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수 제주이왁] 4.3이 먼데도 ‘기억투쟁’을 해야 하는 이유
‘4월에 부는 바람’ 왜 11월에도 불어야 하나?
해마다 4월 3일 전후에 제주4.3항쟁을 기리는 각종 행사들이 민주화 이후에는 대통령까지 참석한 가운데 크게 열린다. 그런데 11월에 4.3 관련 행사가 쏟아지고 있다. 관련 단체들도 해가 바뀌기 전에 4.3항쟁을 조금이라도 더 널리 더 깊게 기억시키려는 ‘조바심’이 난 때문일까? 인디언 달력에도 11월을 가리키는 말이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했으니…
제주4.3범국민위원회(이사장 백경진)가 주최하는 ‘제주4.3문학기행’이 4~5일 1박2일간 열렸다. 제주4.3평화재단(이사장 김종민)은 5일 현기영-한상희 작가의 ‘사월에 부는 바람’, 8일 이산하 작가의 ‘시인이 만난 제주4.3’을 주제로 북토크를 했다. 제주4.3연구소(소장 김창후)는 8일 오전 ‘시민과 함께하는 4.3길 걷기’를 주최했다. 나는 후원회원 등으로 돼 있어 모든 행사에 참여했다.
13~14일에는 4.3평화재단이 주최하는 4.3평화포럼이 추미애 국회법사위원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4.3의 세계화’ 등을 주제로 제주썬호텔에서 열리는데 거에도 참석할 예정이다. 4년 전 제주도민이 된 뒤 ‘양심의 가책’을 느낀 게 명색이 중앙언론사 출신이면서 언론인을 양성해온 내가 제주4.3에 관해 너무 무지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4.3이 대학살극으로 치달은 데는 <동아일보> 등 중앙언론의 왜곡 보도가 결정적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비판했다(‘제주4.3대참사’ 동아일보에 책임을 묻는다). 4.3 진상규명에 결정적 구실을 한 매체는 중앙언론사가 아니라 폐간된 <제주신보>와 <제민일보> 등 지역신문이었다.
체제의 공식 기억에 맞서는 대항 기억
언론보다는 김석범의 <화산도>, 현기영의 <순이삼촌> 등 소설이 온갖 고초를 겪으며 탄생해 기억을 되살리는 대열의 맨 선두에 섰고,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가 노벨상을 타면서 제주4.3의 전국화를 넘어 세계화에 기여했다. 현기영은 최근 발간한 에세이집 <사월에 부는 바람>에서 자신의 4.3글쓰기를 '기억 투쟁'이라고 불렀다.
‘나는 미력이나마 오랫동안 4.3을 위해 글을 쓰고 조직운동을 해온 셈인데, 그것을 나는 기억 투쟁이라고 부른다. 기억 투쟁은 체제의 공식기억에 맞서는 대항 기억이다. 그것은 역대 독재정권들이 저지른 민중 기억의 부정∙은폐∙왜곡에 대한 투쟁이며, 대중의 무관심과 냉소에 대한 투쟁이며, 금기에 도전하는 두려움에 대한 투쟁인 것이다.’
그는 성장소설의 형식을 빌렸지만 결국 4.3소설이 되고 만 <지상에 숟가락 하나>가 50만 부쯤 팔렸을 뿐 독자들이 진지한 작품들은 안 좋아한다며 씁쓸한 마음을 내비쳤다. 실제로 그가 여든둘에 쓴 필생의 역작 <제주도우다>의 경우 내 아내는 3권째를 읽다가 중단했다. 한때 사랑을 꽃피우며 이야기를 엮어가던 청춘남녀들이 하나하나 학살되는 장면들이 너무 잔인해 더 이상 읽어갈 용기가 나지 않는다는 거였다. 실은 소설보다 현실이 훨씬 더 참담했으니, 현기영도 4.3을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즉 언어절(言語絶)의 참사’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점진적 양심들’에게 경멸의 침을 뱉다
8일 열린 <시인이 만난 제주4.3> 북토크는 이산하 시인의 오랜 지인인 김종민 4.3평화재단 이사장이 묻고 시인이 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는데, 그의 생애는 <악의 평범성>이란 그의 시집에 잘 녹아 들어 있다. 그 시집을 다시 꺼내 보니 마지막 페이지에 ‘그의 시집은 그의 자서전이다’란 내 메모가 적혀 있다.
그는 이 시집 ‘시인의 말’을 통해 단테의 <신곡> 중에서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라는 구절을 인용한 뒤, “내 시집에는 ‘희망’이라는 단어가 하나도 없다”고 했다. 그는 ‘새로운 유배지’라는 시에서 이렇게 썼다.
‘“4.3을 기억하는 일이 금기였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불온시되었던 시절
4.3의 고통을 작품에 새겨넣어
망각에서 우리를 일깨워준 분과 작품도 있었습니다.
이산하 시인의 장편 서사시 <한라산>……”
TV의 ‘제주4.3’ 70주년 추념식을 무심히 보는데
가수 이효리가 내 시를 낭송하는가 싶더니
추념사를 하는 문재인 대통령 입에서 내 이름까지 나왔다.
아득히 환청처럼 들리면서 현기증이 일어났다.
몸은 감옥 밖으로 나왔지만 ‘이산하 시인’이라는 이름은
극좌의 상징으로 30년 동안이나 세상에서 유배된 상태였다.
4.3의 진실을 폭로하다 외면당한 금기의 이름이었다.
‘아---- 이제야 유배에서 풀려났구나……’
혼자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새로운 유배지가 어른거렸다.’
그는 장편 서사시 ‘한라산’을 <녹두서평>에 실었다가 체포된 뒤 항소이유서에 ‘김일성 장군의 노래’ 가사를 썼다가 당시 공안검사 황교안이 “이자는 손목을 잘라 평생 콩밥을 먹이겠다”고 난리를 치게 했다. 그는 북토크에서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이기도 했지만, 실은 유명 인권변호사에게 변호를 부탁했다가 거절당하고, 유명 시인인 고모, 백모 등에게 법정진술을 부탁했다가 모두 거절당한 뒤 그들에게 항의한 것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허위의식으로 가득 찬 ‘이 시대의 점진적인 양심들’에게 그런 식으로라도 분노와 경멸의 침을 내뱉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예정된 국제펜클럽서울대회와 88올림픽 등에 반대하겠다는 뉴욕펜클럽 회장 수전 손택 등의 구명운동으로 신영복 김남주 등과 함께 석방된다. 그러나 몇 년 전에는 암이 발병해 치료를 하고 있다. 그는 앞으로 어떤 시를 쓰고 싶은지 묻는 질문에 “인혁당 8명 처형을 서사시로 쓰고 싶다”며 “그걸 끝낼 때까지는 암사망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제주의 명승지마다 처연해지는 이유
1987년인가, 차를 몰고 제주로 가족여행을 왔다가 함덕 표선 등 제주의 백사장과 정방폭포 등에 반했다. 그런데 4년 전 제주도민이 되어 4.3을 공부하면서 그 아름다운 명승지들이 대부분 학살 장소였다는 사실에 처연해졌다.
표선해수욕장 한모살은 산으로 도피했다가 잡히거나 도피자 가족으로 몰린 가시리, 토산리, 의귀리, 수망리 주민 230여 명이 학살된 곳이다. <제주어사전>에 따르면 ‘모살’은 제주어로 모래를 뜻하니 ‘한모살’은 큰 모랫벌이나 모래언덕이 있었다는 뜻이 될 터이다, 모래언덕에는 지금 도로와 집이 빼곡히 들어서 있지만.
4.3대학살을 세계에 알린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의 배경이 된 곳으로 추정되는 지역은 제주 곳곳에 있다. 특히 한모살은 학살된 주민이 많고 모랫벌 처형 목격담이 소설에 실려 참사현장을 찾는 이들의 눈길을 끄는 곳이다. 목격자는 모랫벌이 잘 보이는 언덕배기 집에서 창호지에 손가락 구멍을 뚫고 학살 장면을 똑똑히 보았다.
옷들이 물우에 둥둥 떠다니는 것추룩 보여서
제주4.3범국민위원회가 기획한 ‘제주4.3문학기행’의 2일째 기행도 한모살에서 시작됐다. 전영미 해설사는 학살의 현장에 도착하면 참가자들에게 소설 속 그 대목을 낭독하게 한 뒤 해설을 이어갔다.
“해거름에 트럭으로 두 대 가득 사름들이 실려와서. 못해도 백 명은 되실 거라. 군인들이 저 모살왓에 총검으로 네모지게 금을 그어놔그네. (…) 높은 사람 같은 군인이 무신 명령을 울르난, 금 안에 있던 사름들 열 명이 앞으로 나왕 반듯이 바당을 보고 서서. 무신 벌을 줄라는가 가만 보고 이시난, 군인들이 뒤에서 총을 쏴그네 몬딱 앞으로 넘어지는 거라. 다음 열 명을 또 나오렌 하난 서로 안 나가젠 줄이 흐트러져서. 군인들이 총신을 휘두르며 똑바로 서라 울르는디. (…)”
“그추룩 총소리를 하영 들은 거는 그때 첨이고 마지막이라. 한참 지나 잠잠해져그네 벌벌 떨명 문구멍을 내당보난, 그추룩 하영 이시던 사름들이 모살왓에 자빠져 이서서. 군인들이 둘씩 짝을 지어그네 한 사름씩 바당에다 데겨 넣어신디, 꼭 옷들이 물우에 둥둥 떠다니는 것추룩 보여서.”
‘기억 투쟁’ 중단되면 비극은 계속된다
한강 작가가 소설 맨 마지막에 밝혔듯이,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 그동안 말하고 작성해둔 방대한 구술기록들이 소설을 쓰는 데 결정적 도움이 됐다. 그는 ‘작가의 말’을 이렇게 끝맺었다.
‘몇 년 전 누군가 ‘다음에 무엇을 쓸 것이냐’고 물었을 때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바란다고 대답했던 것을 기억한다. 지금의 내 마음도 같다.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
구술하는 이도, 받아 적는 이도, 그것을 소설로 쓰는 이도, 아니 그 소설을 읽는 이와 비극의 현장을 답사하는 이도 고통을 무릅쓰는 것은 지극한 사랑이 있기 때문일 터이다. 제주에서 숱하게 터진 민란도, 동학농민전쟁도, 제주4.3도 제대로 기억되지 않았기에, 20만이 희생된 보도연맹 사건과 부역자 누명 학살, 4.19학살, 인혁당 사건 사법살인으로 이어졌다. 기억 투쟁이 중단되면 비극은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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