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수 제주이왁] 어떤 영화제보다 울림이 큰 4.3영화제
육지 사람들에게 제주는 바다 건너 버려진 땅이었고 죄수를 보내는 유배지였다. 지금은 이익을 노려 자본이 몰려들지만 진정으로 제주를 이해하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나 또한 제주 사람 눈에는 그렇게 비칠 수 있으리라. 그런 제주인의 한과 정서를 이해하려다 제주학에 빠졌고 도민이 됐다. 키아오라리조트를 운영하면서 제주가 인문사회교양을 결합한 미디어 교육의 중심이 되게 하겠다는 각오로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한미리스쿨)을 설립했다. 이 기사는 스쿨이 개설한 심화언론인양성과정 2기 학생들과 함께 제주4.3영화제를 보고 기사 담당자가 제출한 영화기사 쓰기 과제를 데스크 본 것이다. 기사를 쓴 장다해와 전유정은 지난달 30일 기숙학교인 한미리스쿨 심화과정에 입소했다.
침묵으로 소리친 개막작 ‘목소리들’
“트라우마는 언어로, 정갈한 문장으로 다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영화나 다큐멘터리는 카메라라는 무기가 있습니다.”
개막작 <목소리들>을 연출한 지혜원 감독은 언어로 다 담아낼 수 없는 고통과 상실을 영상으로 풀어내는 영화의 힘을 일깨운다. 화면 속 피해자들의 공허한 눈빛과 긴 침묵은 말보다 더 큰 울림으로 관객들에게 다가온다. 제2회 제주4.3영화제는 11월 21부터 24일까지 제주시 연동 롯데시네마에서 열렸다. 그중 사흘은 서귀포시 성산읍에서 1시간 넘게 달려 하루에 영화 서너 편을 관람한 뒤 매일 밤 10시가 넘어 집에 도착할 때까지 먹먹한 마음으로 감상을 공유했다.
“다큐멘터리를 왜 하느냐? 현실의 문제를 잘 모르던 사람들하고 대화를 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보이지 않은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 다큐멘터리의 힘이거든요.”
<목소리들> 제작을 총괄한 김옥영 프로듀서의 말처럼, 4.3영화제는 잊힐 위기에 처한 고통과 역사의 비극을 되살리며, 피해자들과 관객이 대화를 나누는 공간을 마련했다. ‘틈새에서 솟아오른 빛’ 이란 주제로 29편의 영화가 소개됐다.
다양한 형태의 국가 폭력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영화들이 대거 등장했다. 국가폭력과 제국주의 폭력, 전쟁이 가져온 폭력은 어떻게 개인을, 가족을, 사회를 파괴하는가? 안혜경 영화제집행위원장은 “세계 도처에서 4.3과 같은 폭력과 억압의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는데, 우리는 왜 폭력의 고리를 끊지 못하는지 탐구하고자 했다”며 기획 의도를 밝혔다.
침묵이 그들의 기억 방식이다
“4.3 영화제가 피해자들에게 치유의 기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김은순씨 아들 정인창씨는 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해 북받치는 울음을 삼키며 말을 이어갔다. 가족들은 피해자들의 고통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지켜보며 함께 짊어져야 했고, 이번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보이지 않는 지원군 역할을 해왔다.
개막작 <목소리들>은 4.3을 견뎌낸 여성들 이야기를 통해 ‘부조리한 폭력에 저항한 자존의 빛’ 이라는 이번 영화제의 핵심 주제를 전한다. 여성들이 그날을 기억하는 방식은 침묵이다. 공포와 수치심, 그리고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는 이들을 침묵하게 했고, 긴 시간이 지나서야 고정자, 김용열, 김은순, 홍순공 네 할머니는 카메라 앞에 설 수 있었다. 말할 수 없으니 가슴에 고스란히 담아두었던 기억들이다.
이들의 고통은 국가폭력의 피해 범주에서도 제외됐다. 4.3특별법은 피해자를 사망자, 행방불명자, 후유장애자, 수형자로 제한한다. 개막식에 참석한 조정희 4.3연구자는 “여성의 피해와 고통, 트라우마는 어떤 범주에 넣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가폭력의 무게를 온전히 개인이 짊어지게 하는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강요된 침묵은 피해자들을 트라우마 속에 가뒀다. 두렵고 창피하고 들어주지 않아서 말할 기회조차 빼앗긴 여성 피해자들에게 트라우마는 고스란히 내면에 축적됐다. 심리학에서 말하기를 통한 ‘감정 처리’는 고통을 내보내고 무게를 덜어내는 과정으로, 기억의 생생함을 약화하며 치유로 나아가게 한다. 그러나 여성들에게는 그마저 허락되지 않았다. <목소리들>은 이 침묵을 화면으로 풀어내며 관객들에게 묻는다. 우리는 이들의 목소리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죽어서도 자유롭지 못한 피해자들
1992년 4월 2일, 제주도 동쪽 다랑쉬굴에서 발견된 11구 유해는 4.3 사건의 끔찍한 현실을 드러내며 큰 충격을 줬다. 4.3사건의 현장이 처음으로 세상에 생생하게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하지만 유족들에게는 장례를 치르고 봉분을 세울 권리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희생자들 시신은 화장된 뒤 바다에 뿌려졌고, 유족들의 절박한 요청은 철저히 외면당했다. 한 유족은 “콩 볶듯이 해치웠다”며 “내 뜻대로 된 게 없다”고 절규했다.
왜 그들은 죽은 가족의 장례조차 마음대로 치를 수 없었을까? 이를 이해하려면 당시 정치사회적 맥락을 살펴봐야 한다. 1992년 대선을 앞둔 노태우 정권은 공안정국을 형성하며 정권 재창출을 도모했다. 당국은 4.3사건 진상 규명이 궤도에 오르면 정권에 불리한 여론이 형성될 것을 우려했다. 유해를 서둘러 처리하며 유족들의 요구를 묵살했다. 제주 경찰청 보고서에는 그런 의도가 드러난다.
‘4.3연구소에서는 본 유골 발견사실을, 4.3 사건을 민중항쟁으로 미화하는 증거자료로 계속 악용할 우려가 있으며, 당시 목격자 및 체험자들의 증언 등에 의해 유골들은 재산공비가 틀림없음에도 군경의 과잉진압으로 희생된 양민들이라고 계속 주장할 것임.’
26일 아침 학생들과 함께 답사한 다랑쉬굴에서는 하도리와 종달리 주민 11명이 피신해 살다가 발각되자 집단희생을 당했다. 토벌대는 수류탄을 굴속에 던지며 나올 것을 종용했으나 나오면 죽을 것을 두려워한 주민들이 응하지 않자 불을 피우고 입구를 봉쇄해 전원 질식사했다.
폭력과 상처는 대물림된다
개인은 국가권력이 행하는 폭력에 엄청난 무력감을 느낀다. 최근 형제복지원 피해자가 자살을 시도했다. 국가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승소했지만 상고할까 봐 두려워서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않고 공격해야 할 ‘적’으로 상정한 역사는 뿌리깊다. 이번 제주4.3영화제에서 상영된 다큐멘터리 <사슬>은 4.3 이후 연좌제로 고통받은 2세대 이야기를 다룬다.
“내가 다시 제주에 갔을 때, 발이 움직이지 않았어. 내가 신은 이 구두, 이 구두를 신고 우리 제주 땅을 걸어도 되나?”
재일 제주인 김대준씨를 비롯해 4.3 이후에 도망치듯 고향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이 있다. 4.3의 흔적이 평생 족쇄가 되어 차별받은 사람들이다. ‘폭도’나 ‘빨갱이’라는 낙인은 자식들까지 옭아매는 사슬이 됐다. 4.3사건에 관련된 집안은 특별관리대상으로 빨간줄을 그었다. 권력은 도민을 ‘적’과 언제든지 내통할 사람이라 생각하며 수시로 사찰했다.
제주 청년들은 4.3의 낙인을 지우려고 전시인데도 군에 입대해 지리산 토벌 작전 등의 가해자가 된 이들도 생겨났다. 그렇게 연좌제는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들었다. 아버지는 미안해하고 아들은 아버지가 내 인생을 망쳤다며 원망했다. 고향이 그리워도 갈 수 없어 타국에 산다. <사슬>은 고발한다, 그 시대를 살아간 이들 대부분이 겪었다는 연좌제는 당연한 게 아니라고. 국가폭력의 형태가 고문과 학살에서 통제와 감시로 바뀌어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을 고통받게 한다고. 국가기관의 민간인 사찰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사슬>로부터 국가 폭력의 연쇄성을 기억하고 밝혀내야 한다.
제국주의에 희생된 이름 없는 조선인
국가는 국민이라서 보호해야 하는 게 아니라, 모든 인간의 고유한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그러나 제국주의는 인종주의를 내세웠다. 우리 국민이 아닌 인간을 제거하려고 했다. 독일의 나치정권은 “건강하지 않고 약한 유전자가 우리를 병들게 한다”며 유대인 600만을 학살했다. <1923 간토대학살>은 일제가 조선인을 대상으로 자행한 제노사이드를 다룬다.
“약탈의 역사를 없던 것으로 하지 말라. 일본은 전쟁을 잊으려고 한다. 식민통치의 대죄를 은폐하고 축소하려고 한다. 간토대학살은 독일의 홀로코스트처럼 분명히 ‘제노사이드’다.”
일본 시민단체가 일본 정부와 천황 후계자를 향해 외친다. 조선인 수천 명이 지진 피난처를 찾아다니다 무차별 죽임을 당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유언비어가 학살의 원인이었다. 자경단은 조선인 특유의 인상과 발음으로 기준을 세워 식별했다. 여성, 임신부, 아이까지 죽였다.
비극적 학살이 일어난 지 100년이 지났다. 일본 정부는 여전히 6661명이라는 희생자 수를 233명으로 줄이고, 사실 관계를 파악할 수 없으니 조사 계획이 없다고 주장한다. 간토대지진과 간토대학살을 합쳐서 추도문을 보내는 방식으로 학살을 은폐한다. 이름 모를 수많은 희생자들의 넋은 저승 갈 때 노자로 주는 넋전에 실려 나풀거릴 뿐 차마 저승길로 떠나지 못한다.
<1923 간토대학살>은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한일 시민단체의 끈질긴 노력과, 끔찍한 학살의 현장을 다각도로 조명한다. 이 영화는 100년 전 역사 속으로 우리를 끌어당겨 잔혹한 학살의 현장을 마주하게 한다. 일본 정부가 책임을 회피하면서 희생자의 이름과 나이조차 파악되지 않은 현실을 외면한 채 우리 정부는 ‘친일외교’에 매달리고 있다.
미래 세대가 지나간 역사를 기억하려면
폭력은 무엇이고, 국가폭력은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앞으로는 폭력으로부터 어떻게 해방되어야 하는가? 그 답을 담은 영화들이 4.3영화제에서 펼쳐졌다. 영화제는 부조리한 사건을 마주한 관객이 영화 속 등장 인물에 스스로를 투영하게 한다. 나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단편 경쟁 부문 ‘불란지’ 영화들은 4.3을 겪지 않은 세대가 바라보는 부조리한 폭력과 억압의 구조를 다룬다. ‘불란지’는 반딧불을 뜻하는 제주어로 ‘틈새에서 솟아오른 빛’이라는 이번 영화제 주제와 잘 어울리는 작명이다.
<디-데이, 프라이데이>는 5.18민주화운동 이후 남겨진 이들의 시간을 그린다. 주인공 은주는 5.18로 희생된 삼촌을 본 적도, 잘 알지도 못하는데 왜 제사를 지내야 하느냐고 따진다. 겪어보지 못한 역사를 대할 때, 심지어 이웃에게 일어난 사건조차 우리는 종종 ‘은주’처럼 대한다. 미래 세대가 지난 역사를 무미건조하게 바라보는 시각에 우리 자신을 뒤돌아보고 투영하게 된다.
이이다 감독은 5.18을 겪은 세대가 아니다. 국가 폭력과 비슷하게 부조리한 일들이 현대 사회에 나타나는 모습을 소극적으로 바라보면서 부채감을 가졌다고 한다. 그래서 한 걸음 나아가는 방법으로 ‘은주’를 만들어냈고 ‘은주’를 통해 지난 역사를 마주했다.
‘악의 평범성’은 누구에게나 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는 독일 나치 시대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회스 가족 이야기를 다룬다. 우리는 일상 속 폭력을 대할 때 ‘회스’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아마 ‘회스’는 아니더라도 ‘회스 부인’이 아니라고는 단정할 수 없을 터이다.
바로 옆 담벼락을 넘으면 유대인을 ‘소각’하는 수용소가 있다. 수용소 굴뚝에는 태우고 난 뒤 나오는 연기가 끊이지 않고, 사람들 비명소리, 총소리가 일상적으로 들리는 곳이다. 그러나 ‘회스’는 유대인을 효과적으로 태우고 쉴 새 없이 수용소를 가동하는 방법을 고민하면서도 자신의 아이들과 자유롭고 화목한 시간을 보낸다. 그는 아우슈비츠를 떠나는 길에 말을 쓰다듬으며 “너도 힘들겠구나”라고 안쓰러워한다.
수용소 옆에서 ‘평화롭게’ 자란 아이는 물 속에 처박히는 누군가의 절규를 들으며 죽음에 슬퍼하고 죽게 한 군인을 탓하지 않는다. 그저 “다신 그러지 마”라고 말할 뿐이다. 끔찍한 폭력을 행사하면서도 자신의 동물과 아이는 끔찍하게 챙기는 이중성과 모순을 보인다. 이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대로 대물림되어 폭력의 고리는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회스’처럼 적극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더라도 ‘회스 부인’처럼 주변에서 벌어지는 폭력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삶만 지키려고 할 수 있다. ‘회스 부인’은 지금 자신의 삶, 공간만 비추어보며 이곳이 낙원이고, 꿈꿔왔던 삶이라고 말한다. 바로 옆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방치하면 또 다른 억압과 차별을 재생산한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예민하게 죽음을 인식한 듯 매일 우는 ‘갓난아기’와 수용소 노동자를 위해 밤에 몰래 나가 사과를 벽에 꽂아 두고 오는 ‘소녀’가 아닌, 매일같이 전쟁터에서 죽음이 발생하는데도 외면하고 잔치를 벌이는 ‘회스 부인’처럼 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영화는 ‘회스’의 시선 끝에 있는 듯한 현대의 아우슈비츠 기념관을 보면서 구토하는 장면으로 마무리한다. 우리도 내면의 파시즘을 인식하고 역겨워할 줄 알아야 한다. ‘아기’와 ‘소녀’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회스 장모’처럼 수용소의 타오르는 불길을 보고 혐오감을 느끼고, 충격받을 수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알제리와 우리 현대사는 닮았다
이번 영화제에는 <알제리 전투> <친밀한 적> <히든> 등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역사를 담은 영화들이 많이 등장했다. 프랑스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알제리의 해방 투쟁은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한 조선의 독립 투쟁과 닮았다.
영화 <알제리 전투>에서 프랑스 제국주의를 대변하는 매튜 대령은 반군을 ‘몸뚱이를 조각 내도 머리만 남아 있으면 증식하는 촌충’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영화는 ‘알리’라는 민족해방전선 간부가 독립 투쟁을 성공시킨 게 아니라 결국 민중의 단결과 연대로 해방이 완성됐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919년 3.1운동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까지 조선도 단결된 민중의 독립운동이 있었기에 해방을 쟁취했다. 식민지 수탈 아래 폭력, 차별, 불평등, 굶주림으로 고통받으면서도 독립을 외쳤다.
“국기라기보다는 찢어진 이불 넝마에 가깝지만 그래도 국기입니다.”
1960년 알제리 민중들은 초승달과 별이 그려진 국기에 열망을 담아 자유를 향해 나아갔다. 1909년 안중근은 왼손 무명지를 잘라 그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을 새겼다. 1919년 조선인들은 종이나 천에 태극기를 그려 손에 들고 거리에 나왔다. 조선과 알제리 민중 모두 민족의 피가 스민 국기를 독립의 상징으로 흔들었다.
철학자 아감벤은 죽여도 되는 존재, 권력에 순응하는 ‘호모 사케르’에 관해 이야기했다. 호모 사케르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정신과 의사 파농이 말한 “대항 폭력”을 기억해야 한다. 파농은 “폭력은 피지배자가 해방을 이루기 위해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고 강조했다. 폭력은 어떤 순간에는 정당할 수 있다. <알제리 전투>에서 민중은 자유를 위해 바구니에 폭탄을 넣는다. 영국의 서프러제트는 여성의 참정권을 위해 경마장에서 달리는 말들에 몸을 던졌다.
내 안의 ‘조르쥬’를 극복해야
정당한 폭력이란 무엇인가? 4.3영화제는 제주대 사회학과 서영표 교수를 초청해 ‘스페셜 토크’를 진행했다. 서 교수는 영화 <히든> <알제리 전투> <친밀한 적>을 통해 내 안의 구조적 폭력을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대 일상 속 우리는 정당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알제리 민중이 아니다. 피지배자가 아닌 ‘지배자’에 가깝다.
<히든>에 등장하는 알제리 출신 ‘마지드’가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목을 긋는 것뿐이다. 파농이 말했듯 원주민이 가할 수 있는 폭력은 비행기와 함대를 이용한 지배자의 폭력과 동등할 수 없다. 마지드는 교육받을 권리를 빼앗기고 목숨을 잃는데, 권력을 가진 ‘조르쥬’는 감시와 공포를 겪어도 마지드를 구속하고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
“우리는 다를까요? 우리도 조르쥬 같을 수 있습니다. 내게 있는 사소하고 구조적 폭력을 발견해 반성의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 안의 편견을 마주해야 합니다. 불법 체류자의 노동에 의존해 살면서 그들의 인권에 관해 생각해본 적 있나요? 한국 사회가 민주적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나요? ”
서 교수는 실제로 우리는 ‘조르쥬’처럼 공감능력이 계속 떨어지고 있다고 했다. 무감각하고 공감하지 않아야 살아남을 수 있는 승자독식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히든>에서 조르쥬는 가자지구 폭격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여주는 TV 화면에는 무관심한 채 자기 아들이 오늘 들어오지 않은 것에만 신경을 집중한다. 인종주의적 편견 때문에 한 사람의 인생을 망쳐놓고 다시 마지드의 아들에게 납치범의 올가미를 씌운다. 끝까지 자기 확신에 휩싸여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는다.
우리가 4.3을 단편적으로 흘러가는 사건이 아니라 상징적으로 기억하기 위해서는 보다 예민해야 한다고 서 교수는 말했다. 주변 이웃의 문제에 괴로워해야 하고, 스스로 강해지는 게 아니라 연대하고 손을 잡고 의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한 폭력
폭력은 언제나 이유를 달고 나온다. 제국주의는 "야만적인 식민지를 계몽한다"는 명분으로, 국가는 "빨갱이로부터 나라를 지킨다"는 이유로 폭력을 정당화했다. 이처럼 폭력은 ‘합리성'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본질을 감춘다.
독일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이런 폭력의 본질을 꿰뚫어보며,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적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아우슈비츠를 ‘합리화한 폭력’의 상징으로 봤다. 나치 독일은 대량 학살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가스실과 수용소 같은 체계적인 방식과 조직적인 절차를 활용했다. 사람들은 이 과정을 ‘합리적’이라며 스스로를 정당화했지만, 실제로는 비인간적 폭력을 실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말은 폭력을 포장하는 데 자주 쓰이는 익숙한 수사가 되었다.
아도르노의 경고는 단지 과거의 아우슈비츠를 향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폭력은 여전히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경제적 효율성과 기술 발전을 앞세워 노동 착취와 환경 파괴가 이어지고, 안보와 테러 방지를 명분 삼아 시민들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감시를 강화하는 모습이 그렇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폭력의 본질을 마주하고 질문해야 한다고 서 교수는 강조했다. 오늘날의 합리성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효율성, 발전, 안전이라는 이유로 소외되거나 희생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런 질문에 답하려는 노력이야말로 폭력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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