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 가장한 '법비 카르텔' 그 해체를 고민한다] ①
바이마르 공화국은 파시즘에 왜 쉽게 굴복했나
지배엘리트 오만&미성숙 시민사회가 비극 초래
"법대로" 외치며 직역 이익 수호…국민 위에 군림
명분은 '질서' 수단은 '법'이지만 결과는 '국민지배'
"가벼운 법비 단죄가 또 다른 전체주의 등장 예고"
'대한민국 보수는 왜 매국 우파가 되었나?'의 이병권 작가가 지귀연 판사와 조희대 대법원의 최근 행태를 보면서 법비 카르텔의 해체를 제안하는 3부작을 보내왔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외국 사례를 통해 사법 카르텔의 해체 없이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음을 논증한다. 글 싣는 순서는 ① '히틀러의 법기술자들' 우리 곁에도 있다 ② 국민주권 우롱한 브라질 사법 엘리트, 미완의 청산 ③ '시한폭탄'이 된 사법 카르텔 어떻게 해체할 건가, 이다. <편집자 주>
2024년 12월 3일,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내란 사건은 단순히 윤석열 전 대통령과 몇몇 몽상가들의 음모가 아니었습니다. 퍼즐 조각이 하나씩 맞춰지면서, 이번 내란은 대한민국 지배 엘리트 집단의 조직적인 시도였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들은 사법체제를 장악하고 법의 권위를 무기로 삼아 영구지배 체제를 획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광장을 빛으로 물들인 민주 시민은 질서정연한 분노로 국회와 함께 이들의 음모를 하나씩 분쇄하고 있습니다.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반란 핵심 세력은 검찰과 경찰 뒤에서 장막을 걷어 젖히고 직접 무대에 등장하여 정체를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양승태를 뒤이은 조희대가 직접 등판한 것입니다. 마무리를 하려고 했을까요.
윤석열의 석방을 결정한 지귀연 판사, 이에 동조한 검찰, 대통령 선거에 개입을 선언한 조희대 대법원 체제는 민주주의와 국민주권 위에 군림하려는 오만한 행태를 여과 없이 보여 주었습니다. 따라서 개혁의 과제는 내란에 가담한 몇몇 행동대장을 처벌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음을 국민들에게 환기했습니다. 이 모든 음모를 주도하고 사법적 완성도를 높인 핵심 집단을 도려내는 외과 수술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란이라는 악성 종양이 언제든지 되살아나 파시즘 체제로의 전환 시도가 가능하다는 사실이 명백해지고 있습니다.
파시즘 몽상가들은 지지자들을 선동하여 혐오를 조장하고 폭력으로 체제를 달성하려 합니다. 고전적인 수법입니다. 이를 제도로 완성하는 것은 법률가들이며, 사법부의 전문가들, 즉 법비들입니다. 우리는 현대사에서 독재 권력을 옹호하며 비판 세력에 대한 처형을 합리화한 수많은 사례를 알고 있습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인혁당 사건,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 고문과 살상을 통해 수많은 민주 인사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검사, 판사들을 기억합니다. 과거 독재 시절 법비들은 권력의 하수인으로 부림을 받았을지 모르지만, 현재의 법비들은 직접 선수로 나서서 민주주의의 꽃이라 할 선거를 지배하려 합니다. 이제는 조력자가 아닌 권력자가 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이재명 후보에 대한 조희대 사법 카르텔의 결정이 그 결정판입니다. 이 사법 카르텔을 완전히 도려내지 않고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한 발짝도 전진할 수 없다는 것을 조희대 일파는 국민에게 역설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법 카르텔의 이러한 작태는 대한민국에서만 기승을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나치즘을 탄생시킨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 초기 나치즘 체제를 사법적으로 완성시킨 이들도 법률가들이었습니다. 또한 군부독재에서 벗어났던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서도 사법 카르텔은 법비로서 진면목을 발휘했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역사적, 글로벌 작태를 되새김으로써 우리 사회와 민주주의가 무엇을 어떻게 개혁하고 새로운 공화국에서 법 질서를 세워나갈지 고민해야 합니다. 파시즘의 완성은 바로 법비(法匪)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법과 권력의 결탁에 무너진 바이마르 공화국
바이마르 공화국은 제2제정(1871~1918)이 붕괴한 직후인 1919년에 수립되었습니다. 헌법은 형식적으로는 가장 진보적이고 완성도 높은 민주공화정 체제였습니다. 그러나 이토록 이상적인 헌법이 어째서 파시즘에 그렇게도 쉽게 굴복했을까요? 그 이유는 헌법 그 자체보다, 이를 운영하는 엘리트의 의식과 독일 시민사회의 구조적 미성숙에 있었습니다. 바이마르 체제의 지배 엘리트들은 전제주의와 권위주의적 사고를 떨쳐내지 못한 채, 전근대적 인지 부조화 상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독일 시민사회는 프랑스혁명이나 영국의 입헌주의처럼 스스로 체제를 바꾼 시민혁명의 경험이 없었습니다. 이들에게 ‘국민의 힘’은 체제 저항이 아니라 체제 순응의 방향으로 작동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위로부터의 명령에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셈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 이후, 영국과 프랑스가 부과한 과도한 전쟁배상금은 독일 경제를 무너뜨렸습니다. 피폐해진 삶은 시민들에게 민주주의에 대한 염원이 아닌, 강력한 질서와 권위를 지닌 국가를 갈망하게 했습니다. 이 틈을 타 히틀러는 혐오와 배타, 극단적 민족주의를 선동하며 나치즘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파시즘은 허약한 헌법의 틈이 아니라, ‘시민 없는 민주주의’의 틈을 타고 들어왔습니다.
칼 슈미트(Carl Schmitt, 1896 -1985)는 20세기 독일의 대표적인 법학자이자 정치철학자로, 나치 정권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인물입니다. 1933년 5월 1일 나치당(NSDAP)에 입당하여 곧바로 프로이센 국무위원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11월 국가사회주의 독일 법률가 협회 회장에 취임했습니다. 1934년 6월 ‘장검(長劍)의 밤(Night of the Long Knives)' 사건(독일 군부내 반 나치 성향으로 의심받은 다수에 대해 법적 조치는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학살을 감행한 사건)‘ 이후, 슈미트는 히틀러의 정치적 숙청을 정당화하는 논문 「지도자는 법을 수호한다(Der Führer schützt das Recht)」를 발표하여, 히틀러의 행위를 '최고 형태의 행정적 정의'로 묘사했습니다. 반유대활동에도 앞장섰습니다.
히틀러의 학살이 '최고행태의 정의'? 칼 슈미트
1936년 10월 베를린에서 열린 법학자 회의에서 슈미트는 독일 법률에서 '유대 정신'을 제거할 것을 요구하며, 유대인 학자들의 저작물에 별도의 표시를 할 것을 주장했었죠.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서 정치의 본질을 '친구와 적의 구별'로 정의하며, 이러한 구분이 국가의 정체성과 생존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그는 『법과 권위』에서 법의 정당성은 합법성보다 권위에 기반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히틀러의 독재를 정당화하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습니다. '지도자 원칙(Führerprinzip)'과 관련하여 슈미트는 히틀러의 권위를 법 위에 두는 것을 지지하며, 국가의 법률 체계를 히틀러의 의지에 종속시키는 이론을 전개했습니다.
전쟁 후 슈미트는 연합군에 의해 체포되어 1년간 수용소에 수감 되었으나,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기소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전후에도 자신의 나치 부역에 대해 반성하지 않았으며, 학계에서 고립된 채 생을 마감했습니다. 칼 슈미트의 사례는 법률가가 독재나 파시즘 체제에서 어떻게 법을 왜곡하여 정권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의 이론과 행적은 오늘날에도 법과 정치의 관계를 논의할 때 중요한 반면교사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태생의 헬린데 파우어 스투더(Herlinde Pauer-Studer, 1953~) 교수는 비엔나 대학교(University of Vienna)에서 실천 철학(Practical Philosophy)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현재 명예 교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연구 분야는 윤리학, 정치철학, 법철학 등으로, 특히 나치 독일 시기의 법률가들이 어떻게 법을 이용하여 전체주의 체제를 정당화하고 강화했는지를 분석한 연구로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과 사례연구의 시금석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파우어 교수는『히틀러의 법률가들(Justifying Injustice: Legal Theory in Nazi Germany』(2020)이라는 책을 통해, 칼 슈미트 외에도 나치 독일의 법률가들이 단순히 체제에 순응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치 이데올로기를 수용하고 법적 정당화를 제공함으로써 전체주의 체제의 구축에 기여했다고 주장합니다.
체제 순응 아닌 적극적인 나치 수용
파우어는 이 법률가들의 부역행위를 크게 세가지 범주로 설명합니다. 첫째, 나치즘이라는 이데올로기 수립에 적극 동조하는 경우입니다. 파우어 교수는 나치 정권 초기인 1933년의 '국회의사당 방화령(Reichstag Fire Decree)'과 '수권법(Enabling Act)'에 대한 법률가들의 반응을 분석하여 법률을 통해 나치 정권의 권력 강화를 법적으로 정당화하며, 새로운 통치 체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사례를 제시합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한스 프랑크(Hans Frank, 1900~1945)입니다. 그는 제3제국의 총통 법무관점령 폴란드의 총독 (Generalgouverneur)직을 수행했습니다. 프랑크는 나치당의 법률 고문으로서 히틀러의 권력 강화를 법적으로 지원했습니다. 1939년 폴란드 침공 후에는 점령지 총독으로 임명되어 유대인 학살과 강제 이주 정책을 실행했습니다. 그는 전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교수형 되었습니다. 둘째, 인종차별적 법률의 정당화하는 경우입니다. 다수의 법률가들은 '뉘른베르크 법률(Nuremberg Laws)'과 같은 인종차별적 법률을 제정하고 정당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유대인과 비유대인 간의 혼인을 금지하고, 유대인의 시민권을 박탈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으며, 법률가들은 이를 통해 나치의 인종 이데올로기를 법적으로 뒷받침 했습니다.
한스 프랑크 외에도 빌헬름 슈투카르트(Wilhelm Stuckart, 1893~1945)를 대표적으로 거명할 수 있습니다. 그는 나치 ’국민법정(People’s Court, Volksgerichtshof)의 수석판사로 부역하며, 형식적인 재판을 통해 반체제 인사들에게 사형을 선고한 인물입니다. 또한 뉘른베르크 법률을 공동으로 작성하여 유대인과 비유대인 간의 혼인을 금지하고, 유대인의 시민권을 박탈을 주도했습니다. 1945년 미군의 베를린 공습으로 법정 내에서 사망했습니다. 셋째, 법률 교육을 통한 이데올로기 확산에 부역한 경우입니다. 법률가들이 나치 이데올로기를 법학 교육에 통합하여, 미래의 법률가들에게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을 주입했다고 지적합니다. 이를 통해 나치 정권은 법률 체계 전반에 걸쳐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확산할 수 있었다고 분석합니다.
한나 아렌트 "법치 가장한 독재의 부역자들"
빌헬름 프릭(Wilhelm Frick, 1877~1946)은 나치 독일의 내무장관으로서, 나치 이데올로기를 법제화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유대인과 정치적 반대자들을 탄압하는 법률을 제정하였으며, 나치의 인종정책을 법적으로 정당화했습니다. 파우더의 연구는 법률가들이 단순한 체제 순응을 넘어 적극적으로 전체주의 체제를 정당화하고 강화하는 데 기여한 사례를 통해 법률가들이 바로 전체주의 파시즘의 주역이었음을 고발합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전체주의의 기원(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에서 전체주의 체제에서 법률가들의 역할을 매우 비판적으로 분석합니다. 그녀는 법률가들이 법의 형식과 절차를 유지하면서도, 그 내용을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에 맞게 변형시켜 법치를 가장한 독재를 가능하게 했다고 지적합니다. "전체주의 체제에서 법률가들은 법의 수호자가 아니라, 권력의 도구로 전락한다"고 경고합니다. 동시에 종전 후 다른 전범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처벌을 받았던 법률가들에 대한 단죄의 미약함이 또 다른 전체주의의 등장을 조장할 수 있다는 지적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윤석열 정권은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보기 드문 사법 기반 정권이었습니다. 대통령이 검찰총장 출신이었고, 최측근이자 법무부 장관인 한동훈은 ‘검찰공화국’이라는 말이 과하지 않을 만큼 법치를 정치화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들은 법을 정의의 도구가 아니라, 권력 유지의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그러한 구조는 채 3년도 가지 못했습니다. 2024년 12월 3일, 대통령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일으킨 내란 사건은 정권의 붕괴를 불러왔습니다. 그날은 단지 한 정권이 끝난 날이 아니라, ‘사법 권력의 쿠데타’가 국민의 힘에 중단된 역사적 분기점이었습니다.
검찰공화국과 사법 권력의 쿠데타
우리는 이 사태를 통해 사법 권력이 견제받지 않고 응집될 때, 그것이 어떻게 파시즘적 권위주의 체제로 이행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과 나치 체제에서 보았듯이, 헌법이 아무리 민주적일지라도 그것을 운영하는 법률가 집단이 권력과 결탁할 경우, 법은 통제 수단이 아닌 억압 도구로 전락합니다. 대한민국의 사법 권력 또한 그러한 길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대법원장 조희대 체제는 그 흐름의 일부였습니다.
그는 사법부의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을 지켜야 할 위치에 있었지만, 현실에서는 대통령실과의 충돌을 피하고, 기존 권력과 조화를 이루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그 결과, 법원은 공정성을 잃고 침묵과 방조로 일관했습니다. 특히 윤석열, 김건희, 한동훈에 대한 모든 사법 판단은 극단적으로 관대한 방식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이는 우연이나 개별적 착오가 아니었습니다. 체계적으로 그렇게 작동하도록 설계된 것이었습니다. 이 법률가 공동체는 자신들을 ‘법의 사도’라 여기지만, 실상은 직역 이익의 수호자에 가깝습니다. 그들은 “법대로 했을 뿐”이라는 말을 방패 삼아 모든 정치적 판단을 회피합니다. 그러나 해석의 여지가 있는 법을 현실에 적용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정치적 행위입니다. 그 행위를 회피하거나, 일방적 방향으로만 적용한다면, 그것은 정치적 중립이 아니라 정치적 배반입니다. 그들이 입은 법복은 더 이상 정의를 상징하지 않고, 권력을 은폐하는 ‘도포’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구조적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저는 현재 우리가 직면한 현실과 너무도 유사한 과정을 거쳤던 브라질과 룰라 대통령의 사례를 살펴보고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해결방향을 찾아야 할지 생각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법비 카르텔 해체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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