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밀리아 페레즈> 변신과 속죄의 재구성

신체적 변화와 내면의 갈등…정의? 이미지 세탁?

춤과 노래로 풀어낸 갈등, 영화의 표현주의 시도

리히터 그림 <숲속의 연인> 흐린 형상과 맞물려

'에밀리아 페레즈' 영화 스틸컷. NGO 갈라 행사장에서 레드 수트의 리타, 내적 혼란이 우아한 춤사위 속에 은밀히 감춰진 순간이다. 사진=롯데시네마
'에밀리아 페레즈' 영화 스틸컷. NGO 갈라 행사장에서 레드 수트의 리타, 내적 혼란이 우아한 춤사위 속에 은밀히 감춰진 순간이다. 사진=롯데시네마

어떤 이유에서든 현실에 대한 불만족은 사람들에게 도피하려는 갈망이나 새로운 시작을 꿈꾸게 한다. 현대 사회가 점점 더 복잡해지고 불평등이 심화할수록 이러한 욕구는 보다 강해진다. 만약 이러한 변화를 실현할 힘이나 능력을 갖춘 인물이 있다면 그의 선택과 결과는 어떻게 전개될지, 자못 궁금해 진다.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2025)는 정체성과 자기 변신의 문제를 모색하며, 과거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욕망이 실현되었을 때, 현실에서 어떻게 부딪히는지를 보여준다.

프랑스 감독 자크 오디아르는 끊임없이 여러 장르에서 영화적 경계를 확장하는 창작자로 명성을 쌓아왔다.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2005)의 심리적 깊이, <예언자>(2009)의 잔혹한 성장 서사, <디판>(2015)은 이민자의 현실까지. 그의 필모그래피는 매번 새로운 장르에서 실험을 시도했다. <에밀리아 페레즈>는 마약 카르텔이라는 폭력적 세계를 배경으로, 성 정체성과 자기 구원의 문제를 탐구하는 뮤지컬 드라마다.

영화는 범죄 조직의 보스가 성전환을 결심하고 구원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이 자체만으로도 상상력의 지평을 넓히는 실험이라 할 수 있으며, 성전환이 지닌 시대적 의미를 조명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인간은 과연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수 있는가? <에밀리아 페레즈>는 이 질문을 붙잡고, 현실 속에서 그것이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를 찾아간다.

멕시코 마약 밀매 조직을 운영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한 마니타스 델 몬테(칼라 소피아 가스콘)는 오랜 염원이었던 여성으로 살아가기를 선택한다. 성전환 수술로 에밀리아 페레즈로 변신한다. 변호사 리타(조이 살다나)는 그의 계획을 돕는 조력자로서 점차 깊은 신뢰를 쌓아 후견인 역할까지 맡게 된다. 그러나 에밀리아의 여정은 신체적 변화에 머물지 않고, 과거 범죄에 대한 죄책감과 속죄의 과정으로 이어진다.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 스틸컷. 마약 카르텔 두목 마니타스 델 몬테는 성전환 수술 후 에밀리아 페레즈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변호사 리타와 함께 범죄 조직에 희생된 이들의 시신을 찾아내는 NGO 활동에 나서며,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된다. 사진=롯데시네마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 스틸컷. 마약 카르텔 두목 마니타스 델 몬테는 성전환 수술 후 에밀리아 페레즈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변호사 리타와 함께 범죄 조직에 희생된 이들의 시신을 찾아내는 NGO 활동에 나서며,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된다. 사진=롯데시네마

영화에서 뮤지컬 넘버는 인물들의 내면을 세밀하게 드러내는 중요한 장치로 작용한다. 특히 변호사 리타는 회사의 방침에 따라 명백한 살인 사건을 자살이라고 변론해 피의자의 승리를 끌어낸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자기 삶에 깊은 회의를 느끼며, "그들의 신발을 핥아먹는다"고 부당한 현실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본다. 이 장면은 개인적 고뇌를 넘어, 부조리한 법체계와 사회 구조를 비판는 영화의 정치적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한다.

<에밀리아 페레즈>는 개인적 변신과 사회적 속죄라는 두 층위를 동시에 표방한다. 에밀리아는 카르텔 희생자 가족을 돕기 위해 NGO를 설립하고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정의를 구현해 나간다. 그러나 이는 충분한 속죄일까? 그녀의 변화는 진정한 갱생인가, 아니면 과거를 지우려는 시도에 불과한가? 영화는 이 질문을 통해 속죄와 자기 구원의 경계에서 갈등하는 그녀의 선택을 조명한다. 변화란 단순한 단절이 아니라 과거와의 복잡한 조율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시사한다.

문화적 전유와 진정성의 문제

<에밀리아 페레즈>는 해외 영화제에서 상을 받으며 호평을 받았지만, 정작 멕시코 현지에서는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영화는 대부분 프랑스 스튜디오에서 촬영되었으며, 멕시코 문화와 현실을 깊이 있게 반영하지 못했다는 거센 지적을 받았다. 마약 카르텔이라는 소재를 다루면서도 정작 현지인의 시각은 배제되었고, 배우들의 멕시코 억양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점도 논란이 되었다. 이는 제작 방식의 한계를 넘어, 지역적 정체성과 문화적 사실성을 구현하는 데 실패하며, 결국 영화의 몰입도를 낮추고 서사적 설득력을 약화하는 요인이 되었다.

영화는 독창적인 서사를 시도했지만, 그만큼 강렬한 갈등과 대립이 필요했음에도 이를 충분히 구축하지 못했다. 극적 깊이와 긴장감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캐릭터의 내면 변화도 개인적 갈등과 사회적 대립이 고조되지 않아 주요 사건들이 평면적으로 흐르며 몰입도를 떨어뜨린다. 마니타스의 성전환 이전과 이후의 변화가 핵심이지만, 그녀가 가족, 동료, 그리고 카르텔 세계와 관계가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대한 연출은 왠지 정교하지 못하다.

 

영화 '에밀리아 페페즈' 스틸컷. 에밀리아의 아내인 제시(셀레나 고메즈)가 감정의 극한에 도달하는 순간을 담고 있다. 혼란과 분노, 상실이 뒤섞인 몸부림을 표현한다. 사진=롯데시네마
영화 '에밀리아 페페즈' 스틸컷. 에밀리아의 아내인 제시(셀레나 고메즈)가 감정의 극한에 도달하는 순간을 담고 있다. 혼란과 분노, 상실이 뒤섞인 몸부림을 표현한다. 사진=롯데시네마

에밀리아는 성전환과 신분 변경을 하고 NGO 활동을 펼치는데, 이러한 시도는 필연적으로 마약 카르텔과 정부의 유착을 드러내며 심각한 충돌을 파생한다. 그럼에도 영화는 이를 피상적으로 다룰 뿐이다. 에밀리아가 희생자 가족들을 만나는 장면에서도 그들이 직면할 법적·사회적 위협과 두려움은 표출되지 않는다. 이렇게 현실적으로 첨예한 내용들이 희석되면서 서사의 긴장감과 현실성은 미미하고, 영화가 받은 호평이 무색해지고 말았다.

그림으로 확장해 보는 영화의 서사

이 영화의 서사와 기본 플롯은 인간의 정체성과 자기 변화의 문제에 대한 탐구이다. 이를 상징적으로 압축한 작품으로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1932~)의 포토페인팅 ‘숲속의 연인’(Lovers in the Forest, 1966)을 들 수 있다.

숲속에서 서로를 마주한 연인들의 모습, 흐릿한 경계를 따라 번지는 잔상들. 흑백의 몽환적 분위기 속에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사랑과 변신, 기억과 망각이 교차하는 이 이미지에서 연인은 현실에 존재하지만, 동시에 사라질 듯한 유령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다. 이는 영화 속 에밀리아가 자신의 과거를 지우고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지만,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흔적 속에서 살아가는 것과 맞닿는다.

 

독일의 현대미술가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포토페인팅 ‘숲속의 연인’
독일의 현대미술가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포토페인팅 ‘숲속의 연인’

자크 오디아르의 영화는 자기 변신이 가능할 것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그 변신은 축적된 차이 속에서 형성되는지, 과거의 잔해를 짊어진 채 나아가는지? 영화 속 에밀리아는 이 질문을 온몸으로 경험하며, 과거의 폭력과 단절하고 새로운 이름을 얻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전환이 아닌, 과거를 끌어안은 채 나아가는 과정이 된다.

리히터의 이미지는 사랑과 기억, 그리고 존재의 흔적을 담아낸다. 숲은 보호와 은폐의 공간이자 내면의 성찰이 이루어지는 장소로 기능한다. 에밀리아가 자신을 새롭게 정의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과거 권력은 현재의 NGO 활동을 보호하는 힘으로 이어진다. 관계와 감정이 보존된 채 변화가 이루어지는 이 과정은 결국 아내에 대한 소유욕을 자극하며 파국을 초래한다. 그림 속 연인들이 잎사귀 뒤로 스며들어도 사라지지 않듯, 에밀리아의 변화 또한 기존 세계와 완전히 단절되지 않았다. 변신이란 과거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융합해 새로운 형태로 나아가는 존재 방식이다.

이런 점에서 이미지는 ‘에밀리아 페레즈’가 전달하려는 메시지와 맞물리면서도 충돌한다. 인간은 과거를 완전히 지울 수도, 현재를 온전히 장악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만, 동시에 변화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 나간다. 이는 환상 속 이상의 숲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수많은 이들이 삶의 전환점을 맞닥뜨리며 과거와의 갈등 속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모색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숲속의 연인’에서 흐릿한 형상이 그들의 파국이 아니라는 걸, 또한 에밀리아의 정체성도 단일한 실체를 넘어 지속적인 변화를 거듭하는 존재의 과정이라는 걸 보았다. 오늘날 격변하는 현실과 마주하며,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어떤 존재로 남을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길을 찾는다. 변화는 단절만이 아닌, 과거의 속죄로부터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과정이다. 이것이야말로 오디아르의 영화에서 찾을 수 있는 ‘새로 태어남’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영화 속 리타의 가사처럼 ‘몸(생각)을 바꾸면 영혼을 바꾸고, 사회를 바꿔 모든 걸 바꿀 수 있다’ 는 것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는 언제나 길을 걸어가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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