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언중의 언어생활을 토대로 해야
국가기관인 국립국어원이 좌우해선 안돼
'터키’가 아니라 ‘튀르키예’라고?
2022년 터키가 영문 국명을 터키(Turkey)에서 튀르키예(Türkiye, ‘터키인의 땅’이라는 뜻)로 변경한다고 발표했다. 터키 정부는 영문명 ‘Turkey’가 ‘칠면조’라는 뜻 외에 ‘비겁자’ ‘겁쟁이’라는 의미로도 쓰인다는 이유로 유엔과 각국 외교부에 국명 변경을 요청했다. 한국 정부는 그 요청에 세계에서 가장 빨리 응답했다. 국립국어원은 그해 6월 터키의 한국어 명칭을 ‘튀르키예’로 변경 표기하기로 결정하고, 외교부는 각 정부 부처에 변경된 국명을 사용하도록 권고했다.
유엔도 터키 정부의 요청을 승인하고 국제기구들도 이에 따르고 있지만, 다른 국가들 중에 백년 가까이 써오던 명칭을 바꾼 나라는 한국 외에 아제르바이젠이 유일하다. 프랑스(Turquie, 튀르키), 독일(Türkei, 튀르카이), 스페인(Turquía, 투르키야), 일본(トルコ, 토루코), 중국(土耳其, 투얼치), 태국(ตุรกี, 뚜라끼) 등 모두 쓰던 이름 그대로 쓴다. 자국 언어에서는 터키 국명에 부정적인 의미가 없을 뿐더러 국민의 언어생활과 역사적 맥락에서 기존 명칭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 정부는 ‘Türkiye’를 공식 명칭으로 쓰고 있지만 언론은 여전히 ‘Turkey’라 표기한다.
국립국어원은 왜 그렇게 서둘러 표기 변경을 결정했을까. 터키 정부가 요청한다고 70년 넘게 온 국민이 쓰던 명칭을 하루아침에 바꾸다니, 자국민의 언어생활보다 (외국) 정부의 심기를 먼저 생각했다면 국립국어원으로서 자격상실이다. 터키는 6.25 참전국으로 우리에게 상당히 인지도가 높은 나라여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헷갈려 한다. 터키와 튀르키예가 같은 나라인 줄 모르는 사람도 적지 않다. ‘버마’를 ‘미얀마’라 서둘러 바꾼 것도 그렇다. 미국은 군부독재 정권이 멋대로 바꾼 국명을 인정하지 않고 여전히 ‘버마’를 쓰고 있다.
그런데 터키 ‘국호’가 튀르키예로 바뀌었다는 것도 사실은 오해다. 원래 국호는 그대로 두고 공식 영문 표기만 ‘Republic of Türkiye’로 수정 요청한 것이다. ‘Turkey’의 인접 어휘인 ‘Turkish(터키인)’ 등은 변경 요청을 하지 않았다. 터키에서는 원래 자국을 ‘튀르키예’라고 불렀으며, 국호 자체는 건국 이후 지금까지 변경된 바 없다. ‘Turkey’는 1차 세계대전 후 1923년 국가가 새롭게 탄생하면서 채택한 영문 국명으로, 공화국 건국의 아버지 무스타파 케말을 존경하듯이 많은 국민들이 자부심을 갖고 있는 명칭이다. 터키 내에서도 영문 국명을 변경하는 것에 대해 찬반 양론이 있다.
터키가 영문 국명을 바꾸게 된 데는 정치적 배경이 깔려 있다고 분석된다. 20여 년째 장기독재 중인 에르도안 대통령의 지지도가 바닥을 찍고 경제난이 심화되었던 2021년 12월에 국명 변경이 발표되었는데, 당시 물가상승률은 년 73.5%로 살인적인 수준이었다. 그동안 정치적 기반으로 민족주의와 이슬람주의에 기대어온 에르도안 정권이 국민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국명 변경을 추진했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다. 2023년 6월에 치러진 선거에서 에르도안 대통령이 3선에 성공한 것은 그 꼼수가 통한 것일 수 있다.
영어 단어 ‘Turkey’에 ‘겁쟁이’라는 뜻이 있는 건 칠면조가 겁 많은 새라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실제로 칠면조는 매우 용감하다고 한다. 원래 터키의 어원인 ‘튀르크’도 ‘용감하다’는 뜻이다. 투르크족의 용맹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바이기도 하다. 재미있는 점은 칠면조의 영어 이름 ‘Turkey’가 국가 이름 ‘터키’에서 따온 것이라는 사실이다. 신대륙에서 칠면조를 처음 본 유럽인들이 당시 터키 상인들이 팔던 관상용 새를 떠올려 지은 이름이다. 그러고 보면 에르도안 정부는 칠면조에게 자국 이름을 내준 셈이다. 터키 명칭이 바뀌었으니 칠면조 이름도 튀르키예로 바꿔야 하지 않나 하는 우스개소리도 나온다.
‘바나나’를 ‘버내너’로? ‘어륀지’의 추억
언어 규칙은 정부기관이 결정해서 하달하는 식이 아니라 언중의 언어생활을 기준으로 정해야 한다. 국립국어원은 1987년 맞춤법을 손보면서 영어 ‘baton’의 표기를 ‘바통’에서 ‘배턴’으로 바꾸었는데(바통은 영국식 발음, 배턴은 미국식 발음에 가깝다), 마땅한 번역어가 없어 오랫동안 ‘바통’으로 써오다 미국식 발음에 가깝게 표기하자는 이유로 ‘배턴’으로 바꾼 것은 국민의 언어생활을 무시한 처사다. 바나나는 ‘버내너’로, 오렌지는 ‘어륀지’로 바꾸어야 할까? 프랑스어 ‘gomme’에서 온 ‘고무’처럼 ‘바통’이나 ‘바나나’는 외국어가 아니라 외래어인 우리말로 봐야 한다. 고무도 원어 발음에 가깝게 ‘곰므’로 바꿀 것인가. 영어 낱말 태반이 프랑스어 등에서 온 외래어지만 프랑스어 발음을 따르진 않는다.
‘튀르키예’가 터키의 원어 국명 발음에 가깝다고 주장할지 모르나 원어 발음과 전혀 다른 ‘미국’, ‘영국’ 등은 그대로 쓰인다. 국제 행사나 문서에서는 ‘튀르키예’를 쓰고 그밖에는 그대로 ‘터키’를 쓰는 것도 방법이다. ‘스페인’과 ‘에스파냐’도 공식적으로 혼용되고 있고, Thailand 역시 ‘태국’과 ‘타이’가 같이 쓰인다. ‘태국’ 못지않게 오랫동안 써온 ‘터키’라는 명칭을 하루아침에 버리도록 한 것은 언어독재나 다름없다. 에르도안 독재정부의 심기를 고려한 것일 뿐 우리 국민에 대한 예의도, 터키 국민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언어철학도 정치철학도 없음을 자인한 꼴이다.
언어는 발음하기 쉽고 음절 수가 적은 쪽으로 기운다. 서반아, 불란서 같은 한자어 명칭이 스페인, 프랑스로 쉽게 바뀔 수 있었던 것은 음절 수가 같고 발음도 쉽기 때문이다. 영국, 독일을 그대로 쓰는 것은 잉글랜드나 도이칠란트보다 음절 수가 적고 발음하기도 편한 까닭이다. ‘튀르키예’는 ‘터키’보다 음절 수가 두 배인 데다 발음하기도 힘들다. 지금이라도 표기 방침을 되돌리는 것이 합리적이다. 아니면 적어도 언중을 대변하는 언론사나 출판사는 ‘터키’ 명칭을 고수해야 마땅하다. 왜 다들 국립국어원의 권고에 고분고분 따르는가.
비교적 젊은 문자에 속하는 한글은 맞춤법이 자주 바뀌는 편이다. (국립국어원은 무려 한 해 네 번, 각 분기마다 바뀐 맞춤법을 공시한다.) 띄어쓰기 규정은 특히 자주 바뀌어 편집자와 교정기자를 힘들게 만든다. 몇 해 전 국립국어원은 ‘지난겨울’ 등을 붙여 쓴다고 규칙을 바꾸었다. ‘지난’이란 접두사와 ‘겨울’이란 명사가 붙은 합성어로 간주한다는 것이다.(지난봄, 지난여름 다 붙여 쓴다. 그런데 ‘지난 세월’은 합성어로 등재가 안 되어 띄어 써야 한다.) 대하소설이나 시리즈물의 경우 앞에 나온 책에서는 ‘지난 겨울’로 표기했는데 최근 책은 ‘지난겨울’로 표기해야 하니 편집자들로서는 난감할 노릇이다.
국립국어원을 민간기구로
맞춤법은 언어의 기본 규칙이다.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는 규칙을 되도록 지킬 필요가 있다. 문제는 규칙을 정하는 주체가 우리 사회의 경우 국립국어원에 소속된 몇몇 국어학자들이라는 데 있다. 그들은 직업적으로 그 일을 하다 보니 언중의 언어 감각과 달리 학문적 논리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짜장면’이 어느 날 갑자기 ‘자장면’이 되기도 한다. 언중이 따르지 않자 결국 다시 짜장면으로 돌아가긴 했지만, 무리한 규칙 변경은 자주 일어난다. 그것이 그들의 ‘업’이기 때문일 것이다. 뭔가를 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규칙 변경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영어는 영국식과 미국식 발음이 상당히 다르지만 표준어가 없다. 영국에서도 왕립표준영어원 설립이 추진되다가 무산되었다. 미국은 표준어를 못박지 않고 뉴스나 쇼 프로에서 쓰는 말을 표준어와 비슷하게 취급한다. 일본 또한 언어에 대한 국가 권력의 통제를 경계해 “많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현실의 일본어”라는 ‘공통어’ 개념을 만들어냈다. 웬만큼 의사소통이 되는 정도로 충분하다고 보는 것이다. 국립국어원이 없다면 우리도 언론과 방송, 출판 등에서 널리 쓰이는 표현이 표준어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현재 국립국어원이 표준어를 결정하고 표준국어대사전도 편찬하고 있지만, 영어권의 경우 대학출판부가 편찬하는 사전이 공신력을 갖는다. 따라서 정권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다. 국립국어원은 문화관광부에 소속된 기관이다 보니 예산과 인사권을 쥔 정부의 영향에서 자유롭기가 힘들다. ‘국립국어원’이라는 명칭 자체에 국가주의가 스며들어 있다. 언어의 규칙을 국가기관이 좌우하는 것도 이상할 뿐더러 ‘국어’라는 일반명사를 ‘한국어’라는 고유명사처럼 쓰고 있는 것도 사실 이상한 일이다.
미국의 금융정책을 결정하는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는 국가기관이 아닌 민간기구다.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금리 등을 결정하는 데 정권의 영향이 덜 미치게 하기 위한 장치다. 언어는 국체(國體)가 바뀌어도 고유성이 지속되는 만큼 가능한 한 정권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언어 규칙은 언론과 방송, 대학과 출판 등 언어를 주로 다루는 민간기구가 언중의 언어생활을 토대로 합의해가는 것이 합리적이다. 훗날 통일이 되면 우리말은 또 한번 대격변을 겪겠지만, 80년 가까이 다른 길을 걸어온 남북한의 언어를 조정하는 작업을 국립국어원 같은 정부기구가 맡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남북한의 국어학자들로 구성된 민간기구가 만들어져야 하고, 이를 대비해서라도 국립국어원을 민간기구로 독립시킬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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