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도 탄핵도 둘 다 잘못이라는 양비론

민주주의 지켜낸 빛의 혁명 가리는 장애

노골적 양비론보다 교묘한 양비론이 문제

'책임 희석' '대안 미제시' 등이 식별기준

많은 국민들은 오늘의 내란 사태 해결을 위한 노력을 빛의 혁명으로 높이 평가한다. 개인적으로는 민주주의 수호 혁명으로, 응원봉 혁명으로 본다.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지금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앞으로 더욱 강화하는 것이다. 갈 길은 멀다. 내란 수괴는 버티고, 후안무치한 국힘 주류 정치인들과 현 정부의 고위 관료들은 온갖 궤변으로 책임을 회피하려고 한다. 극우 전체주의자들이 자유를 참칭하고 애국을 들먹이며 반대 정치세력을 멸절하려다 실패하고도 되레 국민을 겁박하고 있다.

빛의 혁명으로 어둠을 몰아내야 한다. 극우적 선동에 부화뇌동하거나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자는 직접적인 내란 가담·동조·비호자들이다. 이들에게는 적어도 과거 김영삼 정부 시절의 하나회 척결 수준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공직 취임 금지는 기본이다. 헌법과 법률에 따라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단죄를 해야 한다. 선거에 출마하더라도 국민적 압력을 통해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나마 어둠은 명확하다. 내란에 직접 가담하고 동조하고 비호하는 자들은 분명히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온갖 궤변으로 책임을 회피하고 후안무치하게 버티겠지만, 빛의 혁명에 나선 국민들은 끝까지 내란 가담·동조·비호자들을 심판할 것이다. 내란의 원죄를 물어 재기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조선일보의 '비상계엄 탄핵소추...원로 인터뷰' 시리즈.
조선일보의 '비상계엄 탄핵소추...원로 인터뷰' 시리즈.

노골적인 양비론

문제는 양비론이다. 양비론은 내란에 가담하고 동조하고 비호하는 자들을 돕는다. 어둠을 몰아내는 빛을 흐리는 회색이다. 단테는 이미 13세기부터 양비론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무려 800년 전이다. 단테가 말하는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을 지킨 자는 오늘날 양비론자들이다. 단테는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가 양비론자들에게 돌아갈 몫이라고 일갈했다. 직접 악을 저지른 자들에게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를 돌려야 정의 같기도 하지만, 그만큼 양비론의 위험성을 설파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내란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빛의 혁명을 진행하고 있는 지금 양비론의 버전은 다양하다. 계엄'은' 잘못이지만, 탄핵'도' 잘못이라는 류의 노골적인 양비론이 대표적이다. 둘 다 잘못이라는 물타기로 내란 가담·동조·비호자들의 편을 든다. 너무 노골적이라 그나마 내란세력을 편드는 양비론임을 알아차리기가 어렵지 않다.

계엄난동 이후의 탄핵'도' 잘못이라는 양비론은 내란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빛의 혁명을 방해한다. 계엄난동 이전에 행해진 탄핵 남발(?)이나 입법 독재(?)가 잘못이라는 주장은 계엄난동을 합리화하는 대표적인 궤변이다. 현 정부는 국회가 제대로 국민의 대표기관으로 작동하지 못하게 거부권을 남발했고, 검찰권을 반대 정치세력의 정치활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한 도구로 남용했다. 국회는 궁여지책으로 헌법에 보장된 탄핵 등의 절차를 이용하여 일종의 방어권을 행사했다는 점을 외면한다.

교묘한 회색 양비론

더 큰 문제는 교묘한 양비론이다. 잘 보이지 않는다. 얼핏 들으면 논리적으로 맞는 말도 같다. 심지어 회색이 너무 뿌예서 빛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수 의석을 차지한 야당은 국가와 국민을 위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대신 줄곧 정부를 흔들었고,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당선됐음에도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정치 지도자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모르고 있다면 국민이 불행하다. 다수당인 민주당 역시 국민을 위한 역할이 큰데, 그걸 제대로 하지 못했다. (김형석, 조선일보 2024.12.17.)

민주당도 '국민을 위한 역할'이 크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걸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하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2024년 12월 31일 사설 제목을 살펴보자.

나 홀로 뒷걸음 2024 대한민국…모두 겸허히 반성하고 성찰해야 (한국경제)

참담한 '국장' 1년, 정치 불확실성부터 해소돼야 (한국일보)

여야, 애도 기간 정쟁 멈추고 崔 대행 체제 안정화 협력하라 (세계일보)

헌정사상 첫 현직 대통령 체포영장, 참담하고 부끄럽다 (세계일보)

사설의 논조는 표면적으로 균형 잡힌 입장을 표방하고 논리도 그럴듯해 보인다. 그렇지만, 문제를 두루뭉술하게 분석하거나 실질적인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지 않는다. 제대로 경중을 따지지 않거나 인과관계를 왜곡한다. 교묘한 양비론을 식별하기 위한 몇 가지 기준을 제시한다.

기준 1 ; 책임 소재 희석

양비론은 책임 소재를 희석시켜 문제의 본질을 흐리게 만든다. '여야가 정쟁을 멈추고 협력하라'는 식의 논조는 갈등의 원인과 책임이 다름을 간과한다. 집권당이 정책 실패나 리더십 부재로 상황을 악화시켰다면, 야당의 비판은 당연한 민주적 과정이다. 이를 단순히 정쟁으로 묶어버리면, 잘못된 결과의 원인 제공자와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려는 노력이 동등하게 취급된다. 평상시의 정치 과정에서도 이러할진대, 최고권력자가 나서서 계엄난동을 일으켜 시작된 내란 사태는 더 말해 뭣 하랴. 가해자가 져야 할 책임을 희석하고 오히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쪽에 동일한 책임을 묻는다. 양비론은 오히려 가해자가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근거가 되기 십상이다.

기준 2 ; 감정적 접근

'참담하고 부끄럽다'는 식의 감정적 표현은 강렬한 인상을 준다. '모두가 반성하고 성찰해야 한다'는 식의 접근은 구조적 문제를 개인적·정서적 수준으로 축소한다. '국정 마비' 운운도 마찬가지다.

한국 정치의 불확실성과 혼란은 단순히 태도 문제가 아니다. 권력 분립의 실패, 제도적 비효율, 특정 세력의 독점적 권력 행사 등 사안에 따라 정확한 원인을 가려야 한다. 제대로 분석한 원인을 지적하지 않고 '모두'에게 겸허한 반성을 요구하는 것은 문제 해결의 실질적 방향을 제시하지 못한다. 계엄난동을 자행한 대통령을 체포하는 것이 국격 침해라니, 어이없다. 내란사태가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도 적반하장으로 국민을 겁박하는 자들에게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사태 해결이 길어지는 것이야말로 심각한 국격 침해다. 내란을 일으킨 가해자의 잘못을 피해자가 바로잡기 위해 노력 중인데, 전형적인 물타기다. 가해자가 먼저 반성하고 성찰해야 함을 명확히 해야 한다. 가해자의 잘못에 대해 엄정한 책임을 묻고,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피해자에게는 격려와 지원을 해야 한다.

기준 3 ; 대안 미제시

감정적 접근은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치적 무력감을 심어줄 뿐이다. 문제의 현상적 심각성을 부각하는 데 그칠 뿐, 가해자에게 실질적인 압박을 가하지 않는다. 실천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도 문제다. 상황을 관망하면서 비판적 태도를 취하는 듯 보이지만, 대안이나 문제 해결의 방향성을 제시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정쟁을 멈추라'고 하고 싶다면 이를 위한 제도적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평상시 정치 과정이라면 예컨대 중재 메커니즘을 강화하자거나, 초당적 협력 기구를 설립하자거나. 지금과 같은 내란 사태에서는 내란 가담·동조·비호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우선이다.

 

2024년 12월 28일 중앙일보 윤평중 교수 인터뷰 "정치적 초인에 과잉 기대, 제왕적 대통령제와 맞물린 비극" [출처:중앙일보]
2024년 12월 28일 중앙일보 윤평중 교수 인터뷰 "정치적 초인에 과잉 기대, 제왕적 대통령제와 맞물린 비극" [출처:중앙일보]

기준 4 ; 이론적·추상적 가능성의 우려

극우반동의 시도는 실패했지만 엄청난 상처를 남겼고 까딱 잘못하면 극좌 반동이 나올 수도 있다. 인식의 비관론이다. 그러나 극우반동의 시도를 시민들의 힘으로 좌초시킨 것처럼 만약 극좌 반동의 시도가 있다 하더라도 현대 한국문명의 공통 토대가 절대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윤평중, 중앙일보 2024.12.28.)

실제 발생한 현실과 가능성이 없는 일을 동일선상에 놓는 교묘한 양비론이다. 윤평중의 경우 우파에 대한 통절한 비판은 타당하다. '극우반동'이라는 격한 표현까지 사용했다. '반동'이라는 표현은 종북공격의 빌미를 주기 딱 좋은 표현인데, 합리적 보수주의자로 평가받는 철학자가 사용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윤평중의 '극좌 반동'은 누구를 향한 것인가? 통절한 극우 반동 비판이 타당하다고 끝날 일이 아니다. 극좌 반동이 나올 수 있으니 극우반동의 시도가 잘못이라니. '합리적 보수주의자'로 불린다는 분이 극우를 비판했으니, 다 된 것인가? '극좌 반동의 시도'는 그저 혹시나 모를 미래를 대비하자는 뜻으로 한 것이니 괜찮은가? 추상적 가능성마저 염려해야 하는 철학자의 마음 씀을 오독한 것인가? 우리 국민을 믿는다는 뜻이니 괜찮다고 위로를 받고 힘을 얻어야 하는가? 윤평중이 말하는 극좌반동은 과연 누구를 향하는가? 민주당인가? 이재명인가? 응원봉을 들고 광장에 모인 시민들인가? 광장에 직접 가지 못해 미안해 하며 오늘도 열심히 '좋아요'를 누르는 핑거 레볼루셔니스트인가? 몇 번을 따져봐도 교묘한 양비론이다.

교묘한 양비론도 이제 손절하자

앞에서 '극우전체주의자들이 자유를 참칭하고 애국을 들먹이며 반대 정치세력을 멸절하려다 실패하고도 국민을 겁박하는 시대'라고 표현했다. 온갖 양비론이 진실을 가리려 하지만 그 틈에서 희망의 빛을 쌓아가는 시대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양비론도 당연히 손절해야 한다. 몇 가지 교묘한 양비론을 식별하기 위한 기준을 제시했다. 이외에도 더 있을 테다. 집단지성을 모을 때다. 내란사태를 해결하는 빛의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지혜라도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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