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에서 눈길 끈 깃발, 응원봉 등 한눈에
'민주주의와 깃발', 전시 아닌 긴급전시행동
뭐라도 해야 했던 절박한 마음에 주는 위로
식민지역사박물관서 8월 17일까지 열려
‘민주주의와 깃발’이라는 포스터를 보았다. ‘긴급전시행동’이란다. 5월 16일부터 8월 17일까지 석 달간 식민지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린단다. 아, 전시회구나. 지난 반년 내란불면의 밤을 지새는 동안 광장에서 마주친 깃발을 생각했다. 혁명의 와중에 이렇게 현재의 혁명을 벌써 기록하기 시작했구나. 반가웠다.
깃발 전시라는 말에 처음에는 실물 깃발이 전시되는지, 광장의 깃발 사진을 찍은 콘텐츠인지 궁금했다. 아무래도 소중한 작은 뜻이 모여 만들어진 소규모 박물관이라 광장의 수많은 실물 깃발을 모아서 전시하기는 쉽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또 아직 혁명이 진행되고 있는지라 광장에 들고 나가야 할 깃발을 기증하는 곳도 많지 않겠다 싶었다.
대선일인 6월 3일이면 그 자의 12월 3일 계엄난동으로부터 딱 6개월이다. 대선이 끝나면 과연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 일상으로 돌아가도 괜찮을까? 지난 촛불혁명 이후처럼, 지난 6월항쟁 이후처럼, 지난 4.19 이후처럼 혁명은 다시 좌절되고 마는 것은 아닐까? 며칠 전 홍준표 지지자들이 뜬금없이 이재명을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아, 이렇게 또 혁명은 좌절되는가 하는 마음이다. 긴급전시행동에는 희망이 있겠지?
박물관으로 향하는 길에 반가운 기호1번 유세차가 지나갔다. 그런데 이재용과 함께 찍은 사진이 부각된다. 이재명의 성장이 분명 그 자의 성장과 다름을 이해하지만, 선거에서 중도 확장도 중요함을 알지만, 우려는 계속 된다. 박노해가 규정했듯이 빛의혁명 제4관문으로 정권교체는 당연하지만, 과연 제5관문 사회대개혁은 이어질 수 있을까?
시민이 일상으로 돌아가도 정권 담당자가 계속 사회대개혁을 알아서 추진할 정도로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확신은 전혀 들지 않는다. 걱정을 안고 가는 길에 비도 계속 오락가락 하고, 중간에 소나기가 쏟아져 한참 패스트푸드점에 피해 있기도 했다. 앞으로 여전히 험난할 혁명의 좌절을, 정권을 새로 맡은 이들이 외면하는 광장의 목소리를 괜히 애꿎은 소나기를 탓하면서 박물관을 찾아갔다.
굳이 안을 보지 않아도(?) 될만한 전시
박물관 근처에 다 왔는가 싶어 두리번거리는데, 뭔가가 나풀나풀거린다. 박물관 건물 벽에 온갖 깃발이 조밀하게 붙어있다. 정작 ‘식민지역사박물관’이라는 건물명은 겨우 찾았다. 여기부터 전시 관람이 시작이다.
박물관학, 콘텐츠학, 아카이브학을 연구 용역에 필요해 두루 공부하긴 했지만 아직 아마추어 수준이어서, 이번 깃발 전시가 과연 그 분야의 전문가 시각에서는 어떨지 평가하긴 조심스럽다. 하지만 아마추어 답사자로서도 ‘민주주의와 깃발’ 전시는 아주 의미심장하다. 이번 전시 기획자에게는 죄송할 수도 있지만, 박물관 안에 들어가 보지 않아도 충분히 감동을 주는 전시다. 당연한 말이지만, 전시를 보러 안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안은 안대로 또 다른 감동이 있다.
박물관에 도착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이번 빛의 혁명 와중에 광장에서 만날 수 있었던 온갖 재밌는 깃발이 나부꼈다. ‘진회색고양이연합’, ‘시험끝난학생들모임’ 등등… 반가웠다. 계엄 내란은 끔찍했지만, 전국에서 모인 재밌는 깃발은 우리에게 얼마나 힘이 되었던가. ‘민중의 벗’ 무슨무슨 ‘연대’ 같은 전통적인(?) 깃발도 보인다. 이 또한 반갑다.
깃발은 늘 구호나 소속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아픔. 좌절된 혁명의 기억은 보존되지 못한 깃발로 사라졌다. 이번 빛의혁명은 다르다. 유쾌하고 창의적인 빛의혁명 깃발은 내란에 맞서는, 민주주의를 지키는 민의 대열이 압도적임을 보여주는 증거다.
사실 박물관으로 향하면서 선입견은 이랬다. 민주, 인권, 생태 같은 가치를 지향하는 작은 박물관들이 해온 기존의 전시와 비슷하겠거니. 그래서 힘을 보태자 하는 정도의 생각을 하고 출발했다. 박물관에 거의 도착해서 건물벽에 무언가 나풀거리는 광경을 보았을 때 눈이 번쩍 띄였다. 빌딩 벽면이 전부 그대로 광장이 되었다.
어떤 박물관이든 전시나 운영 시간이 한정돼 있다. 가끔은 5시 35분에 도착해 입장 시간을 5분 넘기는 바람에 못 들어간 경험도 있다. 특별하게도 이번 ‘민주주의와 깃발’ 전시는 24시간 언제든 가서 볼 수 있다.
그냥 박물관에 도착하는 순간부터가 감동이었다. 광장에 직접 나섰던 사람들은 혁명 참여자로서 스스로에게 큰 칭찬과 위안을 받게 되리라 생각한다. 광장에서 그저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던 이들에게도 한번 전시를 가서 보기를 권한다. 빛의 ‘혁명’이라고 하는데, 지금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벌어진 혁명이 얼마나 창의적이고, 유쾌하고, 그야말로 빛이 나는지를 확인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깃발을 세어보니 8X11이다. 밑에서부터 읽어갔는데 절반도 읽기 전에 뒷목이 아프다. 포기하고 그냥 내부 전시를 보러 들어갔다. 입구를 찾아 모퉁이를 도는데, 어라 이쪽 건물벽도 온통 깃발이다. 방금 전 목이 아파 포기하고 입구를 찾았는데, 그새 잊어버리고 이쪽 벽면의 깃발을 읽어나간다. 이쪽 벽면에는 전시회 제목 ‘민주주의와 깃발’도 4개가 깃발 형태로 나눠 함께 걸려있다. ‘남태령’도 보이고 ‘전국젠더좌표’도 보인다.
‘민주묘총’은 알겠다. 민주노총에 고양이를 합친 말이겠다. 아무리 해도 이해 안 되는 말도 있다. ‘단결 트젠’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트위터는 인생의 낭만’이라는 문구가 같이 있다. 트위터 제네레이션인가? 요즘은 인스타가 대세 아니었나? 페이스북 세대. 단국대학교 교수회인줄 알았는데 ‘단두대학교’다. ‘감귤포장학과 동문회’는 실재하는지 궁금하다.
또 뒷목이 아프다. 광장화한 건물벽을 둘러보느라 시간이 너무 지나갔다. 혹시 안에는 다른 전시가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불길한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그렇다면 정말 엄청난 파격인데, 설마…
박물관 입구에 반민특위터 표석이 보인다. 다른 자리에 있던 걸 임시로 옮겨놓은 모양이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따로 한번 제대로 취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은 깃발 전시를 보러왔으니, 다음을 기약하기로 한다.
뭐라도 해야겠기에, 절박했던 시간에 대한 보상
드디어 안으로 들어갔다. 개막일이라 그런지 아직 완전히 전시 준비가 끝나지 않은 듯 분주하다. 아! 5시에 있을 개막행사를 준비하는구나. 언뜻 둘러보니 응원봉이 보인다. 처음엔 왜 시위하는데 응원봉을 들고 나올까 궁금했다. 누군가 페이스북에 올린 게시글을 보고서야 이해가 됐다. 아이돌의 팬에게 응원봉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런데 그 중요한 것을 들고 나왔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최애’를 발굴하고 키우듯이 민주주의를 지키는 마음이겠거니 싶다. 혁명을 이렇게 재밌게도 할 수 있는 시대가 됐구나 싶어 반가웠다. 한편 젊은 날 거리를 뛰어다닌 보람이 있구나 싶어 뿌듯하기도 했다. 이번 민주주의 수호 투쟁은 ‘응원봉혁명’이라 불리겠구나 했는데, ‘빛의혁명’으로 거의 굳어졌다.
찬찬히 둘러보려고 마음먹었는데, 제대로 보려고 가까이 간 첫 전시물부터 울컥하게 만든다. 그대로 옮겨본다. 전시물은 멜로디언이다.
“12월 남태령에서 장구 치시는 분을 보고 ‘소리가 크니까 좋아 보인다’는 생각이 들어 집에서 들고나온 소리 큰 악기입니다. 12월 30일부터 4월인 지금까지 들고 다니고 있는데 몰랐습니다. 제가 멜로디언을 9개를 망가트리고 10번째 멜로디언을 들고 다니게 될지!”
지난 반년 누구나 비슷하지 않았을까? 탄핵이 됐나, 구속이 됐나, 파면이 됐나, 끝이 없다. 뭐라도 해야지, 이제 뭘 해야 되지, 절박한 마음으로 주말에는 광장으로, 낮이고 밤이고 에스엔에스를 들여다보지 않았던가. 개인적으로 시민언론 민들레는 좋은 기사 찾아보기 정도만 하면서 고마워하고 있었는데, 내란을 막기 위한 절박한 마음에서 시민기자로 등록해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됐다.
지난 시간에 대한 ‘보상’이라는 표현이 모자란다면 ‘위로’가 좋을까? ‘민주주의와 깃발’ 전시는 기획자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빛의혁명 참여자에게는 보상이자 위로다. 관람 소감을 정리하는 지금도 전시물 하나하나의 절박함에 감사하고, 연대를 보내고 싶고 고무찬양되는 마음이다.
계엄 이후 반년 가까운 시간 밤잠을 설치면서 뭐라도 해야지, 했던 절박한 마음에 주는 따뜻한 위로. ‘민주주의와 깃발’ 전시는 한 마디로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아카이브를 수집하고 전시를 기획한 분들에게 감사 드린다.
근래 많이 고민 중이었다. 다시금 혁명의 좌절을 겪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는가. 대선이 끝나고 계속 혁명의 동력을 어떻게 이어갈 수 있을까. 전시를 따라 가면서 오늘 우리는 역사에서 힘을 얻고 나아가지만, 오늘의 우리에게 힘을 얻고 나아가는 미래세대도 있겠구나. 또 다른 차원의 보상과 위로가 있었다.
우리는 오늘 미래의 역사를 쓰고 있다. 물론, 지금 ‘빛의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수호 운동이 과연 후세에 어떻게 기록될지는 좀 더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겠다. 그렇지만 우리의 크고작은 절박함이 미래의 주역들에게 역사는 승리할 수 있음을, 민은 성공할 수 있음을 확인시키는 아카이브로 남는 과정을 직접 지켜보는 재미도 있다. 지금 여전히 혁명이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원래 전시를 적당히 소개하려고 갔는데, 애초 방향과 상당히 달라졌다. 밖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고 내부 전시도 울컥하고 감동에 젖어, 스포일러를 최소화한다는 변명으로 마무리하기로 한다.
이번 전시는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이 공동으로 기획했고 8월 17일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온라인 전시도 하고 있다.
관련기사
개의 댓글
댓글 정렬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