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노동은 시간과 인생 낭비인가?

풀 뽑기 노동과 글 쓰기 일, 대립하지 않아

세상 지배하는 자본 논리-잊혀진 일상 노동

일이 곧 사람… "단순노동은 위대하다"

산업화 이후 세상 지배한 분업과 전문화, 자본 논리

일상의 노동이 주(主)고 다른 일들은 모두 부(副)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황대권 생명평화운동가 '야생초 편지' 작가
황대권 생명평화운동가 '야생초 편지' 작가

일상의 노동

나는 평생 사회운동가로 살아왔지만 흘려보낸 시간의 대부분은 일상의 노동으로 채워져 있다. 사람들은 황대권이 무척 바쁜 사람으로 알고 연락하기를 주저한다. 바쁜 것은 맞다. 그러나 공적인 일로 바쁜 것이 아니라 일상의 노동으로 인해 바쁘다. 나는 40대 이후로 공동체나 공동체와 유사한 조건에서 살았기 때문에 살림과 관련된 모든 것을 스스로 감당해야 했다.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터진 옷 꿰매고, 개밥 챙겨주고, 농사짓고, 집 고치고, 이것저것 만들고... 살림의 기본이라고 일컫는 의식주 가운데 식(食)과 주(住)는 어느 정도 해결했으나 의(衣)만큼은 아직 많이 부족하다. 옷을 만들어 입으려고 재봉틀까지 구해 놓았으나 진척이 별로 없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핑계이고 입을 만한 옷이 주위에 널려 있어 절박함이 없어서이다.

사람들이 황대권의 사는 모습을 아는 유일한 통로는 페이스북이다. 거기에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상의 노동을 적을 수 없어 주로 사람 만난 일이나 공적인 행위를 적는다. 그러다 보니 아, 황대권은 사회활동으로 몹시 바쁜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한다. 착각이다. 일상의 노동이 쉼 없이 이어지다 보니 틈이 생길 때 집중적으로 사회활동을 하는 것뿐이다. 하루종일 방바닥에 누워 TV를 보며 지내는 백수가 어쩌다가 볕이 좋은 날 테라스에 앉아 만화책을 읽곤 했는데 이웃집 아파트 주민이 우연히 그 장면만 몇 번 보고는 “저 집 아저씨는 독서광이구나” 하고 생각한 거와 같다.

산업화 이후의 분업과 전문화 시대

산업사회가 들어서기 전 대부분의 민초들은 그렇게 살았을 것으로 본다. 다만 당시에는 남녀의 역할 구분이 명확하여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필요한 일은 자기 손으로 거의 다 해결하며 살았다. 산업사회의 엄청난 생산력은 분업에서 나왔다. 혼자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것보다 일의 과정을 나누어 전문화해서 통합하면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19세기 이래 세계는 분업과 전문화의 시대로 접어들었고 이를 게을리하는 사람이나 국가는 시대의 낙오자가 되었다. 단순한 낙오자가 아니라 앞선 사람이나 국가의 노예로 전락하였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제3세계 거의 모든 나라가 비슷한 운명을 겪었다. 안타깝게도 그 과정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끊임없이 일을 쪼개고 전문화하고 기계화하고 디지털화한다. 이 일을 잘하면 선진국 소리를 듣고, 잘못하면 후진국 소리를 듣는다.

더 인간적인 ‘후진국’

이곳저곳 해외여행을 해본 사람이 공통으로 느끼는 것이 있다. 선진국보다 후진국 여행을 할 때 좀 더 인간적인 매력을 느낀다. 왜일까? 가난하면 인간적일까? 가난해서 인간이 망가지는 경우도 많던데...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자. 요리할 때 재료를 한없이 작게 자르고 분쇄하면 재료 원래의 맛이 없어지거나 변한다. 그래서 재료의 맛을 제대로 보여주고 싶은 요리사는 손질을 되도록 적게 한다. 수채화를 그릴 때도 파레트의 물감을 붓에 묻혀 한두 번의 터치로 색을 입히는 것과 여러 번 덧칠한 것을 비교해 보면 전자가 훨씬 투명하고 생동감이 있다. 우리가 기억하는 ‘인간됨’은 장구한 세월 자연과 소박한 공동체에서 형성된 것이다. AI가 지배하는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이 생각하는 인간됨은 이전과 아주 많이 다를 것이다. 어찌 되었든 아직은 AI가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시대가 아니므로 나는 ‘인간적’이란 말의 의미를 이전의 관습에 따라 사용할 것이다.

 

인도의 농장 노동자들이 11월 5일 암리차르 외곽의 스모그에 휩싸인 밭에서 수확한 무우 꾸러미를 나르고 있다. 2024.11.5. AFP 연합뉴스
인도의 농장 노동자들이 11월 5일 암리차르 외곽의 스모그에 휩싸인 밭에서 수확한 무우 꾸러미를 나르고 있다. 2024.11.5. AFP 연합뉴스

일이 곧 사람이다

일을 하면 그 안에 일하는 인간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일은 대충 해 놓고 돈만 탐하는 사람, 죽어라 일해 놓고 인정받는 것만으로 기뻐하는 사람 등등, 일을 보면 사람을 알 수 있다. 일은 곧 사람이다. 그런데 일을 쪼개고 쪼개 미립자 단위까지 가면 사람이 없어지고 만다. 일의 결과는 어마어마한데 거기에 사람이 없다. 분업과 전문화가 발달한 선진국에 가서 인간미를 느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인간미가 밥 먹여 주냐, 먹고 사는 게 중요하지!” 이런 얘기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인간미 찾다가 굶어 죽는 것보다야 훨씬 낫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인간미가 살아 있는 세상에서는 절대 굶어 죽지 않는다. 세상이 이미 인간미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자연스러워진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은 양극단의 중간쯤 어디일 것이다. 조금 못 살아도 인간미가 있는 세상, 또는 인간미가 살짝 아쉽지만 어느 정도 먹고살 만한 세상.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세계에 중간이란 없다. 굶어 죽기 아니면 배부른 돼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살아남는다.

 

15일 오후 경기 수원시 국립농업박물관에서 구운초등학교 학생들이 전통 낫을 이용한 벼 베기 체험을 하고 있다. 2024.10.15. 연합뉴스
15일 오후 경기 수원시 국립농업박물관에서 구운초등학교 학생들이 전통 낫을 이용한 벼 베기 체험을 하고 있다. 2024.10.15. 연합뉴스

세상을 지배하는 자본의 논리-잊혀진 일상의 노동

이런 극단적인 세상을 만든 주역은 누구일까? 자본가일까 정치인일까, 아니면 전문가일까? 아마도 그 모두일 것이다. 사실 주범은 ‘자본의 논리’이다. 이익을 내야 사업이 유지되고 동종 업계의 경쟁을 이겨내기 위해 상대보다 더 많은 재투자를 해야 한다. 더 큰 이익을 내기 위해 끝없이 재투자해야 하는 자본의 논리에 빠지면 헤어날 방도가 없다. 이익을 내지 못하면 시장에서 도태되므로 방법이 없다. 자본의 논리는 호랑이 등이다. 한번 올라타면 내 의지로 멈출 수가 없다. 세상을 비판적으로 보는 지식인도 마찬가지다. 원래 분업과 전문화는 자본의 생산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고안된 것인데 지식 사회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지식이 끝없이 세분화 전문화되어 기어코 AI까지 왔다. 지식을 생산하는 지식인조차 할 일이 없어진 것이다.

요즘 유튜브에 들어가 보면 내용은 같은데 제목만 다른 동영상이 수없이 나돌아다닌다. 모두 AI로 만든 동영상이다. 구독자를 늘리려고 온갖 낚시성 제목이 난무한다. AI가 사람들을 사기꾼으로 만든다. 먹고살기 위해 인간미를 내팽개치는 대표적 장소가 되어가고 있다. 이렇게 자본의 논리에 사로잡혀 인간성을 상실하는 사이 사람들은 우리 조상들이 누렸던 일상의 노동이 사라진 것을 까맣게 잊고 있다. 잊은 게 아니라 그런 일상은 옛날 사람이나 하던 일이지 지금은 치열하게 자본의 논리에 충실할 때라고 강변한다. 살림과 관련된 일상의 노동을 최소화하고 나는 전문가의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11월 3일 인도 카슈미르의 여름 수도인 스리나가르 남쪽, 팜포르의 레티포라 마을에 있는 들판에서 농부들이 사프란 꽃을 따고 있다, 카슈미르의 사프란 농부들은 올해는 강수량이 적어 수확량이 적었다고 말했다. 팜포르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향신료가 재배되는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이다. 2024.11.3. EPA 연합뉴스
11월 3일 인도 카슈미르의 여름 수도인 스리나가르 남쪽, 팜포르의 레티포라 마을에 있는 들판에서 농부들이 사프란 꽃을 따고 있다, 카슈미르의 사프란 농부들은 올해는 강수량이 적어 수확량이 적었다고 말했다. 팜포르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향신료가 재배되는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이다. 2024.11.3. EPA 연합뉴스

단순노동은 인생 낭비인가?

나는 외형적으로 사회운동가 또는 작가의 삶을 살아왔다. 넓은 의미로는 시골에 사는 지식인으로 분류할 수도 있겠다. 언젠가 미국의 공동체 운동에 관한 책을 읽다가 1970년대 초반 광풍처럼 일었던 귀농운동이 한 10년쯤 지나 대부분 도시로 돌아갔다는 구절을 본 적이 있다. 도시에서 전문가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이 한때 히피 사상에 빠져 자연과 공동체를 추구하다가 어느 순간에 “이게 아닌데...” 하며 도시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시골 농촌의 자급자족 살림은 끊임없는 단순노동에 시달려야 한다. 이 단순노동을 견뎌내지 못하면 시골살이가 공포로 느껴지고 무의미해진다. 치열한 경쟁구도 속에서 나의 능력과 재주를 최대로 발휘해 승리자가 되는 느낌은 마약과도 같아서 쉽사리 벗어나기 힘들다. 그것이 마치 살아있는 이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와 달리 경쟁 상대가 없는 단순노동은 인생을 그저 소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내 삶을 이런 단순 노동으로 채우는 것과 공장의 기계에 붙어 평생 저임금 노동자로 사는 것이 뭐가 다르지?”

“매일 매일 지겹도록 반복하는 단순노동이 대안의 세상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거지?”

“이럴 시간에 도시에 나가 불의에 저항하는 데모대에 합류하거나 길거리 캠페인이라도 벌여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의 바탕에는 치명적인 함정이 숨어 있다. 첫째가 단순노동은 의미 없다는 전제이고, 둘째가 누군가와 경쟁하여 승리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르고 있다는 것이며, 셋째가 나에게 익숙하고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경쟁은 사회발전의 첨가제이지 기본동력 아니다

먼저, 모든 단순노동은 위대하다. 아무리 복잡한 노동일지라도 그 기본은 단순노동이다. 단순노동을 제대로 이해하고 잘하는 것이 세상을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단순노동의 위대함은 그것이 육체노동과 결부되어 있다는 데에 있다. 세상을 망친 자들의 공통된 특징은 육체노동을 경시한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부류가 정치가와 지식인이다. 전문가로서 이들의 이력에 육체노동은 시간 낭비로 기억될 뿐이다. 이런 자들이 만든 세상은 근본이 없는 세상 또는 기초가 부실한 세상일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경쟁은 사회발전의 첨가제이지 기본 동력이 아니다. 경쟁과 욕망이 결합하여 세상을 살기 힘든 아수라장으로 만들었고 끝내 지구 위 모든 생명의 터전을 위험에 빠트렸다. ‘적당히’를 넘어선 경쟁은 사회발전의 독이 된다.

마지막은 너무도 많은 사람이 잘못 알고 있는 상식이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참가자가 긴장하면 심사위원들이 늘 하는 말이 있다. 당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을 하라고. 맞는 말이긴 하나 어떤 경우에도 맞는 말은 아니다. 오디션에서조차 내게 익숙한 것만 계속하면 탈락하고 만다. 나에게 익숙한 것, 내가 잘하는 것을 계속해서는 잘못된 문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19세기 말에 조선에 들어온 일본 제국주의는 이 땅에 새로운 질서를 강요했다. 조선의 백성들이 엄청난 진통을 겪으며 그 질서를 받아들이고 익숙해지려 할 때 갑자기 일본이 물러나고 미국과 소련이 그 자리에 들어섰다. 질서의 주인은 바뀌었어도 내용은 같았기에 조선의 백성들은 열심히 적응하여 지금은 선진국 소리를 들을 만큼 새로운 질서의 강자가 되었다. 그런데 그 질서를 계속 유지하면 지구 자체가 결딴나는 사태를 맞이한다. 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익숙한 것과 결별해야 하는 시기가 온 것이다.

익숙한 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아마도 이 결별은 19세기 말 새로운 질서가 들어설 때보다 더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우리는 견뎌내고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여야 한다. 전에는 남이 강요했지만 이제는 우리 손으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야 한다. 다가올 미래가 두렵기는 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설렘과 기대도 있다. 익숙함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언제나 힘들다. 사람들은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본능적으로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인류문명의 모든 위대한 진전은 어려움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어려움을 돌파하는 일이 꼭 괴로운 일만은 아니다. 그 안에 창조의 기쁨과 미지의 세계를 알아가는 경이가 숨어 있다. 익숙함으로부터 벗어나는 첫 단계가 바로 ‘단순노동’이다.

 

14일 경남 함양군 마천면 도마마을 다랭이 논에 심어진 벼가 황금빛으로 물들고 있다. 2024.10.14. 연합뉴스
14일 경남 함양군 마천면 도마마을 다랭이 논에 심어진 벼가 황금빛으로 물들고 있다. 2024.10.14. 연합뉴스

풀 뽑기 노동과 글 쓰기 일은 대립하지 않는다

이틀 후면 원고 마감일인데 도무지 글의 진척이 없다. 잡초가 극성인 고추밭에서는 제발 좀 살려 달라고 아우성이다. 이럴 때 나는 주저 없이 책상을 박차고 나와 호미를 들고 밭으로 간다. 그러고는 온종일 밭에 쭈그리고 앉아 풀을 뽑는다. 적어도 풀을 뽑는 동안만큼은 원고 마감은 안중에도 없다. 풀을 뽑느라 귀중한 하루를 보냈지만 이상하리만치 불안감은 없다. 오랜 경험으로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시 책상에 앉아 자판에 손을 얹는다. 막힘 없이 글이 나온다. 원고 마감 직전에 전송 버튼을 클릭하고는 다시 일상의 노동으로 돌아간다. 지난 20여 년간 무수한 원고 마감 시간을 겪었지만 남이 보면 믿기지 않을 정도의 노동 일을 하면서 한 번도 마감 시간을 놓친 적이 없다. 심지어 어떤 때는 마감 몇 시간 전까지 일하다가 무서운 집중력으로 글을 완성하여 보내기도 한다. 특별한 재능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으나, 내게는 일과 노동이 하나의 흐름 속에서 맺고 풀기를 거듭할 뿐 글쓰기나 살림을 위한 노동이 별개의 것이 아니다. 물론 이런 것은 있다. 밭에서 김을 매면서도 머릿속 어딘가에는 글의 주제가 ‘ON’ 상태로 켜져 있다.

일상의 노동 없는 자칭 ‘도사’들은 다 사기꾼

일상의 노동과 관련해 글쓰기를 예로 들었지만 정치사회 활동도 마찬가지다. 밭에서 일하다가도 내가 관련된 사회단체에서 연락이 오면 호미를 내던지고 달려 나간다. 어떤 때는 그 길로 며칠 있다 돌아오기도 한다. 많은 동호회나 친목 모임, 예컨대 다회(茶會)나 요리연구 모임, 명상 모임 등에 나가 보면 정치적 발언이 금기로 되어 있다. 회원 또는 참석자의 단합을 위해서이다. 이해가 간다. 나도 내가 속한 단체에서 극우적 발언을 일삼는 사람을 쫓아내거나 제 발로 나온 적이 있다. 이런 일을 자주 겪다 보니 쓸데없는 논쟁을 줄이기 위해 회원들이 스스로 정치적 발언을 삼가는 것이 모임의 예절로 자리잡고 있다.

그런가 하면 정치사회 의식이 전혀 없는 모임도 많다. 이들은 세상이 어떻게 되든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이 계속되는 것만이 중요하다. 그것이 취미건 연구건 세상의 변화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이웃 나라가 침략해 들어와 주권을 유린해도 내 관심사가 지속되는 한 침묵으로 일관한다. 역사적 변화에 철저히 객체로 살아가는 군상이다.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고 내 관심사에 끌려다니는 일차원적 인간들이다.

또한, 천공처럼 분수를 모르고 천방지축 날뛰는 도사나 동굴 속에 숨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도사도 문제이다. 이들에게는 일상의 노동도 없고 입만 열면 나오는 천지의 도라는 것도 지극히 자의적이다. 자기 입에 들어가는 밥알 하나 해결할 능력도 없는 도사는 다 사기꾼이다. 이런 자들의 감언이설에 빠져 얼마나 많은 민초들이 인생을 허비하고 있는지! 그런 사기꾼을 쫓아다닐 시간에 일상의 노동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내 삶과 세상을 평화롭게 만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일상의 노동이 주(主)고 다른 일들은 모두 부(副)

내 삶에서 일상의 노동은 주(主)이고 세상에 알려진 업종의 일들은 부(副)이다. 이런 패턴은 아주 오래전에 확립되었으며 남들이 내 이름자 앞에 무슨 수식어를 붙이든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사는 방식만이 옳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누구든 자기 방식대로 살아갈 권리가 있으니까. 다만, 과도한 욕망과 과도한 경쟁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모두가 힘들어하는 것을 보며 일상의 노동을 회복하는 것이 하나의 탈출구가 아닌가 하여 이런 글을 쓴다. 일상의 노동을 모두 자본 시장에 맡겨 놓고 전문가의 삶을 사는 이들에겐 말도 안 되는 주장으로 들리겠지만, 전문가적 삶의 종착지인 AI 시대가 눈앞에 너울대고 있는데도 여전히 익숙한 것을 붙들고 있는 자신을 되돌아보기를 바란다. 만약 인간이 AI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런 말을 무시해도 좋다. 그렇지 않다면 하루빨리 대안을 찾아 나서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은가? 혹자는 그러기에는 우리가 너무 멀리 왔다고 고백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무 멀리 왔건 아직 덜 왔건 중요한 것은 ‘나의 삶’이지 내가 시대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는 ‘환상’이 아니다. 나의 삶이 천지자연의 도에 맞게 살고 있는지가 먼저이다. 결과는 천지가 결정하는 것이지 나의 의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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