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수 제주이왁] 박진경 처단한 문상길-손선호 처형 77주기
육지 사람들에게 제주는 바다 건너 버려진 땅이었고 죄수를 보내는 유배지였다. 지금은 이익을 노려 자본이 몰려들지만 진정으로 제주를 이해하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나 또한 제주 사람 눈에는 그렇게 비칠 수 있으리라. 그런 제주인의 한과 정서를 이해하려다 제주학에 빠졌고 도민이 됐다. 키아오라리조트에 이어 배롱서원을 운영하면서 제주가 미디어와 인문학 교육의 중심이 되게 하겠다는 각오로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한미리스쿨)을 설립했다. ‘이봉수 제주 이왁'은 제주민과 나의 일상에 인문학과 세상 ‘이야기’(제주어로는 ‘이왁’)를 덧실어 보내는 글이다.
언론이 블라인드 처리한 문상길의 마지막 말은?
‘1948년 9월 23일 하오 3시 35분 동 45분, 水色(수색)동방 5리 지점 이름없는 붉은 산기슭에 터져나온 10발의 총탄은 두 젊은 생명을 빼앗아 가고야 말았다.’
‘두 젊은 생명’은 육군 11연대 중위 문상길(23), 하사 손선호(22). ‘이름 없는 붉은 산기슭’은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에 있는 야산으로 추정될 뿐 정확한 처형장소와 매장장소는 아무도 모른다. 문상길은 사형집행장교가 총살형 집행장을 낭독하고 유언 기회를 주자 단연코 말한다.
“스물세살을 최후로 문상길은 갑니다. 여러분은 조선의 군대입니다. 마지막 바라건대 ×××의 ××아래 ×××의 ××아래 ××를 하는 조선군대가 되지 말기를 바라며 갑니다.”
진실을 보도하려는 의로운 기자도 있었지만…
<조선통신>에 소속돼 이 ‘총살형 목격기’를 쓴 기자는 조덕송. 그와는 조금 안면이 있었다. 1984년 그가 <조선일보> 논설위원일 때 초짜기자인 나는 비서실에 파견돼 있었는데 논설위원실 문이 열려 있으면 위원들의 토론 내용까지 들렸다. 당시 선우휘 주필이 강경보수였던 반면 조덕송 위원은 중도 성향 발언을 하곤 했다.
<조선일보>는 수구화 노선을 걸어왔지만 해방 직후에는 그런 신문이 아니었다. 2021년 제주도민이 된 이래 제주4.3 관련 문헌을 집중 공부해보니 조덕송이야말로 4.3을 객관적으로 보도하려 노력한 당시에는 보기 드문 기자였다. 월간잡지 <신천지> 등에 기고한 조덕송의 글을 보면 학살을 피해 어쩔 수 없이 입산한 자들의 운명에 동정적인 시선도 보내고 있다.
문상길∙손선호 처형 당시 <조선통신>에서 데스크를 보면서 거슬리는 표현을 지웠는지 몰라도 X표로 지운 유언의 내용이 궁금했다. <한겨레> 창간에 참여한 뒤에도 언젠가 만나게 되면 그걸 묻고 싶었는데 그는 2000년 작고했다. 직장을 옮기고 나면 존경하거나 사이가 좋던 이들까지 다시 만나기 힘들어지는 게 인생사인 것 같다. 궁금증은 제주에 온 뒤 당시 <평화신문>을 찾아보고 풀렸다.
‘마지막으로 바라건대 미국인의 지배 아래 미 군대의 지휘 아래 민족을 학살하는 조선 군대가 되지 말기를 바라며 문상길은 갑니다.”
조덕송은 실제로 제주4.3 관련 총살 집행 과정을 동정적으로 보도했다가 체포 대상에 올랐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그는 좌파단체인 문학가동맹에 가입했다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한번은 논설위원들 술자리 말석에 끼인 적이 있었는데 대취한 그가 빨치산의 노래 같은 걸 부르기에 ‘저런 노래가 있었나’ 하고 놀랐다. 15년쯤 뒤 화제가 된 ‘부용산’이란 노래였다.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 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전시작전권도 없는데 주권국가라 할 수 있나
친일파가 창군의 주역이 된 우리 군대는 문상길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제주에서 제노사이드급 학살을 자행한 이래 육지 곳곳에서도 동족을 학살한 흑역사가 있다. 전시작전권도 이승만이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넘긴 이래 아직 되찾지 못하고 있으니 주권국가라 하기에도 부끄러운 게 현실이다.
대좌 출신이면서 나중에 초대 육군참모총장이 되는 이응준이 재판장으로 좌정한 군사법정의 최후진술에서 손선호 하사는 이렇게 말했다.
“박 대령의 30만 도민에 대한 무자비한 작전 공격은 전 연대장 김 중령의 선무작전에 비하여 볼 때 그의 작전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그릇된 결과로 다음과 같은 사태가 벌어졌다. 우리가 화북이란 부락에 갔을 때 15세가량 되는 아이가 그의 아버지의 시체를 껴안고 있는 것을 보고 무조건 살해하였다. 또 5월 1일 오라리란 부락에 출동하였을 때 수많은 남녀노소의 시체를 보았을 뿐인데 이들은 자세한 조사의 결과 경찰의 비행임을 알게 되었다. (중략) 박 대령을 암살하고 퇴장할 기회도 있었으나 30만 도민을 위한 일이므로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나의 생명이 30만 도민을 위한 것이며 민족을 위한 것인만큼 달게 처벌을 받겠다.”
군인들이 증오했던 박진경, 존경했던 김익렬
여기서 박 대령은 9연대장 박진경, 김 중령은 전임 연대장 김익렬을 말한다. 미군정이 11연대로 개편된 9연대 장병을 대상으로 무기명 여론조사를 한 결과 대부분은 존경하는 군인으로 김익렬 전 연대장, 증오하는 군인으로 박진경 대령을 꼽았다. 그들은 어떤 태도로 토벌대를 지휘했기에 처형당한 이들까지 존경하고 증오하는 대상이 됐을까?
김익렬은 4.3 봉기가 경찰의 무모한 탄압에서 비롯했다고 보고 일관되게 ‘선 선무 후 토벌’을 주장한 인물이다. 그는 유격대장 김달삼과 평화협상을 벌여 합의안을 도출했다. 그러나 경찰과 우익 청년단원들은 협상을 무산시키기 위해 ‘오라리 방화사건’을 일으킨 뒤 유격대의 약속 위반으로 덮어씌웠다.
4.3사건 한 달 뒤 제주에서 군정장관 딘도 참석한 가운데 열린 5월 5일 최고수뇌회의에서 김익렬과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이 충돌했다. 조병옥은 경찰의 만행이 이슈화할까 두려워 “김익렬의 아버지가 공산주의자였고 김익렬이 김달삼과 일본 육군예비사관학교 동기이며 국제공산당원”이라고 허위조작정보를 늘어놓다가 주먹다짐까지 오갔다.
사실 김익렬-김달삼 협상은 제주 미군정장관 맨스필드 중령의 교섭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김학규 동작역사문화연구소장이 쓴 <현충원 역사산책>에 따르면 김익렬은 당시 제주도지사 유해진, 경찰토벌사령관 김정호, 제주경찰감찰청장, 민족청년단장 등 넷이 회피하는 바람에 선택된 다섯 번째 지명자였다고 한다.
<제민일보>의 6권짜리 역작 <4.3은 말한다> 제3권과 김익렬 유고집 <4.3의 진실>에 따르면, 경무부장 조병옥은 딘 장군에게 “박진경 대령 암살지령자는 김익렬”이라고 무고했다.
‘오라리 방화 폭도 소행설’은 수구언론의 합작품
‘오라리 방화 폭도 소행설’은 군경과 수구언론의 합작품이기도 했다. 미 24군단 주간정보보고서에 극우신문으로 분류된 <동아일보>는 제주에 정준수 특파원을 보내 5월 7일부터 사흘간 ‘제주도폭동 현지답사’를 연재하며 오라리 방화를 폭도의 소행으로 단정했다. 그는 5월 1일 노동자의 날에 제주도에서는 노동자·농민의 집을 불살라버리고 노동자를 학살했다고 보도한다.
기이한 점은 오라리 방화사건 현장을 미군 촬영반이 공중과 지상에서 입체적으로 촬영한 사실이다. ‘제주도의 메이데이’(May Day on Cheju-do)란 제목이 붙여진 이 기록영화는 오라리 방화가 폭도에 의해 자행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폭도에 의한 기습방화’인데도 입체 촬영이 가능했다면 우연에 우연이 겹친 덕분일까? 의구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잘못 입력된 정보에 격앙된 미군정 지도부는 5.10 남한 단독선거가 다가오자 강경진압 방침을 굳힌다. 박진경이 암살되자 그를 총애하던 딘 민정장관은 격노했고, 수색 처형 현장에 간 군사고문단 하우스만 대위는 총살된 문상길∙손선호의 시신에 권총을 난사하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수뇌회의 다음 날 김익렬은 전격 해임됐고 초강경론자 박진경이 취임했다. 일제 말기 일본군 장교로 제주에 주둔한 적도 있어 지형과 일본군 진지를 잘 아는 그는 취임사에서 “우리나라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는 폭탄발언을 한다.
그가 강경진압에 나선 결과 통위부 발표에 따르면 5월 27일까지 포로와 귀순자 3126명을 잡고 8명을 총살했다. 그러나 노획물은 고작 일제 99식 총 3정 수류탄 15개, 죽창 12개 등이었으니 대부분 무장하지 않은 양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작전은 더 많은 주민들이 살아남기 위해 입산함으로써 사태 악화로 이어졌다. 그의 뒤를 이어 임명된 11연대장 등 군과 경찰 간부도 일본군 출신이 너무나 많아 공동체의식과 민족의식이 강한 제주도민의 저항감을 부추겼다.
최종 책임은 미군정과 이승만으로 귀결
최종 책임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로 귀결된다. 초강경진압을 명령하고 법에도 없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친일파들을 군경 지도부로 발탁한 장본인이 그들이기 때문이다.
이념을 떠나 인도주의라는 견지에서 보면 문상길∙손선호 등은 자신이 희생됨으로써 수많은 양민의 목숨을 살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시신조차 어디에 버려졌는지 알 수 없는 대접을 받았고, 일본군이나 일본경찰 출신 간부들은 상당수가 반공을 핑계로 신분 세탁 성공해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이적행위자들이 묻힌 국립묘지가 세상 어디에 있을까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중 12명이 장군묘역과 국가유공자묘역에 안장돼 있고, <친일인명사전> 등재 기준으로는 그 숫자가 74명에 이른다.
12.3 반란이 시민과 일부 군인들에 의해 진압된 뒤 4.3, 5.18 등을 다룬 한강 소설 등을 통해 죽은 사람들이 산 사람을 살렸다고 했는데 나는 반쯤 동의하고 반쯤 동의하지 않는다. 친일파를 제대로 단죄한 적이 없고 4.3과 5.18의 가해자들도 제대로 단죄하지 못했다. 그들이 더 떵떵거리며 부귀영화를 누리고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참담한 현실에서 역사를 통해 배우는 것은 기회주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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