장소’라는 뜻이다. 파크·그랜드·리젠시·플레이스·하우스·안다즈 등 다양한 브랜드가 있다. 국내에서는 삼성역 인근의 파크 하얏트 서울과 해운대의 파크 하얏트 부산이 최고급이지만 1978년 7월 1일 아시아 최초의 하얏트 체인으로 문을 연 남산의 그랜드 하얏트 서울이 가장 유명하고 오래됐다.
남산 하얏트호텔은 하얏트 리젠시로 출발했다가 1993년 그랜드 하얏트로 승격했다. 소유권은 한일 합작 투자사인 서울미라마관광회사에서 1998년 하얏트재단과 2019년 인마크 사모투자합자회사를 거쳐 2022년 사모펀드 JS코프-블루코브 컨소시엄으로 넘어갔다. 616개의 객실과 53개의 스위트룸을 보유하고 있다.
하얏트호텔의 가장 큰 장점은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이라는 입지 조건이다. 건물 형태도 남산을 껴안는 힐튼호텔과는 반대로 등지고 있다. 홀수 번호 객실에서는 남산을 바라볼 수 있고, 짝수 번호 객실에서는 한강이 내려다보인다. 남산 산책로와 곧바로 연결되며 외국인을 위한 상점가와 유흥가가 밀집한 이태원도 가깝다.
주변에 높은 건물이 없어 보안과 경호에 적합한 데다 용산 미군기지와도 인접해 조지 H.W 부시부터 1990년대 이후 모든 미국 대통령이 이곳에서 묵었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과 왕세자 시절의 찰스 왕, 톰 크루즈·리어나도 디캐프리오·키아누 리브스·소피 마르소 등 인기 영화배우들도 숙박 명부에 이름을 올렸다.
박정희 한마디에 군사시설 없애고 호텔 신축
남산 하얏트호텔은 미국의 존 모포드(1920~1999)가 설계했다.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과 예일대 대학원을 거쳐 하버드대 교수로 재직했다. 단순성과 기능성에 중점을 두었으며 LA 월셔그랜드센터, 캘리포니아미술관, 뉴욕 리츠칼튼 등의 작품을 남겨 세계 100대 건축 디자이너에 뽑혔다.
하얏트호텔은 아름다운 건물이지만 남산 남쪽을 가로막아 미관을 해치고 있다. 원래 군사시설이 있었으나 박정희 대통령이 1972년 12월 외국인아파트 준공식 때 아파트 옥상의 헬기 포트를 시찰하다가 눈에 거슬리자 당장 없애고 그 자리에 호텔을 지으라고 지시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4년 서울 정도(定都) 600년을 맞아 ‘남산 제 모습 찾기’ 사업을 벌이며 외인아파트를 철거했다. 당시 발파 해체 공법으로 16층과 17층짜리 건물 두 동이 각각 8초 만에 폭삭 주저앉는 장면은 TV로 생중계됐다. 이 자리는 야외 식물원으로 꾸며졌고, 폐콘크리트는 반포~양재 간 경부고속도로 확장공사 때 보조기층재로 재활용됐다.
서울시는 1991년부터 8년간에 걸쳐 외인아파트를 비롯한 남산 주변의 정부기관 21개 건물, 외국인 주택 52개 동, 개인주택 16채를 헐어냈다. 필동 수도방위사령부도 남태령으로 옮겨가고 남산골 한옥 마을이 들어섰다. 그러나 바로 옆 하얏트호텔은 버젓이 살아남았다. 2010년대 들어서도 옛 안기부 건물 등 각종 공공기관 건물을 헐고 녹지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지지부진한 형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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