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티지 보고서’ 공저자들…“미일관계 한 시대 종언”

소프트 파워론자 조지프 나이 6일 세상 떠나

나이와 의기투합했던 아미티지도 지난달 13일 타계

1995년 ‘동아시아 전략보고’→새 미·일 방위협력지침

미국의 대일 안보전략, 일본 재무장 가이드라인

코리아 핸들러는?

'소프트 파워'론자 조지프 나이 전 하버드대 명예교수. 아사히신문 5월 8일
'소프트 파워'론자 조지프 나이 전 하버드대 명예교수. 아사히신문 5월 8일

‘소프트 파워’론으로 유명한 미국 국제정치학자 조지프 나이(88) 전 하버드대 명예교수가 지난 6일 사망했다. 그 사흘 전인 3일 일본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나이 교수는 “파워(권력)란 타자를 내가 바라는 대로 움직이는 능력”이라며, 3가지 종류가 있다고 했다. “위협에 의한 강제, 금전적인 보수, 그리고 매력”인데, 소프트 파워란 “타자를 (위협이나 돈을 쓰지 않고) 매료시켜 자신과 같이 움직이게 하는 힘”이라고 했다.

소프트 파워론자 조지프 나이 6일 타계

“소프트 파워를 구성하는 것은 그 나라가 지닌 문화, 국내 사회상황, 그리고 정치정책이나 외교방침 등 3가지다. 미국에서는 전통적으로 문화와 정치, 외교 등의 장면에서 시빌 소사이어티(시민사회)가 큰 역할을 해 왔다. 파워의 원천은 정부가 아니라 대학이나 재단, 비영리단체 등에 있다.”

나이 교수는 예컨대 “중국은 전통문화가 매우 매력적이지만 공산당 정권이 시민사회를 엄격하게 관리하면서 소프트 파워가 독립적으로 발달할 기회를 빼앗고 있다”며 “그것이 미국과 중국의 큰 차이”라고 주장했다.

1995년 ‘동아시아 전략보고’→새 미일 방위협력지침

나이는 빌 클린턴 정권 때인 1994~1995년 국방 차관보를 지낸 뒤 동서냉전 이후의 미·일 안보관계 재정의를 주도하면서 ‘동아시아 전략보고’(1995년)를 발표했다. 소련 등 사회주의권의 파산(냉전 붕괴) 뒤 주한 미군, 주일 미군 축소 내지 철수가 거론되던 시절에 나이는 ‘동아시아 전략보고’에서 동아시아 미군 10만 주둔체제 유지를 주장하며 미일동맹 강화를 주창했다. 이는 1990년대 중반에 미일 군사(안보)관계 강화를 지향하면서 ‘전수방위’를 규정한 일본 ‘평화헌법’의 제약을 넘어 동아시아, 나아가 글로벌 차원에서 일본의 군사적 역할 확대(재무장)를 재촉한 미일 방위협력 지침(‘신 가이드라인’)으로 이어졌다.

2000년 이후 6차례 발표된 ‘아미티지 보고서’

그의 작업은 2000년대 초 조지 부시(아들) 정권 때 국무부 부장관을 지낸 리처드 아미티지와의 협동작인 ‘아미티지 보고서’로 연결된다. 민주당 출신의 나이와 공화당 출신 아미티지의 초당적인 작업의 핵심주제는 군대 보유와 전쟁, 집단적 자위권 행사 포기를 명기한 일본 평화헌법 체제의 사실상의 해체와 일본 재무장,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한 미일 안보동맹체제 강화였다. 아베 신조 전 총리가 길을 닦고, 기시다 후미오 전 총리가 법적으로 제도화한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와 ‘적기지 공격능력’ 보유의 밑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집요하게 요구한 것이 ‘아미티지 보고서’였다.

미국의 대일 안보전략, 일본 재무장 가이드라인

2014년 7월 1일 아베 내각이 각의(국무회의)결정으로, 헌법상 허용되지 않는 집단적 자위권(동맹국이 공격을 받을 경우 함께 싸울 권리) 행사를 내각 법제국 장관 교체를 통해 ‘용인’했고, 2015년 9월 19일엔 이른바 ‘안보 법제’로 전수방위 원칙을 뒤엎어 평화헌법을 사실상 형해화했다. 2022년 12월 기시다 내각이 ‘안보 3문서’ 개정으로 ‘적기지 공격능력’ 보유를 제도화한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거기에는 ‘평화헌법’을 패전 직후의 일본에 강요해 놓고 냉전이 시작되자 일찍부터 그것의 해체(개헌)를 집요하게 요구해 온 미국의 ‘아미티지 보고서’가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2000년 10월 제1차 발표 뒤 2024년 4월까지 모두 6차례 발표된 ‘아미티지 보고서’는 미국의 대일 군사안보전략 보고서이자 일본 재무장 가이드라인이었다.

 

나이와 함께 '아미티지 보고서'를 작성한 리처드 아미티지 전 미국 국무부 부장관. 아사히신문 4월 15일
나이와 함께 '아미티지 보고서'를 작성한 리처드 아미티지 전 미국 국무부 부장관. 아사히신문 4월 15일

나이와 초당적으로 의기투합했던 아미티지도 타계

소프트 파워론자인 나이가 일본 재무장과 미일 안보동맹체제 강화를 주창한 것은 얼핏 모순돼 보이지만, 그의 연구 키 워드가 ‘파워’(힘, 권력)였다는 점에서 논리적 일관성이 있지 않을까. 어쨌든 소프트 파워론자인 그가 그런 개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거나 관심이 없어 보이는 공화당 우파 도널드 트럼프와 상대의 허점을 이용하는 그의 약육강식 ‘장사치’ 개념인 ‘딜’(거래)에 거부감을 보이고 싫어한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정서적으로도 그랬겠지만, 그것으로는 이길 수 없고, ‘파워’를 장악할 수 없다고 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같은 공화당 고위관리 출신인 아미티지도 트럼프를 싫어했고, 지난 선거 때는 민주당 조 바이든 지지를 선언했다. 아미티지는 동맹과 전략개념이 없는 트럼프의 대외정책이 미국의 파워를 약화시키고 패권적 지위를 허물어뜨릴 것이라고 보지 않았을까.

그 아미티지도 지난 4월 13일 폐 색전증(폐 혈관 막힘)으로 79세 나이에 사망했다. 국무부 부장관 퇴임 뒤에도 적극적으로 미일동맹에 대한 제언을 계속했고, 만년에 이르기까지 일본 정부 관계자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자민당 안보정책의 대미 창구역할을 하면서 미일관계 강화에 힘쓴 아미티지는 일본인들에겐 친숙한 이미지의 친일파(지일파)였다.

대표적 ‘재팬 핸들러’들 타계 “미·일 관계 한 시대 종언”

미국의 대표적인 ‘재팬 핸들러’인 이들이 같은 시기에 잇따라 유명을 달리하자 “미일관계의 한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상징하는 사건이라는 얘기들이 나오고 있다. 히토쓰바시대학 아키야마 노부마사 교수는 “미일동맹의 심화 궤적은 나이 교수의 공헌을 빼고 얘기할 수 없을 것”이라며 “트럼프 정권하에서 미일관계가 동요 기미를 보이고 있는 중에 아미티지 씨에 이어 나이 교수가 타계한 것은 우연이라곤 하나 미일동맹의 새로운 시대를 암시하는 듯도 하다”고 말했다.(<아사히> 5월 8일)

‘재팬 핸들러’(Japan Handler/ 일본 조련사)는 주로 미국에서 일본에 대한 정책을 입안하거나 일본과 미국 관계를 콘트롤(통제)하는 역할을 하는 정치가, 관료, 지식인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핸들러라는 말의 부정적, 비판적 이미지대로 그들은 일본을 마음대로 주무르며 조작하고 콘트롤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들과의 사이에 ‘사사카와 재단’을 비롯한 일본 민간 및 정부의 막강한 자금줄이 얽혀 있을 것이라는 관측도 많다.

‘아시아 차르’ 커트 캠벨도 아미티지 인맥

아미티지와 나이는 재팬 핸들러의 대표적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아미티지의 경우 ‘아미티지 학교’라고도 불린 거대한 인맥을 구축했다. 부시 정권 때 국가안보회의 아시아국장을 지낸 마이클 그린, 바이든 정권 때의 국무부 부장관 커트 캠벨, 트럼프 1기 정권 때의 국방차관보 랜들 슈라이버 등이 대표적이다. 한국 일본 등 아시아 국가들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커트 캠벨 부장관은 ‘아시아 차르’, ‘아시아 조정관’으로 불렸다.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 정권 때인 1981년에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국방 차관보 대리를 거쳐 부시 정권 때 국무부 부장관을 지낸 아미티지는 부장관 재직 당시 북한이 핵무기를 사용할 경우 어떻게 할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호언장담하기도 했다.

“그런 짓을 하면, (미군의 공격으로) 한반도 북쪽에 거대한 크레이터(구덩이)가 생겨날 것이다. 후세의 사람들은 거기에 북한이라는 나라가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코리아 핸들러는?

‘코리아 핸들러’는? 일본만큼의 자금을 동원하거나 치밀하지 못할지 모르겠으나 미국에는 한반도 정책에 중요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한국 또는 동아시아 문제 전문가들도 많다. 군사정권 시절인 1970년대 중반에 터져나온 ‘박동선 사건’(코리아 게이트) 같은 경우도 그들의 존재를 짐작하게 한 떠들썩한 사건이었다. 12.3 계엄령 발동 이후 요동치는 한국의 정치적 격동기에 그들이 팔짱끼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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