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수 제주이왁] 4.3 관련 ‘가짜뉴스’의 뿌리를 찾아서
육지 사람들에게 제주는 바다 건너 버려진 땅이었고 죄수를 보내는 유배지였다. 지금은 이익을 노려 자본이 몰려들지만 진정으로 제주를 이해하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나 또한 제주 사람 눈에는 그렇게 비칠 수 있으리라. 그런 제주인의 한과 정서를 이해하려다 제주학에 빠졌고 도민이 됐다. 키아오라리조트를 운영하면서 제주가 인문사회교양을 결합한 미디어 교육의 중심이 되게 하겠다는 각오로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한미리스쿨)을 설립했다. 이 기사는 스쿨이 개설한 심화언론인양성과정 2기 학생들과 함께 4.3평화공원과 ‘4.3 역사왜곡 미디어 모니터링 결과 보고회’에 다녀온 뒤 문헌조사와 증언구술 등을 통해 4.3 관련 ‘가짜뉴스’의 근원을 파헤친 것이다.
끈질긴 ‘역사왜곡’의 뿌리
“그럼 군이 데려간 사람들은?”
“P읍에 있는 국민학교에 한 달간 수용돼 있다가, 지금 해수욕장이 된 백사장에서 12월에 모두 총살됐어.”
“모두?”
“군경 직계가족을 제외한 모두.”
“젖먹이 아기도?”
“절멸이 목적이었으니까.”
“무엇을 절멸해?”
“빨갱이들을.”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이 제주4.3을 다룬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에 나오는 대화이다. 지난달 29일 찾아간 제주4.3평화공원의 위패봉안실에는 이름 없는 위패가 여럿 있었다. 상당수는 이름도 짓기 전, 또는 출생신고도 하기 전에 학살된 영유아들이라 누구네 몇째 아들이나 딸로 기록돼 있다.
‘빨갱이’를 절멸하겠다고 ‘젖먹이 아기’를 포함해 약 3만 명을 학살한 ‘제주4.3’은 우리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한 사건이다. 정부가 공식 사과를 하며 제주4.3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국가폭력이라는 진실이 밝혀진 지 11년이 흘렀다. 그러나 여전히 피해자와 유족들을 ‘빨갱이’로 싸잡아 부르는 이들이 있다. 이름 없는 자와 이름을 감추어야 했던 자, 그리고 오명을 뒤집어쓴 자의 고통스러운 삶들은 뒤늦게 국가로부터 위로받았지만 극우세력에 의한 가해는 멈출 줄 모른다.
지난 4월 2일 쓴 기사 ‘'‘제주4.3 대참사’ 동아일보에 책임을 묻는다’에서도 정리한 적 있지만, 제주4.3 때 일어난 학살은 중앙언론의 왜곡보도가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3.1시위와 4.3항쟁의 북한 또는 남로당 중앙당 지령설 ▲북한 또는 소련 선박 출현설 ▲오라리 방화 폭도 소행설이 대표적이다.
왜곡보도는 1948년 11월 중순 이승만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경 토벌대가 제주 주민을 대량 학살한 ‘초토화작전’으로 이어졌다. ‘북한 또는 남로당 중앙당 지령설’은 아직도 4.3 역사왜곡 유형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주류 언론이 만든 가짜뉴스의 생명력은 끈질기다.
가짜뉴스가 거대한 폭력으로 이어진 사례는 세계사에서도 드물지 않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제국주의의 면모를 드러냈다는 평을 받는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도 일부 신문의 왜곡보도 때문이었다. 미국이 경고성으로 쿠바에 보낸 메인호가 알 수 없는 이유로 폭발하자 퓰리처계와 허스트계 족벌신문들은 조사도 하기 전에 스페인 소행이라고 몰아갔다. 전쟁을 원하는 여론이 확산됐고, 매킨리 대통령은 의회의 승인을 받아 개전하고 끝내 영토를 빼앗았다.
민언련과 4.3평화재단의 왜곡보도 모니터링
희생자와 유족을 괴롭히는 가짜뉴스와 댓글은 주로 누가, 어떤 목적으로 퍼뜨리는 걸까? 지난 29일 민주언론시민연합과 제주4.3평화재단이 ‘제주4.3 역사왜곡 미디어 모니터링 결과 보고회’를 열었다.
2015년부터 5.18민주화운동 관련 보도를 모니터링해 온 민언련은 올해부터 4.3 관련 미디어 환경도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번 보고회에서는 4.3사건을 왜곡하거나 폄훼하는 미디어의 사례와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중앙지 8개, 방송·통신 10개, 경제지 9개와 제주지역 언론 4개를 포함해 총 31개 언론사를 모니터링한 결과이다.
“4.3 관련 보도 태도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입니다. 그런데 실제 사용된 단어는 굉장히 자극적이죠.”
유승현 민언련 정책위원은 언론이 객관적인 서술인 것처럼 정치인의 막말을 그대로 싣는 보도 관행을 지적했다. 그는 “이런 보도는 조회수와 관련 있는 것”이라며 언론이 혐오 표현을 방치하는 이유를 짚었다.
특히 유튜브 플랫폼에서는 조회수가 곧 수익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자극적인 표현이 빈번히 사용된다. 언론사가 운영하는 뉴스 채널은 4.3사건을 보도하면서 부적절한 단어를 사용했다. 5년 치 유튜브 콘텐츠를 모니터링한 결과, 4.3 관련 부적절 단어가 포함된 126개 영상 중 42.1%가 뉴스 채널이었다.
유 위원은 “레거시 미디어조차 아무런 의식 없이 단어를 사용한다”며 시청자를 끌어들이려고 자극적인 용어를 남발하는 언론의 역사의식에 우려를 표했다.
가짜뉴스가 뿌리내리는 우리 언론 풍토
‘클릭 장사’에 치우친 4.3 보도는 댓글창을 혐오표현과 허위정보의 장으로 방치했다. 특히 정치인의 4.3 관련 막말을 제목에 인용한 기사에 댓글이 많이 달렸다. 김수정 민언련 공동대표는 ‘4.3 관련 3년간 언론보도 및 댓글 분석 결과’를 발표하면서 댓글로 드러난 제주4.3 사건 관련 왜곡 허위정보 유형을 다섯 가지로 분류했다.
① 남로당 중앙 지시설 ② 4.3 공산 폭동 ③ 진상 규명과 보상 왜곡 ④ 북한 및 반공주의 ⑤ 지역주의와 차별이다. 김 대표의 분석에 따르면 기사 댓글 가운데 ‘4.3 공산 폭동’ 이 전체 댓글의 54.2%, ‘남로당 중앙 지시’가 22.2%를 차지했다. 그가 댓글들을 PPT에 띄우자 청중석에서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① 남로당 중앙 지시설 / “4.3이 김일성 지시로 시작됐음은 태영호가 북에 있을 때부터 알았던 사실. 진실을 말해도 왜곡해서 믿지 못하게 선동질 하니 이게 사람인가?”
기사 / <조선일보> ‘이재명, 눈 쫙 찢어보이며 “4.3 폄훼한 사람들 얼굴에 나타난다”’ 2024.04.03
② 4.3 공산 폭동 / “솔까(솔직히 말해서) 4.3항쟁 때 죄없이 희생된 분들을 기리자는 것이지 4.3항쟁 자체는 종북무장봉기 사건 아닌가? 이걸 왜 기념해야 하지? 이건 규탄해야지…”
기사 / <JTBC> ‘이재명 “국힘, 4.3 사건 후예 정치집단…폄훼인사 공천 취소해야” 2024.04.03
③ 진상 규명과 보상 왜곡 / “진짜 민간인 희생자뿐 아니라 좌익 가짜도 구분 없이 희생자로 둔갑되어 있음. 좌우 구분 없이 제대로 된 진상규명이 필요하다.”
기사 / <KBS> ‘장난감이 폭발해 아이들이 숨졌다 [취재후]’ 2024.04.03
④ 북한 및 반공주의 / “북한군 개입했다고 안 하냐? 모지리 왜구똘들”
기사 / <YTN> ‘한 총리 “4.3 유족 위로는 국가 책무…내년 진상조사 마무리”’ 2024.04.04
⑤ 지역주의와 차별 / “정확한 팩트입니다. 제주 4.3사건은 북한 남로당 사건을 좌파 세력들이 무고하게 돌아가신 주민들 등에 업고 민주주의로 포장하는 사건입니다. 무고한 시민들을 죽인 나쁜 간첩 새끼들입니다.”
기사 / <연합뉴스> ‘김문수, “4.3은 명백한 남로당 폭동…대한민국 건국 자체 부정”’ 2024.08.26
댓글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4.3은 좌파세력이 무고한 시민을 죽인 사건이다. ② 4.3은 북한 또는 남로당 중앙당 지시로 일어났고, 4.3에 북한군이 개입했다. ③ 4.3항쟁을 일으킨 남로당의 무장봉기는 규탄대상이다.
②번과 관련해서는 2003년 발표된 정부 공식 보고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남로당 지령설의 근원을 부정하는 내용이 실렸지만, 허위보도로 시작된 ‘가짜뉴스’는 아직도 대중의 의식에 뿌리박혀 있다.
제주4.3은 명백한 국가폭력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그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제주4.3특별법이 정의한 4.3이다. 이에 따르면 4.3이 1948년 4월 3일 일어난 남로당 제주도당(좌파세력)의 무장봉기를 포함하고 있는 건 맞다. 무장대가 일부 주민을 학살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유만으로 4.3을 좌파세력이 무고한 시민을 죽인 거라고 주장하는 건 극히 부분적 진실에 불과하다. 4.3 전개과정에서 가장 많은 제주도민들이 희생된 건 이승만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경 토벌대가 주도한 ‘초토화작전’ 때문이었다.
<제주4.3사건 진상보고서>는 초토화작전의 책임이 당시 이승만 정부와 주한미군사고문단에 있다고 밝혔다. 이승만은 대통령으로서 군통수권자이며, 미군은 당시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갖고 있었다. 이는 1949년 1월 21일 이승만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에도 잘 나와 있다. 그는 미국의 적극적인 원조를 위해서 ‘제주도 사건’ 연루자를 ‘악당’으로 규정하고,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라고 했다.
“미국 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나 제주도, 전남 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색원하여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며, (...)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
1948년 11월 중순부터 토벌대는 초토화작전을 펼쳐 중간산 마을 가옥을 모두 불 지르며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주민을 학살했다. <제주4.3사건 추가진상보고서>에 따르면 4.3에서 15세 이하 어린이 1087명이 희생됐고, 이중에서 약 76%인 826명이 1948년 11월부터 1949년 2월까지 학살됐다. 60세 이상 희생자 1002명 중에서도 이 기간에 76.6%가 희생됐다.
초토화작전에 관해서는 <4.3은 말한다> 4권과 5권에 마을별로 잘 묘사돼 있다. 11월 13일 새벽 2시, 토벌대에 의해 어린 아들을 잃은 조천면 교래리 출신 양복천 할머니는 당시 상황에 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무조건 살려달라고 빌었지요. 그 순간 총알이 내 옆구리를 뚫었습니다. (...) 그러자 군인들은 아들을 향해 또 한 발을 쏘았습니다. (...) 아들은 가슴을 정통으로 맞아 심장이 다 나왔어요. (...) 등에서 아기를 내려보니 담요가 너덜너덜하고 딸의 왼쪽 무릎이 뻥 뚫려 있었습니다.”
인근 마을에서 토벌대는 또 학살극을 벌였고, 남은 주민을 대상으로 해변마을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이곳에서 토벌대는 이른바 ‘자수사건’을 벌인다. 토벌대는 “털끝만큼이라도 가책이 되는 점이 있으면 자수하라”며 “자수하면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중간산에서 살면서 ‘식량을 제공하라’ ‘집회에 참석하라’는 무장대의 요구를 피할 수 없었던 주민들은 자수 아닌 자수를 했다. 하지만 약속과는 다르게 토벌대는 이들 중 150명을 버스에 태우고 냇가에 끌고 가 학살했다.
1960년 국회조사단에 제출된 양민학살 진상규명 신고서에는 실제 사망자 숫자 10%에도 훨씬 못 미치는 1917명의 사망자 명단이 실려 있다. 이름과 사망일자(행방불명자의 경우 잡혀간 날) 옆에는 군경이 주도한 토벌대가 죽였는지, 남로당 제주도당이 꾸린 무장대가 죽였는지 적혀 있다. 1917명 가운데 무장대 혹은 미상이 죽인 제주도민은 12명이었다. <제주4.3사건 추가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총 사망자 9688명 중 토벌대에 의해 78.7%(7624), 무장대에 의해 15.7%(1528)가 사망했다.
토벌대보다 적게 사람을 죽였다고 무장대에게 면죄부가 주어진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4.3을 남로당의 무장봉기에만 주목해서 해석한다면, 국가가 주도해 제주도민 약 3만 명을 학살한 사실이 가려진다는 점을 지적하는 거다.
이런 민간인 학살에는 뚜렷한 이유도 없었다. 신고자가 밝힌 사망 경위는 ‘소개 중 본적지가 산간마을이라는 이유로 총살’ ‘보초근무 중 근무태만이라며 무조건 학살’ ‘만취한 경찰이 몇몇 집을 방화하다 총살’ '발음이 좋지 않아 우물거리자 끌고가 학살’ ‘아들이 피신했다고 어머니를 수감해 총살’ 등이었다. 모두 어처구니없는 이유다.
‘빨갱이’를 처단한다는 명분으로 벌어진 초토화작전이었지만, 명분의 정당성을 떠나서, 명분조차 지키지 못한 무차별 주민학살이 이승만 정권과 미군이 함께 주도한 국가폭력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중앙당 지시설’로 숨기려 한 것
1947년 3.1 발포 사건 이후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은 군정청 출입기자단 회견에서 군중들이 “북조선의 세력과 통모했다”고 단정했다. 언론이 이를 퍼 나르자 한반도에 ‘좌익세력은 북조선의 사주를 받은 적색분자’라는 논리가 자리 잡았다.
<4.3은 말한다> 1권은 ‘조병옥 경무부장이 무슨 근거로 ‘4.3’도 발생하기 훨씬 이전인 그 시점에서 이 같은 북조선 연계설을 규정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며 북한 연계설에 의문을 제기했다. 4.3 발발 직후인 1948년 4월 20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서도 제주도 사건은 언급되지 않았다.
남로당 지하총책을 지낸 박갑동씨가 "남로당 중앙당의 폭동지령에 의해 4.3사건이 발생했다"고 주장한 것은 '남로당 중앙 지시설'에 힘을 실었다. 그의 발언은 1973년 <중앙일보> 연재기사에서 처음 다뤄졌다. 그러나 <4.3은 말한다> 2권은 박갑동씨와 한 인터뷰 전문을 실으며 그의 증언은 사실과 다르게 서술됐다고 밝힌다.
“신문사에서 연재할 때 외부에서 개입해 고쳐 쓴 겁니다.”
박씨는 일본 도쿄까지 찾아간 <제민일보> 김종민 기자와 인터뷰하면서 문제가 된 내용은 "신문에 연재할 때 다 수정된 것"이라며 "기관에서 간섭이 이뤄졌다"고 말했다. 자기 의도와 다르게 증언이 서술됐다고 시인한 것이다.
4.3은 제주도당의 독자적인 판단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이 추후 학자들의 연구로 밝혀졌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는 학자들의 연구 성과들을 실었다. 세계 최초로 4.3 연구 논문을 발표한 존 메릴 박사는 1990년 <제민일보> 인터뷰에서 연구 결과 “중앙당의 지령이 없었다”는 점을 명백히 밝혔다. 그는 주한미군과 국무부 정보조사국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데, 이 논문으로 하버드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김점곤 교수는 저서 <한국전쟁과 노동당전략>에서 섬으로 격리된 제주도에서 북상을 시도할 물리적 능력이나 정치적 여건이 중앙당에 없었다는 점 등을 들며 지령설에 의문을 제기했다.
‘북한함’ ‘소련함’은 유령선이었나?
외부 지령설이 거짓으로 밝혀졌는데도 무장대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가짜뉴스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북한군 유입설’은 1948년 5월 6일 미군정장관인 딘 소장이 “북조선 군인이 무전으로 지도하고 있다”고 발언함으로써 시작됐다. 제주도에 주둔했던 최경록 제11연대장 등의 증언으로 낭설임이 밝혀지지만, 여론은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거짓 소문에 크게 휘둘렸다.
풍문은 ‘북한 선박 출현설’이나 ‘소련 잠수함 출현설’로 이어졌다. 1948년 10월에 터져 나온 ‘괴선박 출현설’은 미군의 보고로 시작됐다. 미6사단 정보보고서가 잠수함의 국적을 확인하지 못했다면서도 '붉은 바탕에 별 하나가 그려진 깃발'을 언급하자 중앙언론은 10월 8일 일제히 제주 해상에 잠수함이 출몰했다고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붉은 바탕에 별 하나가 그려진 깃발'이라는 사실마저 '인민공화국기'로 수정해 보도했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괴선박 출현설은 여러 번 반복됐는데, 특히 4.3 전개과정의 중요한 고비가 되는 시점마다 터져 나왔다. 같은 해 8월 17일 미군은 스스로 신뢰도가 낮은 정보라 밝히면서도 ‘소련 선박이 출현해 경비선에 기관총을 발사했다’고 보고했다. 며칠 후 제주비상경비사령부는 괴선박이 출현했다는 이유를 들며 ‘최대의 토벌전’을 예고했다.
제주 해안에서 북한 또는 소련의 선박은 확인된 적 없지만 미군 구축함은 볼 수 있었다. 5.10 선거가 무산되자 미군정은 제주 근해에 함정을 급파했다. 구축함 ‘크레이그’는 일주일 이상 정찰 활동을 벌였고 초토화작전 때도 미군 함정들이 해안봉쇄를 했다.
괴선박 출현설은 초토화작전이 끝난 1949년 4월에 가서야 근거 없는 사실로 밝혀진다. 미군이 4월 1일 괴선박 출현설을 정정한다고 보고한 것이다.
‘일부에서는 게릴라들이 본토로부터 또는 북한으로부터 병참지원을 받고 있다는 소문이 있으나 이러한 보고를 증명할 아무런 증거가 없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초토화작전이 마무리되자 미군이 ‘더 이상의 괴선박 출현설은 불필요하다고 판단한 듯하다’고 추측했다. 메릴 박사도 <제민일보> 인터뷰에서 "4.3 발발의 남로당 지령설은 물론 소련 잠수함 출현설도 근거가 없다"고 단언했다.
4.3은 왜 그토록 잔혹하게 진행됐을까?
남로당의 무장봉기가 규탄 대상인지 여부는 역사의 맥락과 가치 판단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한반도를 반공의 보루로 삼고 제주도에 본때를 보이고자 한 미군정과 정부의 방침과 가혹한 탄압이 극렬한 대립과 참극의 요인이었던 점은 분명해 보인다.
1947년 3.1발포사건, 3.10민관합동 총파업이 연달아 일어나고, 제주도를 지배하던 미군정의 실정에 항의가 빗발치자, 육지에서 조사단이 왔다. 조병옥 경무부장과 극우청년단체인 서북청년회 단원도 제주에 들어와 경찰, 행정기관, 교육기관 등을 장악해, 빨갱이 사냥을 한다는 구실로 테러를 일삼았다. 군경의 대대적인 검거와 고문도 1년 내내 계속됐다.
그러던 중 1948년 3월, 경찰에 연행된 청년 3명이 고문치사로 잇따라 사망하며 제주도민의 분노가 폭발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제주도당이 내건 슬로건은 경찰과 서청의 탄압 중지, 남한의 단독선거 단독정부 반대, 통일정부 수립 촉구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실현됐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요구들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4.3 발발 당시 제주도를 시찰했던 군정관리들조차 이 사건의 원인으로 관공리의 부패와 경찰의 가혹행위, 서청의 만행도 지적했다는 것이다. 미군정 검찰총장 이인은 시정방침에 신축성이 없었고 관공리들이 부패한 것이 제주도 사태를 악화시켰다면서 “고름이 제대로 든 것을 좌익계열에서 바늘로 터뜨린 것이 제주도 사태의 진상”이라고 규정했다.
4.3 발발 이후 9연대와 무장대 지휘부 간에 어렵게 맺어진 평화협상합의마저 ‘오라리 방화사건’이 일어난 뒤, 미군정이 9연대를 포함한 경비대에 총공격을 명령하면서 깨졌다. 김익렬 9연대장은 현장조사를 벌여 서청, 대청 등 우익청년단체가 방화를 했다고 미군정에 보고했지만, 미군정은 이 보고를 묵살하고 ‘폭도들이 자행했다’는 경찰 보고를 선택했다.
이 가운데 <동아일보>도 오라리 방화를 폭도의 소행으로 단정했다. 제주에 파견돼 연재기사를 쓴 정준수 기자는 5월 1일 노동자의 날에 제주도에서는 노동자, 농민의 집을 불살라버리고 노동자를 학살했다고 보도했다. 평화협상합의가 맺어진 상황에서, 언론의 허위보도와 미군정의 오판은 끝내 대학살극인 ‘초토화작전’으로 이어졌다.
무장대에 관해 부풀려지고 왜곡된 것들이 많다. 토벌대는 강경작전을 합리화하기 위해 무장대 숫자를 과장했고, “무장대는 남한 각지에서 모집한 백정” “중국 팔로군 출신”이라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딘 군정장관은 “무장대는 북한 공산군”이라고 언론에 왜곡 발언하는 등 여론을 어지럽혔다. 사실, 무장대의 초기 병력은 350명이었고, 전 기간 통틀어 500명 선을 넘지 못했다. 4.3봉기 당시 무기는 일제 99식 총 27정, 권총 3정, 수류탄 25발이고 나머지는 죽창이었다. 미군 장비로 무장한 토벌대에 견줄 수도 없는 전력이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과 무장대에 관한 정확한 이해 없이, 이들의 정치 성향이 좌익이니 규탄 대상이라는 논리는 당시 소련과 힘겨루기를 해야 했던 미국의 ‘반공논리’를 비판의식 없이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트루먼 독트린을 천명한 미국은 패권국 지위를 유지하려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악으로 규정했다.
김익렬 9연대장의 회고에 따르면, 1948년 4월 UN 무대에서 소련이 제주4.3 문제를 비유하며 미군정의 실정을 질책하는 목소리를 높이자 미국 정부는 발끈해 한국에 파견된 군정장관 딘을 문책하고 조속한 진압을 명령했다. 미국은 소련의 선전공세를 막기 위한 방책으로 4.3을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에 의한 반란’으로 규정하라는 지시를 했다. 김익렬의 유고집은 4.3의 본질을 왜곡하고 그 성격을 ‘공산폭동’으로 규정하는 이면에 미국의 전략적인 입김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중앙지와 지역지의 차이
민언련 모니터링 결과, 여전히 언론 댓글에서는 폭동, 북한, 빨갱이와 같은 단어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제주의소리>를 비롯한 제주지역 매체는 댓글의 양상이 중앙언론과 달랐다. 단어빈도분석 상위에 빠짐없이 폭동, 남로당, 북한, 빨갱이 등이 들어간 중앙언론과 달리 지역매체에는 폭동을 제외하고는 모욕적인 단어가 상위에 올라와 있지 않았다. 김 대표는 이런 현상이 앞서 짚은 중앙지와 지역지의 다른 보도 양상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했다.
“중앙지는 대개 특정한 시기와 특정한 의제에 한해서만 제주4.3을 조명합니다. 4월에 관련 기획보도를 하거나, 정부의 보상 정책, 정치인의 발언을 싣는 식이죠. 꾸준히 관심을 쏟지 않습니다. 반면 지역지는 4.3이 중요한 지역사회 현안인 만큼, 새로운 유골 발굴, 유족에 대한 보상, 4.3 역사왜곡 현수막 등을 꾸준히 보도해요. 중앙지와 지역지의 의제 설정 방향에 차이가 있는 거죠. 지역지가 필요한 이유예요.”
실제로 중앙언론과 지역언론의 기사량에는 차이가 있었다. 올해 제주지역지는 월마다 비교적 균등하게 제주4.3 관련 기사를 내보냈지만, 중앙언론은 4월과 10월에 유독 기사량이 많았다. 4월은 제주4.3이 일어난 때이고, 10월은 <작별하지 않는다>를 쓴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발표된 것 때문이다. 토론에 참여한 김익태 KBS제주 기자도 “낯선 게 좋은 것”이라며 다른 지역 사람들도 제주4.3을 포함한 역사를 공유하는 창구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표현의 자유’ 고통을 유족이 감당하라고?
4.3은 긴 세월 철저히 은폐됐다. 국민이 제주도민을 위로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민주화 이후에도 4.3사건은 민중항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국가의 4.3사건 관련자 탄압은 계속되었다. 1987년 이산하 시인은 4.3을 다룬 장편서사시 <한라산>을 발표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받았다. '폭도'와 '빨갱이'라는 낙인에서 벗어나지 못한 희생자와 유족들은 연좌제를 우려해 피해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1992년 제주도 다랑쉬굴에서 11구 유해가 발견되면서 4.3사건의 참상이 전국에 드러나는 듯했지만, 희생자의 시신은 한 유족의 말처럼 ‘콩 볶듯이 해치워졌다’.
미흡하나마 김대중 정부 이후 4.3 진상 규명이 시작됐다. 55년 만인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4.3사건과 관련해 사과하고, 2005년에는 국가 차원에서 공식 사과가 이뤄졌다. 그러나 여전히 피해자들은 국가 폭력의 상흔을 홀로 감내하고 있다. 기사와 댓글에서 치욕스러운 고통을 다시금 마주한다. 과연 4.3이 끝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
“폭도라는 말은 70년 전의 그 기억이 고스란히 오는 거거든요. 언론이나 유튜브에서 말하는 게 우리한테 폭력이 된다는 걸 현대 사람들은 모르세요.”
4.3유족회 외무부회장을 맡고 있는 양성주씨는 보고회에 참석해 그간 느꼈던 설움을 토로했다. 그는 “표현의 자유를 유족들한테 감당하라고 하는 건 가슴이 아프다”며 “혐오 표현 하나로 희생자의 상처가 곪는다”고 말했다. 언론 보도와 댓글에 사용된 몇 마디가 희생자와 유족이 어렵게 지켜온 4.3의 진실을 훼손하고 있는 것이다.
4.3을 왜곡하는 보도에 대응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마지막 발제자로 나선 이용성 민언련 정책자문위원장은 4.3 역사왜곡이 반복되는 원인을 분석했다. 그는 역사왜곡의 배경에 사회적 갈등이 얽혀 있다고 지적했다. 진상조사보고서는 4.3특별법에서 규정하는 허위 사실을 판단하는 기준이다. 그는 4.3특별법 제정을 두고 “여야가 입장을 절충하는 과정에서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며 법과 진상조사보고서의 간극을 해결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고은경 4.3평화재단 연구원은 혐오 표현이 죄의식 없이 남발되는 사회에 아쉬움을 표했다. 언어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과거 4.3을 '폭동'과 '빨갱이'로 내몬 언론의 가짜뉴스는 국가 폭력을 합리화했고, 희생자를 침묵 속에 가두었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창구는 많아졌지만, 여전히 '폭동'과 '빨갱이' 낙인은 끊임없이 재생산돼 피해자의 입을 틀어막는다.
역사가 소비의 도구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클릭 장사와 받아쓰기 관행에 익숙한 우리 언론은 진실을 왜곡한다. 독자와 광고주가 호응하면 진실은 뒷전으로 밀린다. 최근 우크라이나발 가짜뉴스에 놀아난 언론이 많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지역을 공격해 북한군 500명이 숨졌다고 보도하자, 우리 언론은 사실 검증 없이 일제히 받아쓰기에 나섰다.
미셸 푸코에 따르면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배제할지 결정하는 건 지식체계다. 지식체계가 누적될수록 배제는 점점 쌓인다. 이 과정에서 동일자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만, 타자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진다. 동일자는 드러나 있어 알기 쉽지만, 배제된 타자는 숨겨져 눈에 띄지 않는다. 동일자 중심의 역사가 반쪽에 불과한 이유다. 총체적으로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침묵한 타자의 목소리를 드러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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